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성만큼 훌륭한 정물화 <흡연실>과 같은 뛰어난 작품은 물감의 표면이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충만하고 훌륭합니다. 단순한 일상 사물에 대한 그의 표현에는 순전히 '마술 같은' 촉각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일정 수준의 환영주의도 존재합니다. '마술'이라는 단어는 샤르댕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디드로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115

 장-시메옹 샤르댕, 흡연실

 

 

 

유감스럽게도 가장 뛰어난 미술 작품 중 다수가 세계의 가장 유명하고 번잡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따라서 적절한 관람의 측면에서 볼 때 최악의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미술관에 내재하는 많은 역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미술 작품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이루어지는 마법과 같은 개인적이고 고요한 대화는 그 작품을 보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열망과 영원한 갈등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119

 

바로 여기에 필립과 내가 이전에 경험한 미술관 현상이 존재했다. 즉 작품이 유명해질수록 보기는 더 어려워진다. 필립이 뒤이어 지적했듯이 그림이나 조각의 어떤 측면은 원작 앞에서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 따라서 이 그림의 특성은 복제될 수 없다. 어떤 프린트 기계나 사진, 컴퓨터, LED스크린으로도 그것을 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복제가 색채의 유사성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감은 반투명성, 두께, 반사도 등의 물리적, 화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어떤 복제도 다다갈 수 없는 부분이다.

... 따라서 이상적인 조건하에서 원작은 비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조건이 보는 사람에게나 작품에게나 모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해 작품이 접근 가능하면서 쉽게 볼 수 있어야 한다. ... 이 모든 이유로 복제가 우리에게 값비싸고 모방이 어려운 원본보다 훨씬 더 깊은 경험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31-132

 

사진이나 다른 이미지가 원작보다 더 낫거나 나쁜, 또는 원작과는 다른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하는지 여부는 흥미로운 문제이다.

발터 베냐민은 1936년에 쓴 유명한 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사진을 비롯한 그 밖의 다른 방식의 예술 작품 복제가 우리가 작품을 보는 조건을 바꾸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원본은 베냐민이 '아우라'라고 부른 것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관점에서 아우라는 그 작품의 역사와 '제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였다. 아 '아우라'의 영향력은 예술 작품이 웹사이트나 블로그, 책, 잡지를 통해 수천 가지로 구현되는 현대 세계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133

 

 

우리는 벨라스케스가 그린 몇 점의 경이로운 그림들 중 하나를 보았다. 필립이 말했듯 이 작품을 보면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그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작품은 바로 <브레다의 항복>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브레다의 항복

 

 

<브레다의 항복>을 원작으로 볼 때 이해하게 되는 것은 크기입니다. 이것은 어떤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실물 크기보다 조금 더 큽니다. 이 작품은 서술적인 미술의 위대한 기념비 중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매우 훌륭하게 표현된 한 귀족에 대한 다른 귀족의, 즉 패자에 대한 승자의 자비로운 몸짓에 완전히 압도당합니다. 이 모두는 뒤편의 옅은 파란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비추는 빛을 배경으로 도드라집니다. 그다음으로 그림 속을 돌아다니며 뒷모습으로 포착한 거대한 말을 포함해 그림의 상당 부분에서 드러나는 대담함을 보기 시작합니다. 많은 인물들이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아마도 자화상인 듯한 오른쪽 끝의 인물과 왼쪽 끝의 인물은 그들의 시선을 통해 보는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이 모든 장치들은 우리를 적극적인 참여자로, 적어도 수동적인 구경꾼 이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세심하게 배열된 창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그림이 초기 논평자들과 떨어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창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습니다. 143-144

 

 

디에고 벨라스케스, 어릿광대 세바스티안 데 모라

 

이 인물이 지닌 인강성, 위엄을 보세요! 결함도 있습니다. 잘못된 위치에 물감을 채색한 가장 밝은 부분을 보세요.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벨라스케스는 신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안 데 모라는 우리를 향해, 그리고 우리 너머로 시선을 고정시키며 저기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350년 전처럼 살아 있는 상태로 우리의 공간 안에 존재합니다. 그렇다 해도 결국 이것은 그림입니다. 캔버스 위에 채색된 유화물감이지만 포토리얼리즘의 그림은 분명 아닙니다. 그래서 작품 속 그의 얼굴과 생각, 영혼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물감의 표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물감의 표면을 말입니다! 그것이 이 멋진 그림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148-151

 

 

그리고 저기에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가 양감을 지닌 채 공간 속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바닥은 어디에 있고 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벨라스케스,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벨라스케스는 어떠한 구분도 없이 용케 공간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은 마네에게 영향을 미쳤다. 마네는 1865년 9월 1일, 바로 이 그림 앞에 서 있었다.  ...

"배경은 사라지고 그 사람을 둘러싼 공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온통 검은색이지만 살아 있는 듯합니다."

 

마네, 피리 부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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