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 교수의 조선 산책
신병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초의 삶부터 왕실의 암투까지 조선의 역사 속 현장과 사건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신병주교수의 <조선산책>.

역사가 현재에 새로운 방향과 의미를 제시할 때 빛을 발한다는 말이 참 와 닿는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와 앞으로 나아갈 뱡향은
역사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니까.

학창 시절에 배운 역사가 그닥 기억에 없다.
애들이 역사 공부 하게되니 그제야 엄마도 덩달아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고, 또 세상 살아가다보니 내 앞에 직면한 상황들을 인지하고 파악하는데 역사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게 되어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에도 탄핵이 있었다고?

'반정'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1506년 중종반정과 1623년 인조반정이 바로 조선판 탄핵이란다.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반정은 본래
<춘추공양전>의 '발란반정'(어지러움을 제거하여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에서 나온 말로,
폭군을 몰아낸 후 왕통을 이을 가장 적합한 인물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의미했구나..

우리 역사에서는 역시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참 많은 듯.

두 차례의 반정을 통해 쫓겨난 광해군과 연산군의 스토리 중 특히 연산군에 대해서는 민초의 반응에 대한 기록이 함께 소개되는데, 2년 전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도 닮은 것 같다.
그때도 역시 장녹수, 김개시와 같은 비선실세 여인들이 국정을 농단한 것으로 민초를 분노케 했고,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 대신 소수의 측근에 의존하는 권력자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를 똑똑히 알게 해 주니,
이후로는 이런 무능한 리더가 다시 없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조선사를 통틀어 어쩜 우리에게 가장 어질고 스마트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인물, 세종.
가용할 수 있는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한 덕분에 세종 시대의 성과들은 나열하기 힘들만큼 엄청나다.

저자는  세종의 출중한 능력 뿐 아니라 그의 용인술에 주목하고 있는데,
중국계 귀화인 출신 아버지와 관기 사이에 출생한 천민 신분의 장영실을 등용하여 관직까지 부여하여 국가의 과학 프로젝트를 주도하게 한 점,
태종의 후계자로 세종이 임명되는 것을 반대했던 황희를 다시 등용하여 재상으로까지 세운 것 또한
현재 위정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고 추앙하여 지폐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세종의 초상은 사실과 다르다고,
몇 년 전 이것에 대해 말들이 참 많았었다.

잦은 전쟁과 화재 등으로 인해
원본 그대로 보존된 어진이 거의 없다는 것이 참 아쉽다.
어진에는 인물의 외형적인 모습 뿐 아니라 내면의 성격까지 파악해 담아냈다는데, 영조의 어진을 보니 정말 성격까지 담아낸 것 같다는 느낌.


시대의 위인 편에서는 3월 여성의 날과 마물려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상, 신사임당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그냥 좀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여성쯤으로 배웠던 사임당이
오히려 사임당 생존 때나 사후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게는 율곡의 어머니가 아니라 화가 '신씨'로 명성이 자자했다 한다.

나처럼 그녀의 여성성과 모성상을 기억하는 것은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한 송시열의 영향이었고, 또 그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최근까지 이어진 탓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기억해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들로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실제 모델이었던 남자현 의사,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
신채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간호사 출신의 독립단체를 조직하고 헌신한 그의 아내, 박자혜 선생 등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춘향전 속 암행어사 이야길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적지 않다.
분명 소설인데, 소설이 아니라 착각할 때도 있었던 듯.

암행어사의 파견지는 보통 추생 제도가 적용되어
본인의 연고 지역에 파견 나갈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는데, 몽룡은 춘향이가 고통받는 남원으로 파견을 나갔었지..이게 다 소실이니까 가능했던 일!

중앙박물관에 가서 내가 마패를 본 적이 있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니 본 적이 없는 건가?
봉서와 함께 왕이 친히 하사했다는 마패는
역마가 그려진 숫자대로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증명서의 기능과 함께 암행어사의 신분증명서 역할도 했었는데,
지금 전해지는 마패는 대부분 2마패 형태라 한다.

이걸 읽고 나니 소설 춘향전도 읽어보고 싶고,
남원 광한루도 가 보고 싶네.

애들이랑 너무나 재미나게 읽었던 소설 [나는 바람이다].
거기에 등장한 하멜은 사실
1653년 7월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가는 항해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 끝에 제주도에 이르렀던 것.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조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끝까지 억류될 뻔 했던 하멜 일행은
1666년, 13년간의 억류 생활을 마감하고 탈출에 성공했고, 자신들의 밀린 월급을 청구하고자
조선에서 겪은 일을 적은 일에 대해 쓰기 시작한 것이
결국 17세기 조선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산방산이 내려다보이는 용머리 해안에 있다는 하멜기념비와 하멜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다음 번 제주 여행 가게 되면 꼭 찾아봐야지.

도심 한복판이 산으로 둘러쳐진 서울,
외국인들이 서울에 와서 놀라는 것 중 하나란다.

동쪽으로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목멱산(남산), 북쪽 북악산이 둘러 있어서 국방에도 유리했고
도성 백성의 관리에도 편리했기에 태조는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한다.

세종 이후 도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왕이 숙종인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의 큰 전쟁에서 도성이 한양의 방어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 했고,
숙종은 성곽을 보수해 방어처로 활용하고자 보수공사를 시작한다.

여직 별 관심 없이 그저 ~~문으로 알고 있었던 도성을 쌓은 돌 모양 이야기가 참신했다.
태조 대에는 다양한 크기의 깬 돌을 규칙 없이 쌓았고,
세종대에는 아래쪽은 크고 위쪽은 작은 돌을 사용,
숙종 대에는 네모나게 다음은 규격화된 돌을 사용했다니,
사진에서 보이는 도성들은 숙종대에 보수한 것인가보다.

이제 몇 주 후면 선거가 있는데,
세종 때도 국민투표가 있었다는 말에 눈이 번쩍!

세종은 토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공법'을 추진하면서
백성들의 찬반 의견을 묻고자
투표 3년 전인 1427년에 과거시험 문제를 내면서
공법에 대한 견해를 묻고 세법 확정 전 미리 분위기를 조성해갔다.
이 과정을 통해 신하와 유생들 의견을 수용했고,
최종적으로는 백성이 결정을 내릴 사안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는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이나 실시되었다.
이런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고, 
또한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는 세종의 원칙은  지금 보아도 너무나 큰 감동을 준다.

책을 읽고 나니 역사의 현장으로 당장 떠나고 싶어진다.
그곳에서 있었던 사건들, 그들의 생각들을 되짚어보며
조선의 궁으로, 청계천으로, 남한산성으로
주말 나들이 갈 곳 참~많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