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크게 세 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성별화된 사회와 젠더 체계>에서는 젠더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이론적 논의를 살펴보며 우리의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고 젠더 체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얻는데 목적을 두었다. 다소 복잡하고 논리적인 서술을 주로한 부분으로 젠더 체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우리가 직면한 성별 불평등의 현실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가장 앞부분에 두었다. 2부는 <젠더와 일상>이란 제목 아래 연애와 몸 가꾸기, 가족, 노동, 미디어, 남성문화 등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건들 중심으로 쉽고 흥미롭게 읽힐 수 있는 글들을 엮었다. 1부에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면서 익힌 개념과 이론들을 2부의 일상 경험에 적용해 보면서 읽어가도 좋을 것이다. 3부 <젠더를 넘어서 성평등으로>는 성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실천으로서 정책과 운동을 다루고 있다. 여성 정책과 여성운동을 토대로 하면서도 성평등 수준을 높이기 위한 성평등 정책과 성평등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전망을 논의 다.
-들어가는 글 중 발췌-
무려 2년에 걸쳐 읽은 책. 2016년도에 다 읽었다면 내게는 2016년 최고의 책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좋은 책은 리뷰를 남기는 것도 정말 어렵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탓이지.
매우 드물게 두번 읽고 싶은 책. 오늘은 밑줄긋기로 정리만 한다.
페미니즘은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인 시민혁명의 근간이 된 천부인권론에서 미처 담지 못한 공백을 채우는 사상이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해방 없이는 민주주의의 완성이나 인간 해방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보편적 인권개념에는 은폐된 성차별 영역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현대로 올수록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엄격한 성 역할 구별로 억압을 느끼는 '남성'이나 스스로 느끼는 성 정체성이 사회가 허용하는 범주와 맞지 않아 갈들을 겪는 이들까지 포함하는 쪽으로 확장되고 있다.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유래했지만, 현재 세계 곳곳에 여성의 권리 또는 성평등을 위해 활동하는 개인과 조직이 있다. 또한 계몽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근대 사상상의 흐름 속에서 분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단수 femimism보다는 복수 feminisms로 써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성차별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는지, 성평등 사회를 실현하는 해법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급집주의, 실존주의. 생태주의 등의 수식어를 페미니즘 앞에 붙이기도 한다. p22-23
드 구즈나 울스턴크래프드, 스탠튼처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를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매우 평범하나 중요한 진리를 구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다보니, 여성들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여성 사이의 차이도 남녀차이 못지않게 크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지적된다. 현실에서는 같은 여성이라도 계츠이나 인종에 따라 전혀 다른 대우를 받기 때문에 삶을 개선하기 위해 우선 해결할 과제가 무엇인가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흑인노예 출신으로 노예제 폐지운동에 앞장섰던 소저너 트루스는 어느 날 연설에서 여성이라고 다 같겠냐고 질문을 던졌다. p26-27
제1차 여성운동과 비교하면 제2의 물결은 제도 개선과 더불어 개인의 삶과 일상의 변화에 방점을 찍었다. 운동의 지행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에 응출되어 있는데, 이 문장은 그때그때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였다. 우선 첫째,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간주되는 연애, 임신, 육아 등도 사실은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개인의 빈곤이 사회구조적 문제인 것고 ㅏ마찬가지다. 두 번째로 일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소소하게 취급되는 문제도 사실은 노동운동이나 시민권만큼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가사 분담을 의논하는 것은 학생 조직의 민주성을 논하는 것만큼니아 중요하다. 혹은 가정폭력 문제를 이슈로 부각하는 것도 공권력의 탄압을 규탄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세 번째, 실천의 측면에서 본다면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며'정치적으로 올바른'선택이 무엇인지를 매순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여성해방운동 시기에 등장했던 수많은 의식 고양 모임은 남성은 공적 영역, 여성은 사적 영역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가부장제가 주입한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하고, 일상의 정치성을 드러내고 개인과 사회를 함께 변화시키는 방안을 탐색했다. p37-38
여성억압의 기원이 자본주의인가 생물학적인 성차인가, 당면한 적이 체제인가 남성인가, 여성은 남성 지배적인 좌파와 계속 협력해서 일해야 하는가 아니면 남성과 관계를 끊고 여성들과 연대를 구축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미국 여성해방운동 진영을 정치파와 급진파로 분열시켰다. 여성운동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급진파와 달리, 정치파는 여성 문제를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더 큰 투쟁에 포함되는 부문운동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독일의 여성들도 비슷한 분열을 경험했다. "경제부국을 자랑하는 서독 사회에서 여성들이 감수해야 했던 모순은 진보성을 천명한 학생 청년운동 내부에서도 일어났다…밤을 지새우며 서독 사회의 모순과 그 척결 방안을 토론하는 남성 동지들을 위해 그들은 커피를 끓이고 내일 뿌릴 전단을 타자로 쳤다(…)진보적인 남성들에게 성관계, 임신, 그리고 육아는 서로 상관없는 각각의 문제였으며 해방된 여성이라면 혼자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p46
중요한 것은 젠더가 단순히 여성성과 남성성의 동등한 '차이'를 구조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차이를 서로 반대되거나 결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 등으로 구분하고, 가치 판단이 개입되면서 그 과정에서 둘 간의 '위계'가 만들어 진다. 즉'차이'가 차별이 된다. 1948년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의 저서《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로, 젠더 개념을 제시한바 있다. 보부아르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단순한 성적 차이가 아니라 남성중심적 가치와 규범을 반영하면서 성립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강한 성 또는 제1의 성으로 스스로를 정의해온 남성에게 여성은 남서의 '타자', 즉 제2의 성으로 간주되면서 남성에 의해 정의되고, 정체성과 역할이 규정되는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이성애 남성이 남성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은 자동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의.타자'. 즉 여성이나 기타 성소수자와의 '차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남성성의 의미를 획득해 간가. 즉, 타자에 대한 우월성을 내재화하면서 정체성을 획득한다. p65-66
능력을 통한 주류 사회의 진출이 용이해진 상황에서 여성들의 경쟁력과 경쟁심 또한 강화되고 있다. 때문에 집단적으로 여성들이 경험하는 구조적 차별들에 대해 운동에 대한 반감이 증대된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능력이 있고,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 파멸은 이제 종식되었다고 선언되기도 한다. 자신들이 '해방'되었고, 남성과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여성운동이나 페미니즘이 여성을 집단적으로 '피해자'화 한다는 이유로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경향도 강해진다. 그러나 '젠더'에 기반을 둔 위계화는 심화되고 있다. 여성들은 저임금 일자리로 몰리며, 심화된 빈곤을 경험한다. 국가의 방기로 여성과 어린이는 성적 폭력의 '쉬운 희생자'가 된다. 소위 성공한 여성 또는 이러한 체제를 지속하거나 강화하는데 공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이 필요하다. p93
생물학 지식을 주어진 '진실'이 아닌 비판적 분석 대상으로 삼는 일련의 연구에 힘입어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와'젠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둘을 개념적으로 엄격히 분리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둘사이의 연관성과 더 나아가 그 관계의 변증법적 특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섹스는 생물학적 내용만 갖고 젠더는 생물학을 제외한 사회문화적 내용만을 갖는다는 식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실천이 생리적 차이에 영향을 미치고 이러한 차이가 다시 화회적 관계를 구조화하는 상호 역동적인 과정을 본 것이다. 예를 들어 특정 시기 중국 여성의 발 크기는 전족이라는 사회적 관습을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었다. 또한 육상 경기의 남녀 기록 차이는 여성의 경기참여가 허용된 시기가 언제였는지 제도의 역사를 무시한 채 평균적인 완력 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경기에 여성의 참여가 허용된 것은 불과 1984년의 일이다.p137
물리학에서 발흥한 과학혁명은 자연 세계를 한층 더 근원적이고 원자적인 요인으로 조직화하고 해석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갈릴레오부터 뉴턴에 이르기까지 단지 물리역학의 승리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물질의 운동 즉, 자연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확신은 인간 이성 일반에 대한 낙관론으로 이어져 지성사적으로 계몽주의를 추동했다.
또한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시민혁명과 그것의 기반이 된 자유쥬의 사상은 사회의 권위나 제도 같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기를 추동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집단보다는 개체를 우선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써 전체론적이고 조화론적인 세계관은 종말을 고하고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 새계관이 도래했다. 새로운 세계관은 차이의 근거를 사회적 요인보다는 개인적 자질에서 찾았고,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의 결정 요인으로 사회적 요인보다는 개인적 자질을 강조하게 된다. 지본주의의 경제적 성공과 함께 도래한 산업주의와 부르주아의 정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또 다른 한변으로 식민지 착취라는 현실의 공존은 인간 집단 사이의 불평등한 지배를 정당화할수 있는 집단 간 차이의 근거를 찾아야 하는 필요를 낳았다. p141
사회생물학은 대부분의 경우, 동물의 행동을 보여주고 이것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함의, 즉 진화적 기초를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언제나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동물의 행동 그러니까 자연적 사실의 "발견"으로 제시되는 그 행동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사회적 사실을 기초로 "해석"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발견'이 전제한 사회적 사실은 결국에 자연적 사실로 정당화되는 사회적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p152-153
또한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특정 호르몬과 행동을 연관 짓는 연구가 붐이었다. 예를 들어 보통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량으로 공격성을 측정하려는 시도는 냉전 체제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과학자들은 '테스토스테론이 공격성을 낳는다'라는 '호르몬→행동"의 인과관계를 상정했으나 공격적인 상황 자체가 테스토스테론 분배를 촉진한다는 연구가 나오자 인과성이 아닌 상관성을 주장하는 정도로 후최했다. 그러나 이후의 실험은 동일한 상황에서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함을 보여주었다. 사실 테스토스테론과 공격성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라는 등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남성적 행동 특성이라고 알려진 공격성을 그 물질과 연결시키고 있을 뿐이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의 암컷이 막 새끼를 낳았을 때 사람이 다가가면 이 동물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때 우리는 암컷이'포악해졌다'혹은 '방어적이다'라고 말하지 '공격적이다'라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과연 실험실에서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특정 호르몬을 과다 주입잡은 수컷과 새끼를 낳은 암컷이 보여주는 행동을 하나는 '공격적'이고 다른 하나는 '방어적'이라고 정반대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일까? p157-8
하딩은 '문제 선택'을 눈감아 버리는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약한 객관성"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강한 객관성"을 주장한다. 지식 활동은 특정한 문화 맥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모든 가치체계에 대해 엄격한 성찰을 시도하는 연구야말로 지식의 객관성을 극대화하는 강한 객관성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차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접할 때 주의해서 따져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러한 '문제 선택'이다. 즉 그러한 지식의 생산과 확대 그리고 대중적 수용이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분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평등한 사회에서 생산되고 수용되는 과학적 지식은 분명 다르다. 통념이라는 이름의 편견을 지나치지 않고 인식하고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인 복합적 실재에 대한 통찰 또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p161
'성매매'라는 용어를 '성노동'으로 전환해 성매매 치해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고 이들에 대한 낙인을 줄이며 실질적인 권익을 신장하자는 주장도 있다. 성노동의 합법화는 여성의 노동권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남성의 자연적인 성적 욕구에 기반 한 성매매가 불가피한 것이라는 관점에 동조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에게 '살 권리'를 승인해 줌으로써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전유를 인정한다.(권력관계 재상산에 기여) 성매매를 정부 통제 아래 두자고 함으로써 국가 규제주의의 성격마저 지닌다.
성매매는 섹슈얼리티의 단순한 교환관계거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젠더 불평등의 효과이자 이를 유지·재생산하는 제도다, 또한 섹슈얼리티, 나이 계급, 민족, 인종 등의 문제가 얽힌 포괄적인 권력관계(기반이자 결과)의 문제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군사주의 체제를 겪어 온 한국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상보적으로 지지되는 지점에 국가 간, 남성 집단 간에 교환되는 여성의 몸이 있었고, 국가가 관리하는 성매매 시스템(공창제도와 기지촌 성매매)이 있었따는 역사적 사실은 성매매가 그리 단순한 거래 행위가 아님을 증명한다. p193-194
그러나 남성의 돌봄 참여 제도화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기본적 권리, 탈상품화를 위한 사회권 확보를 위해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남성이 빠진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육아휴직의 확대는 여성을 보호하기보다는 영원한 2등 시민으로 제한하는 차별화 기제가 되기 쉽다. 돌봄 정책이 여성만이 아닌 남녀 모두의 요구가 될 때 진정한 권리로서 확대될 수 있다. (…) 남성의 돌봄 참여 제도화는 남성의 가족화를 통해 여성의 일-가족 병행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평등을 위한 돌봄 정책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p429
성평등에 대한 서로 다른 비전을 배경으로 하는 균등 처우접근과 특별 처우 접근은 '울스턴크래프트의 딜레마' 혹은 '평등과 차이의 딜레마'라고 불리는 여성주의의 오랜 딜레마를 반영하는 것이다. '같음'혹은 '차이의 인정'으로 이해되는 성평등에 대한 비전은, 출발점은 다르다 할지라도 남성의 규범을 삶의 표준으로 인식한다는 동일한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즉'같음'으로서 평등은 출발점 자체가 남성의 경험에 적합하게 정의된 규범을 여성에게도 동등하게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차이의 인정'으로서 평등은'여성의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할지라도'남성과'다른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여전히 '남성과'같아질 수 없는 여성의 욕구는 주변화되기 쉽다.
같음과 차이의 딜레마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성불평등 구조의 변혁을 지향하는 평등 비전이다. 같음에 기초한 '남성의 관점'도, 차이의 인정에 기포한 '여성의 관점'도 아닌 제3의 관점으로서 '젠더 관점'의 통합이 성평등에 대한 새로운 전략으로 인식된다. 젠더 관점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인식하되 이를 불평등한 권력관계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제 평등은 법·제도상의 동등한 개인의 권리와 기회의 보장이나 남성과 다른 특수한 집단으로서 여성만의 '특별한 욕구'충족을 넘어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관계를 가져오는 체계와 구조 자체의 변혁을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위한 정책 접근이 바로 1995년 북경세계여성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도입되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성 주류화다.
p458-459
여성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여성주의의 선험적 정의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성평등에 대한 여성주의 이상이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어떠한 효과를 가져 오는지에 대한 냉정한 성찰과 이에 대한 전략적 대응, 그리고 주류 정치와의 보다 치열한 토론과 논쟁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주의 성쳥등 비전이 다양한 성평등의 의미화 방식 중 하나일뿐이며, 여성주의는 하나의 과정이자 실천이라는 것을 전제로 다양한 정책 주체들과의 지속적인 토론과 논쟁을 벌여야 한다. p484
급진적 페미니즘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파이어스톤은 1970년에 출간한 그의 저서 《성의 변증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은 여성을 위해 충분히 혁명적이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는 여성억압의 기원은 경제적 기원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기반을 가진것이므로 계급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며,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생식기능의 차이가 크다고 보았다. 파이어스톤이 제시하는 여성해방의 해법은 여성 자신이 재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와 기술을 가짐으로써 생물학적인 숙명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성이 성계급이라는 하위 카스트에서 벗어나려면 복제와 인공수정으로 출산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이어스톤의 주장이 당시에는 황당하게 들렸겠지만 오늘날 의학의 발전으로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애기가 됐다. 하지만 오늘날 발달된 생식기술은 여성을 재생산으로부터 해방 시키기보다 태아 감별이나 무리한 인공배란, 대리모 등으로 오히려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문제는 여전히 과학기술이 아닌 권력관계임을 알 수 있다. p45-46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던 말이다. '여자만 출산을 해야하는 생물학적 위치에서는 절대로 성평등은 이루어 지지 못해'.
나는 인간 종이 멸종할때 까지 성평등(인종,계급등 포함)은 불가능 할것 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혐오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성혐오를 하지 않으려고 끈임없이 자신을 검열하는 사람이다. 성평등이 인간 멸망때까지 이루어 지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고민하고 연대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