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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평점 :
펜데믹은 미국 여권 소지자들과 그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즉 자국을 떠날, 자유롭게 여행할, 제지를 당하지 않고 돌아올 권리란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생기며, 그런 권리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p.366)
“면허”는 특정한 일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행정 기관이 “허가”해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행 면허”인 여권은 국민의 (타국으로의) “이동권”을 국가가 “허가”해주었음을 증명하는 공문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든 출신 국가에 귀속되어 평생을 출신 국가의 영향 아래에서 살아간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지닌 서류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 가치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인 반면,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시민권이나 출신 국가를 근거로 여행과 이주에 압도적인 장애를 직면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다. (p.353)
저자가 강조하는 건 우리의 삶이 우연성에 기반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우연성을 (책의 주제에 맞추어) “출신 국가”에 한정하여 이야기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이 우연성을 무한히 확장하여 스스로의 삶에 적용해볼 수 있다. 특정 시대에 태어난 것, 생물학적 여성이나 남성으로 태어난 것, 특정 성 지향성을 가진 것,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난 것, 누군가의 언니나 누나, 형이나 오빠, 혹은 동생으로 태어난 것, 특정 외모나 질병, 신체적 장애가 있는 것. 기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우연으로 구성된다.
“어떤 신체”는 이방인이나 외지인으로 인식되는 반면, “어떤 신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이들의 여권은 이동성을 향상시키거나 확장시킨다. (p.359)
우연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아이러니를 되짚으며 저자는 말한다. 특정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왜 서로를 적대시해야 하느냐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특정 국가, 특정 성별, 특정 성 지향성, 특정 신체를 이유로 우리가 서로를 적대시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경이나 국가가 허구라는 것을 “물리적 영토도 없고, 기존의 어떤 국민국가와도 동일시되지 않는 유토피아적 구성체로 고안된” 예술 프로젝트인 NSK 국가에서 발행한 여권을 사례로 들어 설명한 지점은 특히 흥미롭다. 현대인은 우연성이 일구어낸 허구의 개념으로 보호받거나 배척당한다. 21세기 현대인의 신원은 “존재 밖”에서 정의된다.
갑자기 그는 자신의 신원이 더 이상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음을, 이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서류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그를’ 사물로 만든다.” (p.40)
저자는 인류의 “이동성”에 관한 억압의 사례를 살피며 독자가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 환대받는 유토피아의 도래를 상상해보도록 판을 깐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요원한 사고실험일 뿐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순수한 환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더 넓은 공동체를 환대하기 위한 법률을 만드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 1위: 에렌 예거
“화성 외국인보호소는 법무부 산하 국가안보 시설이에요. 외국인이 아니라 국경을 보호하고 있죠. 국경은 첨예하게 모든 차별이 응축된 공간이에요. 우리가 사는 사회의 윤곽이 있어요. 난민은 우리 사회의 윤곽을 그리는 사람들이죠. 이들이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을 못 받으면 국민도 못 받아요. 저는 점차적으로 개선, 나중에, 이런 말 안 믿어요. 가장자리에 있는 걸 바꾸면 저절로 안쪽도 좋아지죠.”
(은유, <뭐라도 같이 먹으면 나의 편견이 깨져요>, 시사in, 2025.03.23.)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펜데믹은 미국 여권 소지자들과 그 정부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즉 자국을 떠날, 자유롭게 여행할, 제지를 당하지 않고 돌아올 권리란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생기며, 그런 권리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P366
경제적·정치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지닌 서류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 가치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인 반면, 다른 이유도 아니고 단지 시민권이나 출신 국가를 근거로 여행과 이주에 압도적인 장애를 직면하는 사람들은 그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다. - P353
"어떤 신체"는 이방인이나 외지인으로 인식되는 반면, "어떤 신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이들의 여권은 이동성을 향상시키거나 확장시킨다. - P359
갑자기 그는 자신의 신원이 더 이상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음을, 이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서류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그를’ 사물로 만든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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