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잡혀온 적들을 신사적으로 대하라는 케케묵은 규범 외에 내가 편드는 게 뭐란 말인가? 결국, 혼란스럽고 치욕스러운 눈길을 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새로운 형태의 타락상을 제외하면, 내가 반대하는 게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야만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라며 내가 군중들과 감히 맞설 수 있을까? 정의라는 말을 한 번 입 밖에 내면, 그 끝이 어디일 것인가? 아니야, 라고 소리치는 게 더 쉽다. 맞아 죽어 순교자가 되는게 더 쉽다. 야만인들을 위해 정의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단두대에 머리를 대는 것이 더 쉽다. 그런 주장은 결국, 우리가 무기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땅을 강탈당한 사람들에게 성곽 문을 개방하라는 말밖에 더 되는가? 치안판사직을 역임했던 사람에게도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법을 수호하던 덕목 높은 옛 치안판사에게도, 국가의 적이 되어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 옛 치안판사인 나에게도 나름대로 회의의 실타래가 없는 건아니다. p184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치안판사도 자기고백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그 내러티브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야만인들'을 억압하고 식민화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연루외어 있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내비친다. 야만인들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제국주의자인 죨 대령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치안판사는 명명백백하게 정의를 표방하는 자로서, 야만인들에게 행해지는 제국주의적 폭력과는 담을 쌓고 있는 정의로운 진보주의자이다. 즉, 그는 제국주의자들의 '기다림'을 허구적인 것으로 인식할 줄 아는 지식인이자 진보주의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자신도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암암리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죨대령이 촉력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유지하려는 보수적·우파적 제국주의자라면, 온정적인 수단으로 제국을 영속화하려는 진보적 제국주의자이다. 이는 제국의 유지를 위해 봉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들이 서로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쿳시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부분이다. 아니, 그의 소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쪽에 각별한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섣불리 피식민주의자를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끼어들 수 있는 허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자기고백적인 치안판사의 문제는 따라서 남아프리카 백인작가인 쿳시의 것이다. 치안판사의 내러티브에 드러나는 공모성은 식민주의자의 후손이자 반체제 작가인 쿳시의 것이다. p272-3

 

쿳시의 소설에서도 기다리던 만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 어부들과 유목민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들은 죨 대령과 같은 제국주의자들이 생각하고 기다리는, 밤에 출현하여 부녀자들은 강간하고 아이들을 죽이며 집에 불을 지르는 야만인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상'은 '미친'것일지 몰라도 '전염성이 강하다'따라서 카바피의 시에서처럼, 그러한 야만인들은 쿳시의 소설에서도 존재하지는 않지만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만 하는 일종의 해결책이다. p271

                                                                                                                       <옮긴이의 말중 발췌>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기다리며 공포정치를 펴는 군대.

존재하지도 않는 '여성상'을 만들어 억압하는 남성권력자들.

타자화란 이런것이구나...

 

언제부터인가 소설등의 리뷰를 쓰는것이 점점더 여려워진다.

핵심 내용과 그에 맞는 옮긴이의 해설을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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