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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먼 -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2022년 3월
평점 :
미국의 재활법 504조와 미국장애인법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었다. 장애인의 권리 투쟁의 역사와 장애인 문화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었다. 그나마 있다면, 장애인단체에서 서울 지하철에서 이동권 시위를 했다는 사실 정도.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동등한 사람으로서 장애인의 권리를 찾으려 노력한 주디스 휴먼의 이야기다. 그리고 주디 스스로가 말했듯이 혼자가 아닌, '함께' 만들어간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난한 과정 속에서도 모두의 의견을 듣고 합의하는 지루하고 비효율적일 수 있는 과정을 거쳐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지의 모습도 보여줘서 더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공동체를 이끌어간 주디의 리더십도 존경스러웠다.
사람이 각기 다르듯 각자가 가진 장애도, 의견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는데 그걸 모두 존중하고자 하는, 그리고 서로 존중하고 있는 그 순간들이 정말 아름답다.
주디스 휴먼은 1949년 소아마비 대유행의 영향을 받은 4만 3000명 가량의 미국 어린이 가운데 한 명으로, 사지마비 장애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풍요와 빈곤, 배제가 혼란스레 공존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주디스 휴먼의 집은 유대인 이민 가정이었다. 유대인이자 여성이자 장애인으로 살아온 주디스 휴먼에게는 겹겹의 차별과 편견이 존재했지만 휴먼은 그를 받아들이고 살지 않았다. 휴먼은 자기자신이 되고자 했다.
휴먼은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학교 입학이 거부되었다. 늘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거부당하게 되는 수치심은 어느날 너는 아프냐는 또래의 질문으로부터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장애인을 볼 때 의학적인 문제로 본다거나(그래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장애인이라서 할 수 없는 것부터 보려는 경향을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가능한지'를 봐달라고 하며, '우리 각자가 고유하게 가져야 할 시민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동시에 우리는 변화가 일어날 때 사람들이 학습 곡선상에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임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들이 장애인의 시각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야 했다.(220쪽)" 고 말하는 주디가 정말 멋지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르기에, 서로의 말을 들으며 서로의 눈을 빌려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휴먼은 그걸 이해했고, 덕분에 우리는 결국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된다. 빠른 속도도 아니고 때론 거부감도 들겠지만 변화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걸 이 책을 보며 많이 느끼게 된다.
주디스 휴먼의(그리고 또 다른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이야기의 시작이
"나는 나에게 장애가 없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어요." (288쪽) 라면?
휴먼은 장애를 통해 '장애가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믾은 기회'를 얻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말처럼, 주어진 조건 안에서 내가 나일 수 있기 위해 행동하는 모두가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된 사회가, 그런 세상이 역시나 맞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여러 장애가 삶에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까지 침범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 또한.
504조는 장애인을 재정의했다. 장애를 의학적인 문제로 보는 대신 시민, 그리고 인간의 권리 문제로 보게 했다. - P229
이제 당신은 궁금할 것이다. 이 길고 느린 과정이 우리를 미치게 만들었을까? (중략) 민주주의는 본래 느리기 때문이다. 민주적 정부의 일을 오래 걸리고, 느리고 힘들기 마련이다. 그래야 맞다.
민주적 정부의 핵심은 특정한 사람들이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을 이전에 합의한 계약에 따라 통치할 수 있도록 법과 정차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민주주의에서는 일을 하기 위해 견제와 균형, 숙고, 분석, 협상과 타협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권력을 준 사람들이 서둘러 일을 처리해버리거나 경솔하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돕는 장치들이다. - P243
변화는 결코 우리가 생각한 속도에 맞춰 찾아오지 않는다. 수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전략을 세우고, 공유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찾아온다. 점진적으로, 고통스러울 만큼 천천히 변화는 시작된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언가가 살짝 기울어질 것이다. - P263
찰스 라이트 밀스는 개인의 생애사와 역사를 연결하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핵심이라고 이야기했다. 주디스 휴먼의 생애는 우리에게 장애 인권의 역사를 개인의 생애사와 연결해 살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의 이야기는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시작하지만, 사적인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구조와 연결되고, 당대의 인식, 정책과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주디가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던 것, 교사 채용에서 부당하게 탈락한 경험은 개인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사회에서 분리하고자 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주디는 그저 시대의 희생자로 살 수도 있었지만, 장애를 가진 다른 동료들과 그 불합리한 상황을 사회적 문제로 해석하고 소송을 제기하고 조직을 만들어 투쟁하는 삶을 ‘선택‘했다. 우리는 주디의 인생 이야기를 읽으며 사회 결정론에 빠지지 않고, 구조의 제약 속에서 결국 변화를 만들어내는 행위 주체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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