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티비의 먹방BJ 엠브로의 방송을 유투브에서 종일 본다.

지난 방송부터 최신 업도드 된것 까지 모두 찾아서 종일 틀어 놓는다.

책은 읽지 않는다. 책이라는 것에 쓰여 있는 활자를 읽는 일이 싫다.

무언가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등등이 다 귀찮다.

그래서 먹방을 본다. 그냥 본다. 그러면 정말 아무 생각이 안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정말로 그냥 먹는 먹방. 좋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읽던 책은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이다. 몇개월동안 읽다 덮다를 반복했지만 아직까지도 완독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앞장에서 윤리적 판단을 할 때, 인간은 개인적이고 파당적인 관점을 넘어서서,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는 우리가 이익을 측정할 때 이익을 단순히 이익일반으로 고려해야지 나의 이익이나, 호주인들의 이익이나, 유럽계 사람들의 이익으로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평등의 기본적인 원칙, 즉 이익들에 대한 평등한 고려라는 원칙(the principle of equal consideration of interests)[이를 이제부터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이라고 부르겠다]을 제시한다.

(....)

우리는 이러한 점을 어떤 특정한 이익, 말하자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이익을 고려해 봄으로써 더욱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익 평등고려의 원칙에서 보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할 궁극적인 도덕적 이유는 단순히 고통 그 자체의 바람직하지 못함 때문이지, Y의 고통의 바람직하지 못함과 다를 수 있는 X의 고통의 바람직하지 못함 때문은 아니다. p43

 

 

인간은 타생물을 죽임으로써 먹고 산다. 잡식동물의 딜레마.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스스로 광합성도 못해.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동물들을 죽어야 한다면, 적어도 그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이 가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물들에게는 인간의 이성따위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햐고 설계할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똑같이 가진 것 한가지. 바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고통. 고통. 고통.

몸이든 마음이든 아픈 사람은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따위를 떠올리거나 설계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의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랄 뿐. 고통이다. 고통은 그런 것이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의 무게와 크기는 다르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것은 각자 느끼기에 최악인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고통이든지 간에 누가 느끼는지 간에.

 

동생이 자살한지 한달이 되었다.

5월7일 새벽 4시반쯤 집으로 형사들이 찾아 왔다. 빌라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한 시신에서 동생의 소지품이 나왔으니 병원에가서 시신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바로 몇시간 전에 동생은 만취해서  내 방에 쓰러졌고, 나는 또 시작이군 하며 화장실에 갔다.

그 사이 동생은 밖으로 나갔고, 나는 또 술사러 나가나 보다 하고선 잠 들었다. 그리고 몇시간후 형사가 찾아 온것이다.

병원에 가서 시신을 확인 하고 야근 중인 어머니에게 연락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고, 서울에 살고 있는 아버지에게는 연락이 닿았지만 워낙 이른 시간 이었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라 내가 있는 곳 까지 오는데 4시간 가까이 걸렸다.

 

시신을 확인 하고, 병원 관계자를 만나고, 장례 절차를 준비했다. 장례식을 따로 하지 않고 내일 바로 입관해서 화장하는 것으로 혼자 결정. 입관하는 것까지의 비용을 장례식장 측과 합의, 화장터는 장례업체에서 연결해줬고, 납골당 수배하고 , 경찰서에가서 조서 꾸미고 하니 저녁이 되었다. 애인이 오후쯤에 오지 말라는데도 찾아와서 밥먹여주고 갔다.  그 사이 어머니도 연락이 닿아 병원으로 오셨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울고 울고 울고 또 운다. 외가쪽 친척들이 여럿이 와서 집에서 함께 술마시고 밤새고(나는 잤다) 다음날 해장국들 먹이고 입관식하고 바로 서울 벽제 화장터 가서 화장 하고, 5분거리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사촌 한명이 둘째날도 집에서 자고 갔고, 우리집 5마리 고양이들은 2틀 내내 공포와 긴장속에서 스트레스 뻗치고. 나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나는 동생의 고통을 보았다. 내 기억으로는 손목은 세차례 목은 두차례 정도 주방칼로 그었는데, 그때마다 내게 발견되어 응급조치하고 병원으로 가서 꼬메고 왔다. 항상 술에 취한 상태로 자해를 하고는 구급대원도 방에 못들어 오게 하고 치료도 안받겠다고 187cm의 건장한 체격으로 버티는 바람에 그런 일이 한번씩 벌어지고 나면 나는 며칠을 앓았다. 응급대원이나 병원 관계자들은 폭행을 당항 위험이 있기 때문에 주취자에게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시키고 내가 눕히고 앉히고 등등을 다 해야 한다. 그럴때면 나도 고통스럽다. 그런 일이 몇차례 반복되고 나면 나는 동생의 고통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고통스러우니까. '오늘은 또 어디를 그엇을까, 병원까지는 또 어떻게 데려가지, 병원비는 얼마나 나올까, 엄마는 또 어떻게 달래지? 이게 마지막이 아닐텐데 언제 또 이럴까 다음달 다음주 아니면 내일?' 그렇게 동생의 고통을 그날 아침도 외면했다. 내 방에 쓰러지면서 했던 동생의 마지막 말은 '아파'였다. 나는 그 고통을 여느때처럼 무시하고 화장실을 갔고 동생은 그 사이에 빌라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

 

시신확인 할때도, 입관할때도, 화장할때도 납골당에서도 집으로 돌아와서도 울지 않았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맞이 해야할 손님이 있었고, 몇번씩이나 숨이 멎을 정도로 울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으니까....

친척들은 독하다고 수근댔지만, 내가 독한것은 사실이니까 뭐 별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동생의 고통은 완벽하게 끝이 났다. 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 죽음은 그냥 끝. 완벽한 무. 죽음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남겨진 나의 고통은 끝이 났는가?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술을 매일 마시긴 하지만 그건 이전에도 그랬고. 고양이 들이 아파서 마음이 타들어 가긴 하지만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이제 나의 고통은 끝이 났는가?

 

 

첫째 몽실이가 복막염 진단을 받았다, 나리와 같은 병. 발병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병.

얼마를 더 살아낼지 모르겠지만, 떠날때  너무 고통스럽지만 않기를 바랄뿐이다. 나리를 보낼때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해주지 못한 것들만 가슴속에 꽉 차버려서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하지만 몽실이에게는 그렇게 미안해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첫 고양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첫 고양이. 함께 했던 시간들 보다 남은 시간이 더 짧겠지만 지난 시간들 그 어느때 보다 너를 사랑한다. 너무 미안해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이제 나의 고통은 끝이 났는가.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샀다.

작년 11월이후 처음이다.

 

 

 

 

 

 

 

 

 

 

 

 

 

 

 

 

이런 글에도 거짓말을 써야 한다는건 좀 고통스러운 듯.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6-08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6-06-0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밤엔 숙면시간이 50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잠을 설쳤어요. 꿈에서 아무개님을 보았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어쩌면 아무 말도 안했는지 모르겠어요. 그저 좀더 생각이 났죠. 시간이 온전히 남겨진 자의 몫인 만큼 그들의 편이었음 좋겠어요. 올곧이요.

2016-06-08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