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년 매튜스의 실종 사건은 이른바 식객들을 공격하는 발판으로 사용됐지만 부자들은 미디어나 정치인들에게그 비슷한 비난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엉터리 복지금 수령으로 1년에 들어가는 예산은 10억 파운드로 추정된다. 그러나 공인회계사 리퍼드 머피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탈세로 새나가는 1년 예산은 700억 파운드에 이른다. 결국 복지 사기보다 70배나 많은 것이다. 정말 치명적인 모순은 듀스베리 모어 같은 곳에 사는 사난한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언론인 보다 수입 대비 많은 세금을 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간계습 식객들은 향한 비난은 과연 존재하는가? 미디어의 왜곡된 보도에서 세금 회피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복지 사기를 과대평하가는 건 전혀 놀랄 일도 아니다. p48-9
왕년의 계급전사 솔즈버리 경은 20세기 초 제조업 노종자들의 3분의 1이상이 보수당에 투표하는 현상을 보고 놀랐다. 이런 현상은 다시금 우리를 익명의 정치가가 던진 주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즉 보수당은 "딱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딱 필요한 만큼을 주면서"선거에 승리한다는 사실이다. 보수당은 언제나 사회적 족직으로서의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아주 교묘한 방법을 동원하여 개인으로서의 노동계급을 회유하여 선거에서 이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p63
직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어떤 저항의 의지도 뿌리치게 만든다. (...)내가 데처 정부의 첫 재무장관이었던 조프리 하우에게 대량실업이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묻자 그는 동의하며 말했다. "대량실업은 노동자들이 행동해오던 방식 그대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 짓인지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p75-6
대처리즘은 성공이 소유에 따라 측정된다는 새로운 문화를 촉진시켰다. 이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도태되었다.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함께 일하는 인간이라는 열망은 사라졌다, 그럿은 사회적 희생과는 상관없이 개인으로서 자신을 위해 더 노력하는 것으로 새롭게 정의되었다. p88
어떻게 정부가 부자들의 뒤를 밀어주는 것이 정당화 될수 있었을까? 대처주의자들은 낙수효과 즉, 최고위층에 쌓인 부가 전점 아래로 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현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처리즘은 실패한 경제정책 대신 희생자들을 공격했다. 희생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 그건 희생당한 개인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p92
사회학자 존 골드소프는 사회적 유동성이 줄어들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은 그저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사회적 유동성에 대한 강조가 이뤄진 것은 모든 당이 조건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에 대해 언급하기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p139
백인 노동계급을 사회적 계층이 아니라 인종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진보 성향의 차브 혐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문제를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 요인에서 기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다시 말해 자브들의 생활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불공정한 사회구조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p163-4
노동계급을 규정하는 것이 커뮤니티도, 소득 수준도, 주거 형태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닐 키녹은 아마도 노동당의 극적인 우경화에 초석을 놓은 노동당 당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넓은 의미로 정하는 바, 노동계급은 노동력을 파는 것 외에 다른 생계수단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점은 매우 분명하다. 노동계습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다. p210-1
고용불안 그리고 터무니없는 계약조건과 노동환경으로 고통받는 것은 파견 노동자나 비정규직뿐만이 아니다. 정규직 노동자들도 자신들보다 훨씬 싼 값에 부릴 수 있는 이들과의 경쟁에 내몰린다. 결과적으로 모두의 임금이 깎이는 것이다. 이것은 가히 급여와 노동 조건에 있어서 '바닥을 향한 경주'라고 할 만하다. p220
공공부문은 수년 동안 졸업식을 갓 마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선택지였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이다, 만약 여러 해의 학업 기간을 거친 뒤에도 안정되고 벌이도 좋은 일자리를 얻을 개연성이 낮다면, 대체 왜 그런 과정을 밟아야 하나? 결국 하게 되는 일이 가게 점원이라면, 수년 동안 뼈빠지게 학교다니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은 시간낭비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각기를 바란다면, 기대할 만한 무엇을 그 아이들에게 줄 필요가 있다. p261
노동계급을 악마화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잔인하도록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들을 악마화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그리고 극도로 불평등하게 이뤄지는 부와 권력의 분배를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을 공정하게 반영한 결과가로 합리화 하는 것, 그러나 이런 악마화는 훨씬 더 치명적인 의제를 갖는다. 오직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교의는 특정한 노동계급 공돋체즐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 전반에 적용된다, 그것이 빈곤이든 실업이든, 옥으 범죄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부서진 영국에서 희생자들은 자기 자신들 말고는 탓할 사람이 없다. p270
무엇보다 실업은 계급적 이슈다. 그것은 중간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라면 훨씬 쉽게 직면하게 될 숙명이기도 하다. 경기후퇴가 시작된 지 1년쯤 지난 2009년 5얼 전문직 종사자들의 실업률은 겨우1.3%에 불과했고, 경영자나 고위 공무원도 그보다 별로 높지 않았다. 그러나 숙력 노동자들의 실업률은 8.1%, 판매직과 고객응대 노동자들의 실업률은 10.5%였다. 비숙련 '단순직'에서는 그 수치가 13.7%로 뛰었는데 이는 전문직 실업률의 1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p297
칼 마르크스는 언젠가 종교를 일러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극우파의 부상에 대해서도 비슷한 묘사가 가능하다. p331
극우의 부상은 더욱 큰 위기를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다, 그 위기란 노동계급의 대표성 위기다, 정치의 영역에서 축출되고, 정체성이 차괴되면, 사회 안에서 누려온 권력이 축고되고, 그들의 관심사가 외면받고 있음을 생각할 때, 국민당 같은 정당에 투표한 노동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울 수도 있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고 투표를 거부하며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또다른 다수의 노동자들은 탐탁하지는 않지만 차악으로서 노동당에 투표하고 있다. 우익 포퓰리즘의 부상과 대중의 정치적 소외, 비관주의와 냉담함은 영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수 있다 .위기에 처한 것은 노동계급의 미래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미래가 위태롭다. p365
문제는 국제 이슈에 좌파가 부여하는 '우선성'과 관련이 있다. 많은 노동계급 구성원들은 전쟁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가 주택이나 일자리에 대한 그들의 관심보다 크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선 곤란하다. 생활비를 대느라 분투하는 와중에, 자녀들 역시 안전한 일자리나 살 만한 집을 구하려 필사적 노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진행되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북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p381-2
그러나 계급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는 21세기 영국에서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좌파에 뿌리를 둔 단 하나의 운동만이 현재의 난국에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맥빠진 중도정치가 노동계급의 요구와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으 수백만의 노동계급을 냉소에 빠지게 하거나, 극우세력의 품에 안기도록 했다, 자기의 고유 의제를 다른 집단의 의제들과 접합하려던 죄파의 재앙적 실험들이 보여준 바대로, 정치세력으로서 좌파의 미래는 영국 노동 계급 내부에 정치적 기반을 재건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p383
부서진 영국이란 말은 헬조선과 같은 뜻이라고 볼수 있겠다. 백인노동계급을 비하하는 표현인 '차브'에 대한 소위 중간계급과 최상위 계급의 혐오는 마치 남성들의 여성혐오, 일반인의 이반의 혐오, 비장애인의 장애인 혐오, 젊은이의 노인에 대한 혐오등을 떠올리게 한다. 대상을 일반화, 타자화, 악마화 하여, 그 대상들이 받는 비난과 폄훼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그런 방식들.
그리하여 결국 잘못은 너(피해자)에게 있다고 말하는 사회.
4시간동안 여친을 죽도록 패고, 여친의 강아지까지 목졸라 죽이려 했던 남자가 의사가 될사람이니 선처를 해야 한다거나, 여자가 맞을 짓을 했을꺼라는둥의 개소리를 의견이랍시고 떠들수 있는사회, 소라넷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받고 있다고 주장할수 있는 사회의 바탕에는 약자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이 존재한다. 내가 그 대상을 혐오함므로써 나는 그 대상으로 부터 타자화 될수 있기 때문일까......더럽게 찌질하고 비겁한 것들.
이 책의 대부분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아래 인용구는 단 한줄의 문장도 받아들일수 없다. 애를 안 낳아봐서 그런다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내가 성장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때문에 애를 낳을수도 있다고? 나와는 완전히 별개의 생명체를 세상에 내놓는 일이 출산이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너무나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10대에 빈곤가정에서 싱글맘으로 애를 키우는 것이 자존감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니 하아.......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최근의 한 심층연구는 10대 임신이 무엇보다 빈곤한 가정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에게 긍정적인 것들을 많이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이른 시기에 부모가 되는 것이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심지어 10대 부모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해주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자 하는 자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이 보고서의 저자 가운데 하나인 클레어 알렉산더박사는 말한다. 실제로 자녀를 갖는 것은 한 개인이 가진 역햘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또다른 연구를 살펴보면, '무엇보다 혜택받지 못한 집단에서 자라난 사람들, 부모가 되는 것을 미룬다고 해서 별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기에 엄마가 되는 것은 그들이 자존감을 얻고 어른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된다. p3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