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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나치 시대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나치는 길들여지지 않는 눈을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을 다스리고자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부당한 살생부는 언젠가 삶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9
서문 : 독일인과 독일인 미술가 중
<바닷가의 수도사>는 낭만주의 회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화가 자신이 남긴 말에 따르면, 한 사람이 깊은 생각에 잠겨서 해변을 걷는데, 갈매기가 소리를 지른다. "마치 광포한 바다에 감히 다가갈 생각을 하지 말라며 그에게 경고하려는 듯이."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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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저는 저입니다 - 파울라 모더존 베커 중
..독일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3K'가 결정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3K란 아이, 부엌, 교회를 일컫는다. 즉, 여성이 독일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돌보고 교육하기 위하여 부엌살림과 교회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여성에게서 교육 기회를 빼앗는 명분으로 쓰였다. 26
브레멘은 두 가지 점에서 가볼 만하다. 그곳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 명의 여성 미술가에게 헌정된 미술관이 있으며, 이 미술관에서는 서양 미술사 최초라고 알려진 여성 미술가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볼 수 있다. 27
파울라가 여성 미술가로서 남긴 누드 자화상은 자기 연구를 위한 시작이요, 자기의 삶을 온몸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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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 모더존 베커,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파울라 베커도 아니니까요. 저는 저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의 모든 싸움의 최종 목표가 될 거예요."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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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 모더존 베커, 호박 목걸이를 걸친 반신 누드 자화상
파울라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이끌던 여성운동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누드 자화상은 여성 해방을 위한 자기 나름의 응답이요, 어떤 페미니즘보다 설득력 있는 자기주장이다. 릴케는 화답이라도 하듯 진혼곡에 이렇게 적었다.
"그래서 당신을 당신의 옷 속에서 끄집어내,
거울 앞에 놓고서, 당신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어요.
당신의 눈길까지 말이오, 당신의 눈길은 그 앞에 크게
머물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게 나야; 그게 아니라:
이거야."
릴케는 파울라가 왜 그리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지 알았음이 분명하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델임도 이유겠지만, 자기를 연구함이야말로 자화상을 그리는 중요한 이유이다. 자기란 누군가 지어준 옷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취하는 태도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스스로 짓는 것이다.시인이 보기에 파울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를 그리면서 "이게 나야"가 아니라, "이거야"라고 말한다. 자기란 스스로 있는 몸이라고,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주어와 자동사로서 존재한다고 말이다. 55
정확한 자세로 좌절하기 - 렘브루크 중
오늘날 독일에서 렘브루크는 '독일의 로댕'이라 불릴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독일 밖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예술가이다.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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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란 목과 가늘고 길쭉한 팔다리, 타원형 얼굴, 각진 어깨, 어른 키를 넘는 크기, 최소한의 볼륨감. 이와 같은 요소들은 이 때부터 렘브루크 스타일로 자리 잡는다.
... 두 다리를 굽혀서 하나는 바닥에 대고 다른 하나는 세운다. 한 손은 가슴 쪽으로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으로 내리며, 고개는 살짝 기울인다. 한쪽 무릎을 꿇어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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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루크, 무릎 꿇는 사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렇게 비꼬았다. 렘브루크가 지어낸 여성상은 "포유류일지언정 특별히 인간"이 아니며, "기도하는 사마귀"에서 어떻게 "시적인 우아함"을 볼 수 있는지, "기린처럼 긴 정강이뼈"가 어째서 "사랑스럽다"는 말인지 알 길이 없다고 말이다. 그는 렘브루크에게서 "예술이 아니라 병리학상의 문제"까지 봤다. 75
렘브루크는 인체를 본뜬 교량 건축으로 인간 사회가 몰락함을 표현했다. 가늘고 길쭉한 팔다리가 기둥이 되어서 기다란 등과 허리를 잇는다. 자칫하면 무너질 수도 있는 교량이다. 상승과 몰락 사이에서 정확하게 좌절하기. 조각은 한자를 닮았다. 꺾을 좌挫에 꺾을 절折. 팔도 꺾이고 무릎도 꺾이고 목도 꺾였다. 한 손에 쥔 칼자루도 부러졌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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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루크, 몰락한 사람
얼굴 두 개로 지어낸 <엄마와 아이>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세상이 꼭 지켜야 하는 사랑이다. 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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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루크, 엄마와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