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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ㅣ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평점 :
여름휴가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계획은 이미 무산되고 말았다. 이 작고 여린 새순 때문에. (26쪽)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괜히 문샤인을 잘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31쪽)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한 동하는 책이 든 붉은 COSTEL 사 냉장고와 새순이 자란 화분이 자신의 침대 옆에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1년 전에 헤어진 전 여자친구 세주가 연락도, 허락을 구하는 일도 없이 두고 간 것이었다. 냉장고에 “부탁한다”는 쪽지 한 장만을 붙여둔 채.
동하는 그 뜬금없는 침범에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근처 꽃집에 가서 그 새순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배우고, 냉장고에 있던 책들도 한 권씩 꺼내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전부 읽는다.
수동적인 책임감이나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다. 글쎄, 어쩌면 세주의 유품일지도 모르니 더 마음을 써 돌보기도 했겠지만(동하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보다는 순전한 즐거움의 능동성으로 세주가 두고 간 책과 식물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린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보다 그저 좋으니까 하는 것,
소설 속 세계가 그런 자연스러움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가 추천사에 적어둔 “반그늘에서 자라는 소설”이라는 분석과 작가의 말 첫 단락이 마음에 와닿았다.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 문장은 외로움을 잘 알고 있을까. 고통을 잘 담아내고 있을까.
이것은 책을 쓴 작가의 진심일 테다. 소설을 다 읽고서 작가의 말을 읽으니 비로소 이 책이 왜 좋았는지 완전히 설명된 기분이었다.
책 속에는 내가 밑줄 그으며 동의했던 문장이 있었고,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동하와 세주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은 뒤에도 이 소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주가 동하의 집에 침범하여 화분과 책을 부탁하고 간 이후, 그들이 서로를 보지 않았던 이 년여의 공백 동안 그들의 삶에 이전과 다른 사랑이 깃들게 되었으므로 나는 이들의 헤어짐이 문자 그대로의 헤어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책, 식물, 술. 모두 세주가 좋아하던 것들인데 이제 세주의 삶에서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지나간 시절. 그러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98쪽)
동하와 세주는 그들 인생의 내력, 버릇, 성격과는 별개로 따뜻한 사람들이다.
또한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인물들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 찬가 아닐까?)
덕분에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한데도 웃겼고 큰 파동 없이 잠잠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오래도록 삶을 응시해온 작가의 연륜 덕에 책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
냉장고에서 세주의 책을 꺼내 읽었던 동하가 그랬듯
나도 초중반부터는 편한 마음으로 원하는 야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며 책을 읽었다.
나에게 이 책은 달고 시큼하고 쌉쌀한 하이트 제로의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작가님께,
덕분에 불 켜진 옆 빌라의 창문과 노랗게 뜬 상현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는 재미 몇 가지를 일러주셔서 감사해요.
작가정신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여름휴가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는 계획은 이미 무산되고 말았다. 이 작고 여린 새순 때문에. - P26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괜히 문샤인을 잘 기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 P31
책, 식물, 술. 모두 세주가 좋아하던 것들인데 이제 세주의 삶에서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다. 지나간 시절. 그러나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 P98
세주가 살림살이를 주면서 함께 부탁했던 식물은 이미 죽어서 화분째 버려졌거나 병든 상태로 어두운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친구가 아무리 잘 대해줘도 식물이 건강하게 자라지 않거나 식물을 정성껏 돌보지 않은 집에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는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식물의 꽃말에 대해 되뇌고 곱씹었다. 그러자 친구 이름은 희미하게 잊히고 대신 꽃말로 친구의 이미지가 새롭게 각인되었다. - P50
위로의 대상이 사진인지 자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 문장이 사진을 계속 지켜줬다는 것이었다. - P53
밤에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반드시 너에게 답을 줄 거라고. 할아버지가 진짜 그들이 답을 준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세주는 조금 커서 알았다. 질문은 답을 듣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무게를 덜기 위해 던지는 거란 걸. 세주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기 위해 눈 뜬 창문을 향해 말을 걸었고, 말은 빛으로 되돌아와 어둠 속 불안을 물리쳐주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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