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개인에게 어떤 역할을 제공하여 그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의 실상을 외면하도록 돕는가? 그다음으로는 우리가 잔혹 행위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해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 잔혹 행위를 막는 장벽을 피했는가? 사실상 이 질문이 이 책의 핵심 메세지라 할 수 있다. 단지 악한 욕망에 대해서만 의문을 품어서는 안된다. 그보다 더 깊은 곳, 특정한 욕망의 작동을 막아야 하는 장벽이 무력화되는 지점을 살펴봐야 한다. p114-5
내가 궁금했던것-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악을 행하게 되고 어떻게 악을 행동을로 옮기는가? -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하였다. 인용문처럼 장벽이 무력화 되는 지점과 이유가 궁금한 것인데 이 책은 그 질문을 던져만 놓고, 엉뚱한 결론-화해-으로 끝이 난다.
세상은 가차 없이 그들에게 도의상의 죄를 짊어지게 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도의상 양심의 가책을 받기 전에 일단 멍한 상태에서 그들의 머리가 멀쩡한지부터 의심했다. 그들은 그들의 눈에 부도덕한 남녀로서 부끄럽게 비치기 이전에 이미 불합리한 남녀로서 불가사의하게 비쳤던 것이다. 거기에 변명다운 변명은 전혀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따랐다. (...)그들은 ㅊ아백한 이마를 순순히 앞으로 내밀고 거기에 불꽃과도 같은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 무형의 쇠사슬에 묶인 채 손을 잡고 어디까지나 함께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부모를 버렸다. 친척을 버렸다. 친구를 버렸다. 크게 보면 일반 사회를 버렸다. 혹은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p189-90
친구의 동거녀와 동거남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버린 소스케와 오요네. 1900년대에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버림받을 정도의 도덕적인 패악이었던가 보다. 지금에야 뭐 그정도 가지고 그렇게 까지 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도덕률은 어느 정도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간통법의 존재와 폐지만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 즉 악하거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기준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에는 큰 잘못이거나 거대한 악이었던 것이 현재는 작거나 소소한 악이 될수도 있는것일까? 그 반대의 경우는?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은 어디까지 일까?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변한다면, 그것은 절대 선 또는 절대 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지난 주말 친구와 광화문에 국정화 교과서 반대 집회에 다녀왔다. 반대 집회 하는 곳은 한곳이였고, 기독교 단체에서 찬성 집회를 그리고 군복 입으신 분들도 찬성 집회를 하고 계셨는데, 특히나 군복 입으신 분들의 집회 연설자 여성분의 기백이 어찌나 짱짱하시던지 스피커에서 그분이 음성이 나올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아무튼 그 연세에 무리들 하셨는지 우리쪽 보다는 한참 전에 집회를 해산하셨다.국정화 교과서 반대 집회쪽은 역시나 거의 젊은 아니 어린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초중대학교 학생들과 반대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치다가 문득 '우리들이 잘못이 많아 너희들을 이렇게 길위의 빨갱이로 만드는구나' 싶어져 눈알과 목구멍이 뜨겁게 아팠다. 더 많은 어른들이 이런일에 책임을 지고 거리로 나와주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게, 먹고 살기 빠쁜데, 교과서 따위가 지금 뭐 그리 큰일 이냐고 생각하고 있는 어른들이라 미안했다.
알고 하는 잘못과 모르고 하는 잘못 중 어느 것이 더 나쁠까? 자신의 생각이 틀릴수도 있다고, 자신이 잘못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하는 사람이 나쁠까, 아니면 자신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다고 굳게 믿으면서 행동하는 사람이 나쁠까?
내가 보기엔 자신의 신념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치인에게는 거대한 악행을 이룰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된다. 개인의 그러한 잘못된 신념은 작은 피해로 끝날수 있겠지만, 정치인의 그러한 신념은 그 국가의 국민과 자연과 결국엔 그 국가 자체를 위험하게 만든다. 아마도 그 정치인 본인은 돈주머니를 불리고 부모에게 효도 할수 있겠지만.....
이념 편향적이고 미화된 역사교과서를 결코 좌시 하지 않겠다는 말따위 하지 말고 바로 옆에 있는 김무성이 입이나 좀 닥치게 해주지? 그것도 불가능하면서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