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변함없이 죄 없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녁녘, 나에게 이런 북적거림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내가 나그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이것은 반투명의 피막으로 가로막힌 '저 건너편'의 풍경이다. 49


하지만 이런 종교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미신적인 적의가 나찌식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전통적인 종교 공동체의 성원을 가리키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인종'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망상으로 바뀔 때, 유대인의 '절멸'이라는 프로젝트가 실행 가능하게 된 것이다. 69



예수의 처형에 '유대인'이 책임이 있다는 견해를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개정한 것은 고작 1962년부터 1965년에 걸쳐서 열린 제2회 바띠칸공의회에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도의 수난은 당시 유대인 혹은 오늘날의 유대인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72


이 사람 저 사람 어느새 줄줄이 떠오르는 추억이 정말 두서없다. 비참하며 골계적이고, 또 놀랄 정도로 끈질기면서도 의외로 여린 내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정경은 모두 '막연한 적의와 조소의 장벽'에 갇힌 소수파만의 비굴함과 정반대의 오기 그리고 자포자기한 대소(大笑)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언제나 유랑과 고향 상실의 비애가 뒤엉켜 있다. 77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7

 



강제수용소에서 <신곡>을 암송하는 작업은 그에게 과거와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문화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마음이 아직 기능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요컨대 자신을 재발견케 해주었던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쟛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만한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일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155-156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181



말할 것도 없이 에스빠냐 사람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저지른 일,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저지른 일, 식민지를 건설하러 아메리카 대륙에 갔던 백인들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 노예에게 저지른 일, 일본인이 타이완, 조선, 중국 대륙 등 아시아 각지에서 저지른 일, 그 범죄들과 비교함으로써 나찌의 대죄를 상대화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나찌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자신을 죄를 면하려는 것 또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 이후 거의 2백 년,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보편적인 인간관을 세계에 전파시켜온 사람들은 동시에 이 인간관을 스스로 계속 거역해왔다. 이 사람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를 실천해온 것이다. 189-190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

 

 

 

 

그러나 그녀(한나 아렌트)는 여기에서 민족으로서의 '독일인'전체에 죄가 잇다는 식의 생각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냉철하기까지 한 보편적 정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여기에서 아렌트가 주장한 바가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 즉 '독일 국민'의 정치적 책임을 면책할 수 있다고 오독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그후에 쓴 <집단의 책임>이라는 논문에서 '죄'와 '책임'의 개념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녀는 "우리 전부에게 죄가 있다"라는 호소가 현실에서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집단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난민이나 망명자 등 '국가가 없는 사람들'뿐이다.  211-212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 나는 이 깊이 고려된 의도적인 태만이야말로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221

 

 

 

'저편'에서 그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데도, 왜 '이편'에서는 만사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일까? 240

 

 

 

'이편'으로 살아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오디쎄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45

 

 

하지만 증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고 표현 가능성을 초월한 경험을 증언해야만 한다. 이해 불능의 경험을 이해하고, 표현 불능의 상황을 표현하고, 전달 불능의 상념을 전달한다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부조리하게도 증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증인들은 부당한 의심과 무관심의 시선에 둘러싸여 고립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 그들과 그녀들은 그 믿기지 않는 일의 희생자다. 당신들을 믿게 할 의무를 희생자에게 부과해야 한다는 말인가?

... 증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증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편'의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쪽'이다. 247-248

 

 

 

 

쁘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나 구제의 서사, 오디쎄우스의 개선에 대한 서사....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그 단순 명쾌함에 매달리려고 한다. 하지만 옅은 어둠 속 공간에 몸을 던진 쁘리모 레비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돌바닥에 내동댕이침으로써 우리의 천박함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냉혈이나 잔혹은 지금도 세계를 덮고 있다. '인간이라는 척도'는 파괴된 상태다. 아우슈비츠에 의해서 폭로된 '단절'을 우리는 넘어설 수 있을까.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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