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언어>에 이어 두번째로 읽은 어슐러 르 귄 여사의 에세이. 밤의 언어때보다 훨씬 나이드신 르 귄 여사님은 여전히 날카롭고 위트넘치고 여성혐오를 혐오하고 고양이에게 한없이 약하시다. 소설도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좀 더 읽고 싶은데 돌아가셔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포스트잇을 많이 붙여 뚱뚱해진 책을 펼치고 몇 부분만 옮겨 적어놓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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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긍정적 사고의 힘을 굳게 믿는다. 긍정적 사고는 아주 좋다. 현실적인 평가와 실태를 수용한다는 전제하에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현실 부정의 바탕 위에서 긍정적 사고를 한다면 결과가 썩 좋지 않을 것이다. 27
선의를 가득 담아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27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 상태이다.
...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두려움은 현명하기 어렵고 결코 친절할 수 없다. 28
여기 노인의 세상에서는 다소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이상함이란 출판사들을 지원하고 작가들을 독려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활주로에 윤활유를 바르느라 헌신하는 유명한 자선단체인 '아마존 닷컴'에 내가 좀 무례하게 굴었다가 <어떻게>의 저명한 셀프출판인 휴 울리에게 거짓말쟁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포함된다. 35
병원 진료와 관련된 노화의 가장 고차원적 역설 중에 의사를 자주 봐야 하는 사람일수록 병원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37
나는 어떤 책 한권을 'TGAN(위대한 미국 소설)'으로 선정하거나 위대한 미국 문학 목록을 만들어 문학적으로 훌륭하다고 선언하는 방식을 꽤 오래 전부터 반대했다. 소위 작품의 우수성 범주에서 모든 글쓰기 장르가 누락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시상이든 추천 도서 목록 선정이든 그 기준이 의례적이고도 무조건적으로 미 대륙을 절반으로 나누어 동부에 사는 남성들이 쓴 작품만 선호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속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다 큰 이유를 말하자면 '무엇이 영속적으로 훌륭하다'는 판단은 무언가의 훌륭함이 실제 지속되기 전까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신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02-103
어두운 골목길에서 누군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나타나 "죽기 싫으면 위대한 미국 문학의 이름을 대!"라고 말한다면 나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꽥 하고 소리칠 것이다.
"분노의 포도!" 104
나에게 '위대한 미국 문학'이라는 문구의 주춧돌은 미국이 아니라 위대한이다.
뛰어난 성취 혹은 독자적인 성취라는 견지에서 말할 때 위대함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특정 젠더를 내포한다. 일반적인 용법과 통상의 이해에 따르면 '위대한 미국인'은 위대한 미국 남성을 뜻하고,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남성 작가'를 의미한다. 그 단어의 젠더를 바꾸려면 '위대한 미국 여성', '위대한 여성 작가'라는 여성 명사로 수정해야 한다. 젠더를 없애려면 '위대한 미국인들/작가들, 남녀 모두.....'같은 표현을 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위대함이라는 관념 속에는 위대함이 여전히 남성의 영역이라는 사고가 남아 있다. 113
나는 스토리의 가치를 높이 산다. 스토리에서 서사의 필수적 궤적을 본다. 일관성, 이야기의 진전, 여기에서 저기까지 어떻게 독자를 이끄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볼 때, 플롯이랑 이야기의 움직임이 보여줄 수 있는 변화나 복잡성이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플롯은 진행에 정교함을 부여한다. 120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혹은 문학적 현상의 지지자와 옹호자들이 판타지 문학을 여타 문학에 비해 훨씬 많이 폄하하거나 악마화하고 묵살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은 이미 압제에 저항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판타지 문학이 수 세기에 걸쳐 증명해 온 바 있다. 132-133
우리가 마침내 시작한 '인류의 지배와 무한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인류의 적응과 장기적 생존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하는 사고의 전환이 바로 양에서 음으로의 전환이다. 139
페미니즘은 이어지고 있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여성들끼리 혹은 남성과 함께 일하는 곳 어디에나 자리 잡아야 한다.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모두 남성적 가치의 정의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특정 성에 배타적이기를 거부하며, 상호 의존성을 지지하며, 공격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와해시켜야 한다. 또한 항상 자유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162
녀석은 가만히 앉아 어둠과 고요를 황금빛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릴케가 말했던 '동물의 순결한 시선'이었다. 상대를 관통하는, 순전히 바라보는 응시. 나의 존재는 그런 순간을 맞기에 미흡하고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근사한 동물의 존재, 그 아름다움, 그 완벽한 자기 충족감은 내게 신선함이자 위안이자 평화였다. 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