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5일 부터 현재까지 큰 어려움 없이 금주중이다. 그동안 책과 여러 매체들에서 보고 들었던 금단증상은 딱히 없다. 물론 가끔씩 짜증이 폭발하긴 하지만 오히려 전보다 내 감정을 알아채고 다루는 것에 더 능숙해 진 듯 하다. 

 술을 안마시는 사람. 매일 운동하는 사람,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 잠을 잘 자는 사람으로 내 정체성을 정립했다.

 사실 나의 현실 상황은 달라진 딱히 것이 없다. 내가 술을 마시던 모든 이유들, 사실은 핑계일 뿐 이였던 상황들은 모두 그대로 이지만,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다르게 선택 한 것 뿐인데, 나는 많은 부분 달라졌다. 


 아마도 그런 나였지만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고 쓰고, 시도해보고 실패하고 그래도 또 다시 시도해보고 했던 시간들이 쌓인 결과인 듯 하다.


 인간은 최후에 최후까지 선택이란 것을 할 수 있고, 책은 인간이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중요한 도구라는 것. 새삼 깨닫고 있다. 

 나는 느리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비혼중년여성인 나는 사회적으로 소수자의 입장 일 수밖에 없다. 몇몇 남류작가들의 책을 읽다가 느낀 그 괴리감들.....


 대단하지 않은 것을 엄청나게 대단한 깨우침의 발견처럼 써 내는 능력은 여성작가들이 좀 본 받을 만한 면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책들은 이제 더 접하고 싶지는 않다. 스피커로써의 역할을 해주는 남류작가의 책이면 충분할 듯 싶다. 읽을 필요가 없는 책도 읽어 봐야,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니 시간낭비라기 보다는 피할 수 없는 경험으로 생각한다.



장애란 어떤 본래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이든, 취업이든, 사랑이든, 생활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불가능의 체험이며, 그때 자신에게 생겨나는 '무능'과 '포기'의 정서이다, 어떤 불가능성의 체험,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나는 자기 무능과 자기 포기의 정서를 겪을 때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된다. 그리고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가 커질수록 그는 중증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불가능의 체험과 포기의 정서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

그런데 수십 년 간 집이나 시설 , 그리고 작업장에만 갇혀 있던 어느 장애인이 야학 사람들과 모닥불을 피우고 밤하늘을 함께 보았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는 어떤 불가능이 가능으로, 어떤 무능이 능력으로 바뀌는 체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정서들의 대변혁이 일어났을 것이다. 모닥불이 있는 밤하늘이 그에게 무언가를 일깨운 것이다. 이 일깨움, 이 깨달음, 이 배움은 분명 앞으로 그가 만날 지식과 정보의 성격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움 이전에 일어나는 배움'이다. p 82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은 니체가 '위대함' 을 어디서 찾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자기의 혈통, 자신이 앓았던 병과 치유법,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꼼꼼하게 적었다. (...)" 이 사소한 사항들은 이제껏 중요하다고 받아 들여졌던 것보다 상상을 추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여기서 바로 다시 배우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런 게 바로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이고 '가치의 전환'이다, 따로 갈음하는 말없이, 니체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고 싶다. 여러분, "사소한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p 104


구원이든 처벌이든, 축복이든, 나는 신체를 떠나서 이루어지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신체가 존재하는 동안에, 신체와 더불어 일어나는 우리의 일상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구원과 축복, 즉 신체와 더불어 신체를 통해서 겪는 우리의 좋은 삶이 내게는 철학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p 112


지은 죄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함석헌의 말에 참 많이 웃었다. 그러면서 또 깊이 감동했다. 그건 그대로 결산하고, 안 되면 나중에 신에게 벌 받기로 하고, 지금 '살아있는 마음', 지금 보잘것없지만 '옳은 생각'하나 들거든, 그것을 힘써서 할 밖에, 지금 이대로라도 말이다. 지금 이대로라도, 지금 이대로라도... 참 여러 번 되뇌게 되는 말이다.  p 122


주류 질서에서 쫓겨나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자기를 쫓아낸 이들에 반감을 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그런 권력을 가진 이들로서 살고 싶어 하고 안정된 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한다. 불안한 삶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하이네에서 카프카, 그리고 어쩌면 찰리 채플린까지, '무례해 보일 정도로' 진실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추방되었기에 더 출세하려 하고 내 것에 더 집착하는데, 소수의 사람은 추방되었기에 그 추방의 진실을 증언하는 운명을 택한다. 다수는 저 자신이 추방된 자들이었으면서도 다른 추방된 자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주류가 되려 했지만, 소수는 추방된 자들로 기꺼이 남아 진실을 증언하고 다른 추방된 자들과 연대하려 했다. p 138-139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를 '해석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해석 노동'의 기본 내용을 남녀의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가령,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이해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해 사이에는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남녀에게 성별을 바꾸어 서로의 일상에 관해 기술해보라고 하면 여성은 대체로 남성의 일상을 자세히 적는데 비해 남성은 여성이 하는 일 자체에 대해 별 개념이 없는 답변을 한다. 이는 여성이 남성의 관점에서 사태가 어떻게 보일지를 자주 상상하며 남성의 시각을 자기 사각으로 만드는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가부장제 사회일수록 크다고 한다.  p 161


복지원에서는 '이유 없는'폭력도 자주 휘둘러졌는데(어떤 때는 단순히 날씨를 이유로, 또 어떤 때는 말 그대로 '그냥'), 이는 권력이 그 순수성이나 절대성에 다가갈 때 드러나는 권력의 참 모습이다. 권력은 절대적으로 되어갈수록 그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권력 자체가 이유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시설에서 자의적인 폭력, 이유 없는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권력을 확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병영사회에서 권력자들의 이념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광주학살 이후 철권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전두환 정부는 '정의 사회 구현' 이라는 미명 아래 유신체제에 이루어진 이런 조치들을 계승하고 강화해 갔다. p 187-188


앞서 말한 것처럼,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사회적 관계로부터 배제된 공간이지만 음각화의 방식으로 사회를 그대로 비추는 공간이다. 그것은 전체 사회를 대칭적으로 비추는 거울 이미지다. 따라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거울 이미지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유용한 출발점일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울 이미지를 바꾸어서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라도 그 거울이 비추고 있는 곳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 말이다. p 190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 그 믿음을 과시하는 사람은 많아도 예수처럼 사는 사람은 드물다. 니체가 예수만이 유일한 기독교도였다고 한 것은 그런 뜻에서 였다. 천국은 예수의 실천 속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예수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말씀을 듣고 읽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무소유 정신을 갈파한 어느 스님의 책을 백만 권 넘게 사지만 정작 무소유를 실천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좋은 말을, 박물관이나 명승지를관람하듯 그저 듣고 구경하면서 입장료로 책값을 내는 것이다. p 248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들었다면 최소한 한 번은 내 목소리로 그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때만이 그것은 내 피가 된다. "높이 오를 생각이라면, 그대들 자신의 발로 오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가 자신을 구원해 달라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던진 말이다. 확실히 그렇다. 내 발로 오르지 않은 산은 풍문과 구경거리로만 존재하는 산이다. 그러니 산에 오르려면 스스로 오르는 수밖에 없다.  p 252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춰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의지가 꺽인 곳에서 지능은 발휘 되지 않는다.불평등의 현실을 본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또 현실사회에서 우월한 자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이라고 생각해 보릴 때, 우리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래도 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 P69

이해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어떤 불이익조차 감수하고 나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니 행동에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맘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켜보며 맘속에 공감이 일어날 때,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 를 느끼는 것이다. 그때만이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인류‘가 ‘나아지고 있는지‘에 대해 뭔가를 말할 수 있다. (...) 요즘 들어 ‘외부세력‘ 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왜 이해당사자도 아닌데 끼어드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칸트 식으로 답하자면, 구경꾼들의 맘속에서 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인‘을 넘어 ‘인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일이 아닌데도 아파하고 고통을 무릅쓰는‘ 그것 때문이다.

- P74

나는 이 고대적 금욕주의에 중요한 메세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의 극복은 세금의 증대와 일자리 창출로 환원되는 차원 너머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욕망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월스트리트에 않은 인물이나 기업을 바꿀 수는 있어도 월스트리트의 존재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증세나 일자리 창출, 복지 증대가 시급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금욕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내가 고대 금욕주의를 끌어들인 것은 욕망을 줄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른 삶을 욕망하라는 것이었다.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와는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 P117

교양을 쌓는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기심,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는‘그런 지식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비판적 사유, 푸코는 그것을 철학이라 불렀다. - P133

물론 이것이 쓸데없이 제 고집을 세우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아집이야말로 내 습관과 편견(그것을 심어준 사회아 문화)에 굴복하는 것이다. 내게 낯선 존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게 기꺼이 나 자신을 개방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용기를 낼 때, 우리는 뭔가를 깨우칠 수 있다. 그래서 기꺼이 동의 할 때도 자유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삐딱하게 고집을 세울 때도 노예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노예란, 저 자신이 옳고 그름을 따져볼 능력이 없는 존재 혹은 그런것에 무관심한 존재를 가리킨다. 그래서 노예는 습관에 의탁하고 언론에 의탁하고 권력자에 의탁하고 다수에 의탁하는 것이다, 쉽게 굴복한다는 것은 스스로 따져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이니 그에게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 P149

신자유주의와 수형인구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본 골격을 생각해보면 이해될 만한 대목이 있다. 신자유주의 정부들은 대체로 탈규제를 통한 시장의 자유화, 공적인 부문의 대규모 민영화 등을 추진한다. 다만 정부의 역할을 최소로 한정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과 달리 신자유주의 정보는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시장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하지만, 시장을 위한 개입은 매우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이다. 이때 정부가 빈번히 표방하는 것이 법치주의다. 정부가 법질서를 지키자고 말하는 게 무슨 문제일까 싶지만, 문제는 법질서에 대한 강조가 시장 자체의 실패(사회적 양극화, 빈곤층의 확대)에서 파생하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공안의 시각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 P180

인간이 인간을 상품으로 사고판 것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의 노예들은 그 인격이 통째로 팔렸다. 그들은 사실상 살아 있는 물건이었다. 근대 자본주의도 인격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일정 시간 동안 자기 생체 능력의 일부를 상품으로 판다. 그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정신이 극단화 된 곳에서 새로운 사태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인간을 가두어두는 것, 인간의 부자유에서 어떤 수익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수익모델로서 인간 수용소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해 할까? - P183

소수자들의 경우에는 여기에 약간의 어긋남이 있다. 프로이트가 말하듯 떠나간 ‘대상‘과 ‘나‘ 를 동일시하긴 하지만, ‘떠나간 대상‘ 을 원망하기보다 ‘그렇게‘떠나갈 자기 운명을 미리 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거리감보다는 ‘나 역시 그처럼 죽을 것이다‘는 동질감이 크고, 단순히 ‘떠났다‘는 사실보다는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떠났다는 사실에 더 크게 반응한다. 떠나간 대상과 거리감이 없으니 대상에 투여된 리비도를 좀처럼 회수할 수가 없다. ‘그렇게‘살다 죽는 것이 사실은 내 운명일 수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이다. 대상의 죽음을 인정하고 ‘현실의 나‘, ‘살아 있는 나‘로 돌아와야 하지만, 나는 그 현실 속에서 ‘산송장‘ 으로 살아갈 것임을 예감한다. (...)당연히 자기 비하가 일어나기 쉽다. 회복의 과정이 무력화의 과정인 셈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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