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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A.J.크로닌의 천국의열쇠 처럼 묵직한 여운을 남기네요.
완독 후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바로 기록을 남기지도 못했는데...
얼마 전부터 휴일에는 종종 성지순례를 다닙니다. 대부분 순교 성인의 성지인데 그 속에서 기도드리고 잠시 묵상하고 오는 길에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침묵‘에서 끝까지 신앙을 져 버리지 않고 순교하는 사람들 그리고 배교하고 삶을 선택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배교한 사람의 절규가 뼈아프게 들리는 까닭에 자문하게 됩니다. 아직도 여전히 제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어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그들을 비난할 자신이 있는가...
하느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하지만 제가 이 사실을 쓰는 것은 그들이 출발하던 날 아침, 기치지로가 머리를 약간 떨군 채 중얼거리던 그 말이 가슴속에 차츰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그러고 나서 그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제게 보내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 P85
인간을 모두 성자나 영웅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것입니다. 이런 박해받는 시대에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신도가 배교한다거나 목숨을 던진다거나 할 필요도 없이 은혜받은그대로 신앙을 계속 지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평범한 신도였기 때문에 육체의 공포를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 P122
"저는 배교자죠.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10년 전에 태어났다면 선량한 가톨릭 신도로서 천국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배교자로서 신도들에게 멸시받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그러나 박해받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원망스럽습니다. 저는 원망스럽습니다." - P180
"그건 어디까지나 보잘것 없는 형식일 뿐이오. 형식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아니겠소." 통역은 흥분해서 서두르고 있었다. "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거요." 신부는 발을 들었다. 발이 저린 듯한 무거운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은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 P267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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