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단 #도서제공
정물화만 나오면 대체 무슨 의미일까 멀뚱멀뚱 쳐다보던 내게 <스틸라이프>가 찾아왔다.
정물이라는 소재가 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가장 넓게 탐색한다는 책.
서평단 당첨 소식에 기뻐하며 책을 기다렸다.게다가 #을유문화사 의 철학, 예술 분야 책은 믿고 보게 된다. 이런 특별한 책을 출판해주어 감사하다.
책의 물성도 너무 예뻐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여러 예술가와 작품이 인용된다. 정신없는 와중에 엮은이의 주석은 한줄기 희망이 된다.
여름 과일 광주리, 운명의 두상, 사과와 배,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 각 장의 소제목들과 내용이 얼기설기 머릿속에서 굴러다닌다. 분명 알 수 없는 기분이지만, 정물화를 마주할 나의 눈과 마음은 조금 달라져 있으리라.
<사과와 배>가 그려진 정물화는 보기가 좋다. 요즘은 사과 못지 않게 복숭아가 자주 그려지는 과일같다. 복숭아도 시대마다 의미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진다. 세잔과 졸라의 우정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아폴리네르의 <알코올>은 지금 내 장바구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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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점심 식사, 1868>
우리는 모네가 언제나 근원과 파생의 관계에 대해 명철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짚고 가야 한다.
빵은 익은 풀, 그러니까 밀에서 온 것인데, 지중해 사람들은 밀로 인해 사냥꾼이 농부로 진화하고 또 농촌이 도시로, 문명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46-47p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1907>
콕토가 우리에게 한 조언, 즉 우리가 때로 세련됨을 뒤로하고 정글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다 병들고 말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고대 부족의 춤과도 같은 이 그림에서 야만스럽게 표현된 여성들 외에 유일한 디테일은 사과, 배, 포도 한 송이, 멜론 한 조각을 그린 정물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4년 전 피카소는 사과 한 그릇을 들고 앉아 있는 여성의 고전적인 누드 소묘를 그린 적이 있다. 사과, 배, 과꽃을 담은 꽃병은 일찍이 피카소 정물의 소재가 되었고, 그는 이 소재를 버린 적이 없다. 피카소가 화가로서 한 일 중에 하나는 과거가 남긴 '재고'를 찬찬히 검토하는 일이었고, 이는 실제로 모더니즘의 중요한 정신이었다. 그래서 피카소의 상징은 독특한 방식으로 복합적이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피카소가 왜 <아비뇽의 여인들>에 사과와 배를 그렸는지가 아니라, 피카소는 사과와 배를 그릴 때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사과와 배를 이미지가 아닌 일종의 도식glyph 으로 다룰 것이다.
상형문자 또는 도식적인 요약은 언제나 언어와 그림에 모두 존재해 왔다. 짓궂게 그 근원을 숨기면서 말이다. 131p-13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