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변호사 출신의 작가 "앨런 에스킨스(Allan Eskens)"가 2014년에 발표한 데뷔작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The Life We Bury)" 입니다. 여러 미스터리 소설 관련 잡지에서 2014년 최고의 데뷔작으로 뽑힌 이 작품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에드거' 상, '앤서니' 상, '배리' 상 등 여러 주요 미스터리 상이 그해 뽑는 최우수 데뷔작 부분의 후보에도 올랐습니다. 일단 이 정도면 사서 읽어도 실망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작품이라서 이 작품을 제치고 상을 탄 작품들이 어떤 작품들인지 너무나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미네소타 대학의 대학생인 스무 살 청년 "조 탤버트"는 시간이 촉박한 대학영어 수업 과제인 전기문 쓰기를 위해 많은 노인들이 요양하는 요양소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그곳의 환자들 대부분은 치매나 기억력 저하로 인터뷰할 상태가 아닙니다. 그 와중에 다행으로,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나마 제정신이라 인터뷰가 가능한 "칼 아이버슨"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안도하던 "조 탤버트"는 "칼 아이버슨"의 과거를 알고는 당황하게 됩니다.


강간범에 살인범이라니. 영웅을 찾으려고 힐뷰 매너에 왔더니 대신 악당을 만나게 생겼다. 그 사람에게도 물론 이야깃거리야 있겠지만, 과연 그게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일까? 다른 애들은 할머니가 흙바닥에서 아기를 낳은 이야기, 아니면 할아버지가 호텔 로비에서 존 딜린저를 만난 이야기 같은 것이나 제출할 텐데, 나는 한 여자아이를 강간, 살해하고 창고에서 그 시체를 불태워버린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됐다. 살인범을 인터뷰한다는 아이디어가 처음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몸이 달았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시작조차 하지 않은 채 너무 오랫동안 미뤄왔다. 9월은 거의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몇 주 안에 인터뷰 내용을 제출해야만 했다. 다른 학생들은 이미 출발 게이트를 열어 경주마를 내보냈는데 내 말은 아직 헛간에서 지푸라기나 와작와작 씹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는 칼 아이버슨에 대해 글을 쓰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동의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알코올 중독에 조울증 환자인 어머니와 자폐증 환자인 동생이 살고 있는 집을 떠나 대학교로 도망친 "조 탤버트"는 자신의 삶에 이미 지칠대로 지친 스무 살 청년입니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과제인 전기문 쓰기를 위해 급한 마음으로 노인 요양소인 '힐뷰 매너'를 찾은 "조"는 인터뷰가 가능한 대상이 말기 암환자인 "칼 아이버슨"이라는 노인뿐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칼"이 30년 전, 이웃집 소녀를 강간한 후 살해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창고에 시신을 버리고 창고를 불태운 악독한 범죄자이며, 지금껏 쭉 감옥에서 수감되어 있다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요양소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합니다. 운이 좋으면 전쟁 영웅을 인터뷰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무너졌지만 과제 제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급한 "조"는 "칼"에게 인터뷰 의사를 타진합니다. 의외로 "칼"은 순순히 인터뷰에 응하며 "조"에게 완전한 진실만을 말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이 자신의 임종 시의 진술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조"는 "칼"과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인터뷰가 진행될 수 록 노인을 잔인한 범죄자로 확신하게 만들던 사실들에 금이 가고, 그 틈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진실들에 흥미를 느끼는 "조"는 30년 전 묻혔던 진실들을 캐내기 시작합니다.


"임종 시의 진술이란 건 법률용얼세.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를 죽인 살인자가 누구였는지 속삭이고 죽으면 그 진술은 강력한 증거 능력을 인정받아. 죽어가는 사람이 거짓말을 입에 올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 일종의 합의인 셈이지. 결코 바로잡을 수 없는 죄, 절대로 고백할 수 없는 죄만큼 무거운 죄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 자네와 나누는 이 대화는... 내 임종 시의 진술이야. 자네가 쓴 글을 누가 읽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네. 아니, 자네가 아예 글을 쓰지 않더라도 괜찮아."


형사법 변호사로 활동하다 작가로 데뷔한 "앨런 에스킨스"의 첫 작품인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스무 살의 대학생이 죽음을 앞둔 늙은 범죄자를 만나 그가 묻어버리지 못한 진실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소설입니다. 죄책감과 빈곤에 지쳐가는 청년은 시한부 인생의 범죄자 노인과 어쩔 수 없이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만남과 대화를 이어가면서 묘한 교감을 나누게 되고, 과거의 어느 순간부터 꼬여졌던 사실들이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닥 새로울게 없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어디선가 보거나, 읽은 듯한 익숙한 전개 방식으로 시작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단점으로 보이지 않도록 작가 "앨런 에스킨스"는 익숙한 구성들과 설정들의 장점들만을 뽑아서 새롭게 조합해 상당한 재미를 주는 범죄소설을 써냈습니다.

사실 재미를 위해 범죄소설들만을 탐독하는 저에게 있어서 '재미'란 좋은 범죄소설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가장 1차적인 요소입니다. 근데 이 작품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재미 이외에도 빛나는 요소들이 꽤 있습니다. 재치있는 문장들, 영리한 플롯, 서스펜스의 구축하는 방식 등 모두 데뷔작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고 작가 스스로가 책을 쓰면서 중심을 잘 잡아서인지 신인 작가들이 흔히 부리는 과욕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중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치밀하게 구축된 캐릭터들 간의 상호작용입니다. 주요 캐릭터들과 그들의 주변 이야기들은 단 한군데도 낭비되지 않고 조화롭게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작가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받쳐주는 중요한 축이 됩니다. 이런 캐릭터들 간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은 자칫하면 무모해보일 수 있는 그들의 행동에도 충분한 설득력을 불어 넣기도 합니다. 읽는 내내 작가가 이 부분을 가장 공들여 쓴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죄책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어떤 얼빠진 힘이,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중력이 나를 뒤쪽으로, 남쪽으로, 오스틴으로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학으로 도망을 가기만 하면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나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가 붙들고 있는 가지는 아주 쉽게 부러질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손을 떼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동생? 그 두 사람을 떠나는 대가는 뭘까?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오늘은, 그 대가가 보석금으로 삼천 달러를 날리는 것이었다고.


보통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숨기고 있던 비밀이나, 무의식의 저편에 묻고 있던 진실들이 끊겨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거나 비어있는 퍼즐의 숨겨진 조각을 찾아내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당연히 이 작품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에서도 비밀이나 묻혀있던 진실들이 그런 요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죄책감이라는 인간의 감정과 연결시켜 사람들이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죄의식과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려고 노력합니다. 끊임없이 술과 도박, 남자문제를 일으키는 어머니와 자폐증 환자인 동생을 어린 시절 부터 돌보다 성인이 되자마자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청년 "조"와 과거의 어느 순간부터 인생을 포기해버린 60대 노인 "칼"은 서로 자신들이 짊어진 죄의식들을 털어놓고 나서야 손자와 할아버지와 유사한 유대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살고 싶어하는 노인을 보며 "조"는 두 번 다시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실 찾기에 몰두하고, 노인의 죽음을 보고난 후에는 자신이 책임져야할 부분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첫 발을 내딛습니다.


"할아버지를 빼고도 이 건물에 살인자가 열 명이나 더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람을 죽여본 사람이? 아니면 살인자가?"

"그게 다른가요?"

아이버슨 씨는 내 질문에 대해 생각하는 듯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대답할지보다는 내게 대답을 해줄지 말지를 고민하는 듯했다. 자잘한 턱 근육을 몇 차례인가 움직거리는 듯싶더니 그가 대답했다. "그래. 차이가 있지. 나는 둘 다 해봤네.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고... 살인도 해봤지."

"차이가 뭐죠?"

"해가 뜨기를 바라는 사람과 뜨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의 차이라네."


짧게 요약할 수도 있는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써놓았지만 결론은 상당히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쓰고 싶었습니다.^^;; 작가 "앨런 에스킨스"의 두 번째 작품인 "The Guise of Another"가 미국에서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국내에도 조만간 소개될 예정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하는 "맥스 루퍼트" 형사의 동생이 주인공이라고 하니 읽으면서 소소한 이 작품의 흔적들을 찾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은 완벽하다거나 걸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데뷔작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완성도 높은 오락소설입니다. 미스터리/스릴러 소설들이 갖추어야할 기본들에 충실하며 진정으로 말 하고자하는 주제를 향해 달려 나가는 솜씨가 꽤 수준급입니다. 거기다 지루한 주말 저녁에 펼치시면 바로 그날 다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재미도 보장합니다. 새로운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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