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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진실
존 르 카레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1월
평점 :

스파이 소설, 첩보 소설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가 "존 르 카레(John le Carré)"가 2013년에 발표한 작품 "민감한 진실(A Delicate Truth)"입니다. 이 작품 "민감한 진실"은 작가 "존 르 카레"가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작품인데, 그동안 출간된 작가의 작품들 중 진입 장벽이 가장 낮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쉽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쉽게 읽힌다고 해서 작품성이 떨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국방부 차관 "퍼거스 퀸"의 명령으로 정보요원 "폴 앤더슨"이 영국 식민지 지브롤터로 갑니다. "폴 앤더슨"의 임무는 CIA의 비밀 조직인 미국의 다국적 기업 '윤리적 결과'와 함께 영국 특수부대원 4명이 합동으로 테러리스트들의 무기 거래 현장을 덮치는 '야생동물작전'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퍼거스 퀸"의 눈과 귀가 되는 것입니다. 정확한 증거나 징후가 보이지 않음에도 작전개시 명령이 떨어지고 한순간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이야기만 들은 채 "폴 앤더슨"은 지브롤터를 떠나게 됩니다. 한편, "퍼거스 퀸"의 개인비서인 "토비 벨"은 자신이 모시는 의원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미래가 송두리채 사라질지도 모를 행위인 불법 도청을 시도합니다.
추적의 흥분? 혹은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 혹은 꿈도 꾸지 못했던 방식으로 국가에 봉사하게 됐다는 기대감 자체 때문에? 이유가 무엇이든, 수세기에 걸친 영국 제국주의의 결과물을 바라고보 있노라니 애국적인 열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위대한 제독과 장군들의 동상, 화포, 보루, 요새, 수비병들에게 가장 가까운 방공호로 대피하라는 경보 표지판, 총독 관저 밖에서 총검을 겨누고 경비를 서는 구르카풍 전사들, 헐렁한 영국 제복차림의 경찰들, 그는 이 모든 것의 후계자였다.
영국령 지브롤터에서 벌어진 '야생동물작전'에 "폴 앤더슨"라는 가명으로 참가했던 노련한 외교관 "키트 프로빈"은 은퇴 전 마지막을 평화로운 카리브 해로 발령을 받아 기사 작위까지 받은 후, 콘월에서 아픈 아내를 돌보며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3년전 지브롤터에서 같이 작전을 수행했던 영국 특수부대원 "젭"의 방문을 받습니다. "젭"이 들려준 이야기는 3년 전에 지브롤터에서 진행된 '야생동물작전'은 잘못된 정보로 어떠한 수확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민간인 피해자_모자 사이인 한 여인과 남자아이_만 발생했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믿기지 않는 충격을 받은 "키트"는 "젭"과 함께 회고록을 쓸 준비를 하고, 당시 작전을 주도했던 "퍼거스 퀸"의 개인비서였던 "토비 벨"에게 연락을 합니다. 젊고 야심찬 이상주의자인 "토비"는 당시 불법 도청한 사실들을 스승처럼 생각하며 믿고 의지하던 "자일스 오클리"에게 전했지만 갑자기 베이루트로 발령을 받아, 이제 막 영국으로 돌아온 상태였습니다. 다국적 용병기업인 '윤리적 결과'와 영국이 비공식적으로 벌인 '야생동물작전'에 대해서 들은 "토비"는 자신의 지위와 양심 사이에서 고민한 끝에 "키트"와 "젭"을 도와주기로 하지만 얼마 뒤, "젭"이 자신의 차에서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마음대로 해, 토비. 사임하게나. 난 자네의 미숙한 개인 의견에 동의한다네. 영국과 같은 그 어느 주권국가도 서로 간에 티끌만 한 앙금도 없는 자기중심적 광신도 둘이 거짓 핑계로 일으킨 전쟁에 참전해서는 안돼. 분명 우리는 다른 주권국가에게 영국과 같은 수치스러운 선례를 따르라고 설득해서도 안 되지. 그러니 사임하라고. 자네는 정확히 '가디언'지가 찾는 인물이야. 황야에서 울부짖는 고독한 음성. 정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며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 그냥 뛰어내려. 자네가 언제나 꿈꾸던 위대한 소설을 쓰게나."
이 작품 "민감한 진실"은 민간인 피해자들만을 남긴 실패한 작전을 은폐하려는 다국적 기업과 정부에 대항하는 선한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첩보 소설입니다. 냉전이 끝나고 이제는 전쟁조차 조직화된 기업에 의해 진행되는 이 시대를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참여한 작전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을 은폐하기 위해서 급히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어 은퇴시켰다는 사실을 알게된 "키트"와 참상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끝까지 항의하며 진실을 공개하려다 군대에서 쫓겨난 "젭", 그리고 자신이 불법 도청한 이야기가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에 관한 이야기였고, 역시나 은폐를 위해 갑자기 자신이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토비". 이들은 모두 영국 정부와 군이라는 조직의 일원이었지만 내부고발자들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 힘없는 개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이 속했던 정부는 바로 거대한 적이 되어 버리고 이 선한 세 사람은 위험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영국정부는 식민지에서 벌어진 이민자 모자들의 죽음은 하찮은 일일뿐이니 귀찮게 하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기업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다국적 기업은 협박과 회유로 이들을 위협합니다.
"내가 아느냐 자네가 아느냐 하는 건 이것도 저것도 아니야.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느냐, 알아야 하느냐 하는 거지. 그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친구 - 자네처럼 훈련받은 외교관이 아니라 눈먼 바보라도 알 수 있어 - 분명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절대로. 시간이 그 사건들을 치유하지는 않아. 오히려 곪게 만들지. 영국 정부가 부정하는 가운데 한 해 한 해 흐를수록, 대중의 윤리적 분노는 수백 데시벨씩 올라간다네."
"존 르 카레"의 다른 작품들처럼 "민감한 진실" 역시도 작가의 통찰력있는 시선과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힌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을 담고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점점 더 잠식되어 가는 국가, 작은 희생과 큰 대의 사이에서의 충돌, 개인과 국가간의 대립, 윤리와 양심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얽히며 발생되는 갈등까지... 이 81세의 거장은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치밀한 플롯 위에 녹여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선한 개인들은 양심이 있다면 당연히 해야만 하지만, 만에 하나 우리 중 누군가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쉽게 선택하지 못할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들로 인한 싸움은 권선징악이라는 통쾌한 결말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마지막 선택 이후의 더 고된 길로 안내하는 표지판을 보고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진짜 고독하고 힘든 싸움은 이제부터다! 라는...
신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대로 헛되이 싸웠다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거창한 언명이 떠올랐다. 그러나 토비가 볼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이든 인간이든, 어리석음은 변명이 될 수 없다. 신과 이성적인 모든 인간이 헛되이 싸운 상대는 어리석음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닌 타인의 이익에 대한 순전한, 방탕한, 빌어먹을 무관심이다.
"민감한 진실"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존 르 카레"의 작품들 중 가장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사실 이 형님 작품들이 진입 장벽이 높고 진도가 쉽게 나아가지 않기로 유명한데, 이 정도면 "존 르 카레"의 작품들을 처음 도전하시려는 분들에게 좋은 입문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기존 첩보소설이나 스파이소설 보다는 복잡하고 어렵긴 합니다. 이 작품은 곧 BBC에서 "윌리엄 모나한"이 각색해서 드라마로 만들거라고 합니다.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국내에도 이번 달에 "존 르 카레"의 또 다른 작품이자 "이완 맥그리거" 주연으로 영화 촬영이 진행 중인 작품 "Our Kind of Traitor"가 출간된다고 하니 팬분들은 올 연말을 기분 좋게 보내게 될 듯 합니다.
<"존 르 카레"가 직접 출연한 "민감한 진실"의 멋진 북 트레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