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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웰즈의 죄 ㅣ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5
토머스 H. 쿡, 한정아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토머스 H. 쿡(Thomas H. Cook)"의 2012년도 작품 "줄리언 웰즈의
죄(The Crime Of Julian Wells)"입니다. 이 작품은 "제3의 사나이"나
"디미트리오스의 관" 등 고전 스파이 소설들을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중년의
작가 "줄리언 웰즈"는 집필을 위한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호수로 나가 배위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을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리언"과 친구였던 "필립 앤더스"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 했다는 후회와 그동안 친구가 힘들어 했던 징후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겨워 하던 "필립"은 "줄리언"이 죽기 직전까지 '아르헨티나' 지도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언젠가 줄리언은 해결되지 않은 범죄보다 더 잊히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는 이야기는 없다고 썼지만, 의문이 풀리며 드러난
진실도 잊히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발견한 진실도 그러했다.
인간들이
자행해온 잔인한 범죄와 학살, 고문 등에 집착하며 그런 이야기들에 관해 책을 썼던 작가 "줄리언"은 러시아의
유명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6년간 러시아를 돌아다니다 집으로 옵니다. 며칠 후 그는 배를 타고 집 앞 호수로 나가 손목을 긋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하며 많은 것을 공유했던 "필립"은 친구
"줄리언"의 자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줄리언"이 오랫동안 너무
잔인하고 어두운 이야기에 집착하다 진이 빠져버려 자살했다고 말하지만 "필립"은 쉽게 납득하지 못합니다. 밝고
자신만만하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젊은 시절의 친구를 알기에 자꾸 친구가 자살한 이유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줄리언"이 죽기 직전까지 '아르헨티나' 지도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필립"은
오래전 자신과 "줄리언"이 '아르헨티나'에서 겪은 사건을 떠올립니다. 한 여인의 실종. 그리고 실종사건을 계기로
바뀌어 버린 "줄리언". 당시 군사정권 말기의 '아르헨티나'는 '길을 잃은 국가' 였고 수많은 납치와 고문,
살인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둘의 관광 가이드였던 여인 "마리솔"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줄리언"은 그녀의 행방에 오랫동안 집착을 했었습니다. 국무성에 지원서를 내놓고 언젠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며 활기찼던 "줄리언"은 그 사건 이후로 완전히 변해버렸고, 잔인한 이야기에 집착하며 세상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필립"은 "줄리언"의 유품을 정리하러 프랑스로 가면서
"줄리언"이 썼던 작품들과 함께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갑니다.
"단지 줄리언 오빠가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근데
무슨 죄로?"
"그게
문제다, 그렇지?"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줄리언 웰즈의 죄." 그녀가 덧붙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학
비평가인 "필립"이 친구였던 작가 "줄리언"을 자살로 몰게 한 원인을 찾아가는 이
작품 "줄리언 웰즈의 죄"는 한마디로 어떠한 소설이다 라고 말하기 힘든 독특한 작품입니다. 친구의 자살의 원인을
찾기 위해 친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평범해 보이는 구성 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속임수, 고문, 살인, 학살 등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자행해온 범죄들입니다. 목차의 제목 자체도 소설 속 인물 "줄리언"이 쓴 작품들의 제목으로 되어있어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반인류적인 범죄들이 벌어졌던 곳으로 가서 그 참상을 같이 마주하게 됩니다. 피의
백작부인이라 불렸던 "엘리자베스 바토리"의 성이 있던 '짜흐띠쩨', 한 시간 동안 프랑스 인 642명이 학살당한
'오라두르', 소설 "차일드 44"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연쇄 살인을 저지른 '러시아' 등을 거쳐 "필립"과 "줄리언"의 젊은 시절 첫 해외
여행지였던 '아르헨티나'로 돌아옵니다. "필립"은 그동안 떠올리던 기억 속의 이야기들이 전혀 다른 걸 의미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줄리언"이 저지른 죄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그리고 마주하기 힘든 진실 또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에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사람들은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먼지 같은 사람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란다."
작가
"토머스 H. 쿡"은 평범한 우리 삶에 우연히 끼어드는 사건이 불러오는 비극과 그로 인한 파멸을 다루는데 있어서 정말 독보적인
작가입니다. 반대로 그 비극을 다루는 문장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가끔 이런 글 솜씨로 연애편지를 쓴다면 웬만한 여자는 다 반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문장으로 비극을 다루기에 그 비극이 더욱 우울하며 애처로운 느낌을 준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
작가는 참 신기한 작가입니다. 작품을 읽을 때마다 사람을 저 밑바닥 어두운 곳까지 끌고 내려갑니다. 그게 잔인하고 역겨운 묘사나 전개 때문이
아니라 비극을 구성하는 문장 하나 하나에서 느껴지는 애잔함과 작품을 관통하는 애수에 젖은 우울함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복선들이 정말
정교합니다. 결말까지 읽고 나서 그전에 그냥 넘겼던 대사나 묘사들을 상기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정말로 기억이 어느 순간 지뢰가 곳곳에 뿌려진
해변이 되고,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그 모래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디서 들은 말인데,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 채찍을 휘두르기 전이 아니라 휘두르고 나서래." 마을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줄리언이 말했다. 그러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정작 중요한 건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아니겠어?
죄책감은 사치야, 필립."
고전
스파이 소설들에 경의를 보이며 오마주를 바치는 "줄리언 웰즈의 죄"는 여전히 "토머스 H.
쿡"의 다른 소설들처럼 복잡해 보이지만 실제론 단순한 인간의 본성, 그런 인간들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어처구니없는 우연
그리고 그 우연의 원인을 제공한 생각지 못한 행동, 그 모든 게 엮여서 발생되는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바로 갑자기 찾아오는
변화을 두려워하는 우리네 인생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게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 삶의 수레바퀴가 매일 변함없이 반복되길 바라고
삶이 힘든 사람들도 행운을 바라기 보다는 지금 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더 바라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언제나
품위 있고 우아한 범죄소설들을 써내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H. 쿡"은 호불호가 좀
갈립니다.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는 분들에게 더욱 그렇더군요. 하지만 그동안 "토머스 H.
쿡"의 소설들을 읽고 만족하셨다면 이번에도 분명히 만족하실 겁니다. 이 작가는 정말로 특별한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