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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부는 언덕 ㅣ 햇살어린이 34
김명수 지음, 민은정 그림 / 현북스 / 2015년 11월
평점 :
현북스 햇살어린이 <찬바람 부는 언덕> by
김명수

오늘도
비가 오고 날이 차네요.
외출했다 집에 들어오면 따끈한 차 한 잔 생각이 간절한 요즘이라, 며칠 전 사다 둔 레몬으로 레몬청을 만들었어요.
차가워진 몸을 녹여 줄 따끈한 레모네이드 한 잔 준비해 놓고, 아이들 기다리면 좋겠다 싶어서요.
이런 날, 분위기와 딱 맞아 떨어지는 책 한 권을 만났습니다.
지금쯤 나와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도 이렇게 찬바람 부는 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가 있겠지 싶어
가슴 한 켠이 아려오네요.

표지에
그려진 아이가 동화의 주인공 미리.
남루한 외투로 미루어 보아 미리네 집 형편은 그리 넉넉치 않아 보입니다.
동화의 배경은 35년 전쯤으로, 무허가로 지은 움막집에 사는 미리네 가족의 삶은 우리 아이들에겐 다소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들보다 먼저 책을 접한 엄마에게는 참 익숙한 단어들에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35년
전에도 아파트가 있는 동네, 구룡산이 등장하는 걸로 보아 전학 온 미리네 동네는 양재 어디쯤이었나 봅니다.
하교 후 아파트가 늘어선 쪽으로 가지 않고 썰렁한 빈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미리의 집은 산 밑 조그만 언덕 아래
천막과 널빤지로 엉성하게 지어 놓은 움막이었죠.
아픈 엄마는 미리가 집에 왔는데도 누워만 있습니다.
초등 4학년, 우리 준이보다 한 살 적은 나이인데도 미리는 아픈 엄마를 위해 스스로 라면을 끓여내 오는 것이 꽤나 익숙해
보입니다.

그 뿐 아니라, 마실 물을 떠 오는 일이라든지, 기침이 심한 엄마를 위해 사탕 한 봉지 사 오는
일이라든지
다 크면 엄마 약값을 하고 싶어 키우고 있는 닭과 오리를 살뜰히 챙기는 일까지 모두 어린 미리의 몫이었지만
불평하고 힘들단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가 참 밝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미리네 집에 위기가 닥쳐왔지요.
미리네 집 앞으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까지 직통으로 도로가 뚫리도록 공사를 한다더니만
미리네 집을 찾아볼 수도 없게 밀어버리거든요.
닭과 오리가 묻혀버릴 뻔한 현장에서, 미리가 깜짝 놀라 오리를 구하려다가 흙더미에 빠지고 말았고
가까스로 오리를 구해냈지만, 한 마리는 안타깝게 죽게 되었어요.
공사현장 감독은 미리네가 집을 비우는 대신 현장 사무실의 창고에 와 있어도 된다며 꼬드겼고,
당장 집을 얻어 나갈 형편이 안 되는 미리 엄마는 결국 집을 허무는 것을 허락한 후 창고로 짐을 옮기게 됩니다.

공장에서 일하던 미리네 언니 미숙이 역시 스무 살도 안 된
미성년자인데
움막집이 없어지고 방을 얻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매일 야근을 도맡아 하다 결국 폐병에 걸려
2년간 일 하지 말고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당장 살 길이 막막해진 미리 엄마도 다시 과일이라도 떼다 팔아보겠다며 창고를 나서다가 각혈을 하더니 주저앉아
버립니다.
이런 과정들이 어린 미리에게는 너무나 감당하기 버거운 일이었을텐데...
어린 아이의 입장을 생각하며 책을 읽다보니 정말로 가슴이 아리고 아프더라고요.
형편이 어려워 병을 제 때 치료하지 못 하고 키운 탓에 기관지가 악화되어 기관지 피열이란 진단을 받은 엄마를 위해
그 어린 아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을테니
삶의 무게가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을까요?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나는 듯 하더니, 갑자기 비좁은 골목에서 배추를 쌓아놓고 파는 젊은 아낙네가 등장합니다.
배가 불룩한 그녀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혹시 저쪽 연탄가게 아주머니 아니세요?" 라고 묻자 맞다고 하네요.
사글사글한 말투로 배추 장사를 하고 있는 아낙을 두고, 애기를 가진 사람이라 억척이라며 힘들지 않으냐 물으니
"힘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모두 다 힘든데 열심히 살아야 하지요." 라고 답하는 앳된 배추장사 아낙.

얼굴에
연탄 가루가 꺼멓게 묻은 그녀의 남편은 며칠 전 혼자서 연탄 배달을 하다가 허리를 무리했는지
배달이 많이 밀려있는데도 불구하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리하지 말라는 아내의 이야길 들었지만, 어디 무리 안 할 수가 있나요?
가난한 살림에 내 몸을 열심히 놀리지 않으면 생활은 더 쪼들리게 되니까요.
연탄을 리어카에 싣고 있는 그의 앞에 여학생이 나타났고, 남자를 '형부'라고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배추장사 하던 새댁의 여동생이예요.
이쯤되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들이 누군지 알아차리겠지요?
구룡산 아래, 새로난 길 위를 씽씽 달리던 차를 바라보던 미리네 가족의 몇 년 후 모습이었던 것이죠.

언덕
위로 연탄 배달을 혼자 가야 할 형부가 안타까워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게를 지고 뒤따라 나선 여학생을
바로 미리였던 겁니다.
형부 입장에서는 불쌍한 아내 고생 시키는 것도 맘이 아플테고,
처제만큼은 공부 잘 시켜서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도록 해 지원해주고픈 심정으로 열심을 내어 일을 하고 있었을텐데
여학생 신분으로 지게를 지고 연탄 배달을 하겠다며 나서는 처제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네요.
이런 상황은 비단 35년 전에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어린 나이부터 혼자 감당하기엔 버겁고 너무 가혹한 삶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누군가가
있을테니까요.
그런 상황에도 여전히 밝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는 것이 그들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보이게 하네요.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 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어릴 때, 저희 집 생각을 해 보니 저 역시 그렇게 넉넉한 집에서 자라질 못 했고
물질적으로는 그리 부유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즐거운 마음으로 저녁 식사 하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라 느끼곤 했지요.
그래서 지금도 저 가사를 참 좋아하는데, 미리네 가족들이 찬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둥그런 상에 둘러 앉아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그 찬송가 가사가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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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언니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감사하게도 맘이 푸근한 신랑을 만난 모양입니다.
미리가 은행에 취직할 것 같다며 1차 시험에 붙었다는 소식을 알리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언니 미숙.
왠지 미숙의 입장으로 감정이입되어 저 역시 눈물이 줄줄 흘러 나오는 거 있죠.
요 며칠 저 역시 사는 게 힘들다 생각되는 순간들이 자주 있어서인지,
이야기에 쏙~ 몰입이 되더라고요.
미리 또래의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나름 비교를 하게도 되고요.
뭐든 부모가 해 주고, 사 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걸로 여기고 사는 아이를 보면서
그렇게 사는데도 만족함이나 감사함을 느끼지 못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래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더 안쓰럽게 여겨졌나봐요.
내일은 아들이 이 책을 읽어보겠다더군요.
같은 책을 읽으면서 아들은 어떤 걸 느끼게 될 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