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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양장) ㅣ 소설Y
청예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평점 :
한 줄 요약:
환상적인 총천연색 여름의 행성. 그곳에서 우리의 후손들이 *뺑이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청예의 『일억 번째 여름』은 멸종을 앞둔 세계에서 펼쳐지는 청춘 SF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철저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정착하지 못한다. 인류의 후손에게는 고향이 없다. 지배층으로 보이는 두두족도 사실 다를 바 없는 처지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억 번째 여름”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이들은 모두 유랑자이며, 피난민이며, 예언과 재난의 틈에서 유예된 존재들이다.
어째서 선조들은 우리를 이렇게나 힘들게 창조한 것일까. 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서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삶이라는 게, 가끔은 내 것이 아닌 남의 불행까지 억지로 나눠 받는 일처럼 버거웠다. (59쪽)
정착할 수 없는 삶이야말로 디아스포라의 핵심이다. 『일억 번째 여름』의 다섯 아이들은 누구 하나 제자리에 머물지 못한다. 떠밀리듯 행성을 전전하고, 정체성을 부여받기보다 찾아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대신, ‘무엇을 위해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다. 그것은 생존의 이유이자, 사랑의 이유다.
“형의 쓰임새는 살아남는 거야.”
우리에게는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이 형을 살려야겠다. 이 형이 살아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성의 어딘가에서 멸종이라는 차가운 단어를 영원히 피해 줬으면 한다. 평생토록 피난자의 신분이 되더라도. 두두족의 매서운 재앙을 얄미울 정도로 노련히 피해 다니며. 끈질긴 바퀴벌레처럼. 징그러운 지네처럼. 죽여도 절대 죽지 않는 마음처럼. (153쪽)
디아스포라 서사에서 공동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자가 있어야 한다. 청예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서사를 추동하는 다섯 명의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채집자, 해독가, 족장이라는 책임을 멍에처럼 뒤집어쓴 희생양들이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서로를 믿고, 지키고, 사랑한다.
어려도 삶은 힘들었다. 사는 것이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았다. 내 곁의 누나도 사는 게 고단하다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두꺼운 진심을 얄팍하게 으깨며 미소 지었고, 내가 자신의 쓰임을 완성한다고 말해줬다.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믿고 싶다는 소망이 추동하며 나를 흔드니, 나는 그 순간에 타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바보가 되었다. (165쪽)
이 소설이 빛나는 이유는, 디아스포라적 서사를 뜨겁게 감정화한다는 데 있다. 피난의 고통, 실향의 슬픔, 기원의 상실은 있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청예는 그 틈에 새로운 연대를 심는다. 고통을 전가 받은 세대가 서로의 “사는 이유”가 되어주며 끝내 다가올 계절을 맞이하는 이야기로.
“무언가로 산다는 거 이토록 큰 책임을 지고 사는 일이다. (…) 그러니 희생을 오직 슬픔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힘들지만.” (243쪽)
선택받지 못한 자들, 뿌리내릴 곳을 잃은 자들, 죽음의 예언 속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간신히 붙잡은 자들. 그들의 서사는 “일억 번째 여름”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난다. 꽃은 어두웠지만 마음은 끝내 푸르렀다.
“죽여도 절대 죽지 않는 마음처럼.”
이 마음은 우리가 그토록 잃지 않으려 했던 고향일지도 모른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어째서 선조들은 우리를 이렇게나 힘들게 창조한 것일까. 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인해서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 삶이라는 게, 가끔은 내 것이 아닌 남의 불행까지 억지로 나눠 받는 일처럼 버거웠다. - P59
"형의 쓰임새는 살아남는 거야."
우리에게는 살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이 형을 살려야겠다. 이 형이 살아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행성의 어딘가에서 멸종이라는 차가운 단어를 영원히 피해 줬으면 한다. 평생토록 피난자의 신분이 되더라도. 두두족의 매서운 재앙을 얄미울 정도로 노련히 피해 다니며. 끈질긴 바퀴벌레처럼. 징그러운 지네처럼. 죽여도 절대 죽지 않는 마음처럼. - P153
어려도 삶은 힘들었다. 사는 것이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았다. 내 곁의 누나도 사는 게 고단하다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두꺼운 진심을 얄팍하게 으깨며 미소 지었고, 내가 자신의 쓰임을 완성한다고 말해줬다.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믿고 싶다는 소망이 추동하며 나를 흔드니, 나는 그 순간에 타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는 바보가 되었다. - P165
"무언가로 산다는 거 이토록 큰 책임을 지고 사는 일이다. (…) 그러니 희생을 오직 슬픔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힘들지만."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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