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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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냐 에세이냐, 이런 장르 구분은 시중에 나온 많고 많은 책 중 우리가 읽을 것을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무언가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르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을 터이다. 좀 더 크게 보아서, 문학, 아니 그냥 글을 마주하는 거다.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태여 고민하기 보다는 내가 읽을 글에 얼만큼 글쓴이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나를 따져보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다. 


  나름 생각의 전환이란 걸 해보아도 그리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덴마크의 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코펜하겐 삼부작 중 첫 번째인 『어린 시절』속에서 나는 토베의 무덤덤한 문체와 대비되는 넓디 넓은 행간의 여백을 읽어내야 했다. 인간의 기억이란 건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하기에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라고 해도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기억과 망각은 한 쌍이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당시의 경험보다 미화되거나 악화되기가 쉽다. 전체 맥락을 기억하기 보다는 어떤 일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그래서 내 기분도 좋았는지 나빴는지 이렇게 단편적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기억이 안고 있는 건 과거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자신의 파편화되고 단편적인 순간의 감정에 가까울 거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석탄과 재냄새가 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당신의 삶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알아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 p.47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는 주인공이 마들렌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훨씬 빨리 피로해지지만 옛 경험도 오래 머금고 있나 보다. 익숙한 냄새를 맡으면서 과거에 빠져드는 건 프루스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자주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냄새라는 게 여간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감각은 자신의 몸에 찍힌 일종의 낙인으로 작용한다. 전형적인 노동자 아버지, 좀처럼 딸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리고 자유분방한 오빠와 함께 자란 작가의 경험은 오랫동안 몸에 붙어 있는다. 전에 읽었던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그리고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처럼 유년 시절의 경험이 인셍 전체의 궤적에 얼마나 큰 흔적을 남기는지 알 수 있었다.


  덴마크 문학도 처음이고, 토베 디틀레우센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아직 너무 낯설다. 얇은 책 한 권이지만, 백 년 전 덴마크에서 자란 토베는 자신의 꿈을 도와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서 접한 온갖 문학책들이 결국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친 거다. 3부작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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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단어로 읽는 중세 이야기 - 어원에 담긴 매혹적인 역사를 읽다
김동섭 지음 / 책과함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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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학원에서 알바를 한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학생들의 단어 시험을 봐주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인데 고등학생들이 보는 영어 단어장 중에는 어원을 기준으로 단어를 나누어 단어의 뜻을 쉽게 파악하고 암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오늘날 영어는 명실상부한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이고, 한국에서 영어는 곧 권력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어와 영어는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언어이기에 학습의 과정이 지난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자료 중에는 미국 외교부에서 선정한 언어 중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꼽혔다고 한다. 미국인 기준으로, 영어와 가장 거리가 먼 언어가 한국어와 일본어이고, 그래서 미국인들에겐 두 언어가 그만큼 학습 난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 학습에는 절대적인 난이도보다는 모국어와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에 한국인이 한국어와는 글자도, 문법 체계도 모국어와는 너무도 상이한 영어를 배우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부에도 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 한자를 알고 있으면 모르는 단어의 뜻을 수월하게 유추할 수 있다. 한국어 어휘의 상당수는 한자어이고, 한자를 알면 동음이의어도 맥락별 용법을 쉬이 알기 때문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문법과 발음에 온갖 예외가 많은 것은 그만큼 영어에 많은 언어들이 뒤섞여 일관성을 잃은 탓인데, 복잡한 영어의 역사에도 중심이 되는 변곡점은 존재한다. 『100단어로 읽는 중세이야기』에 따르면 영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어이고, 프랑스어의 영어로의 유입은 중세에 두드러졌다.


  역사학에서 시대 구분의 기준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중세의 시작은 476년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 중세의 끝은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구 문명의 근간이었던 로마 제국의 명맥이 불완전하게나마 지속됐던 시기가 바로 중세인 것이다. 하지만 1453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외에도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당시 서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1337년부터 이어졌던 백년전쟁이 종식되었던 것도 같은 해에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라 책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한 내용인데 1066년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로 즉위하였다. 즉 잉글랜드 왕은 공교롭게도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프랑스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아키텐 지방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하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가져가 프랑스로서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명목상 신하였던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러니로 인해 116년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두 로마 제국의 멸망 사이엔 십자군전쟁과 백년전쟁같은 굵직한 전쟁도 있었지만 중세하면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종교, 즉 기독교다. 중세의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생활 전반과 사람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개념이었다.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성경Bible은 고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이시스로부터 출발하여 페니키아의 비블로스Biblos 왕국, 고대 그리스에서 파피루스를 통칭하던 단어 biblos의 뜻이 확대되어 결국 책 중의 책인 '성경'이 되었다. 책은 100개의 단어를 세분화하여 '중세의 일상', '의식주', '사람들', '이름', '경제', '직업', '사랑과 명예', '종교', '오락', '왕과 전쟁'이란 주제별로 묶었다. 원래 전쟁사에 관심이 많던 내게 왕과 전쟁, 사랑과 명예에서 나온 기사도와 관련된 설명이 가장 잘 읽혔다. 또한 윌리엄William, 에드워드Edward, 헨리/앙리Henry, 샤를/찰스Charles, 루이Louis, Otto로 대표되는 중세 왕들의 이름으로 통사를 설명한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이름들이 반복되는 유럽사에서 헷갈리는 대목인데 이 부분의 요점을 정리해줬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q-나 ch-로 시작하는 영단어들은 프랑스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고 이 흔적이 일상어 곳곳에 남아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내가 따로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적이 있다면 아마 이 부분의 설명이 가장 재밌게 다가왔을 것이다. 윌리엄 공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영국의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영어의 고급 어휘들은 프랑스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뜻이 확대되어 평민들이 사용하던 일상어를 조금씩 대체했다. 원래 켈트족이 살고 있던 잉글랜드를 로마, 앵글로색슨, 바이킹, 노르만족이 차지하면서 게르만어군의 한 갈래였던 영어는 이웃 언어들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불규칙한 언어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지금껏 유럽 언어 중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영어만큼 체계성과 규칙성에서 거리가 먼 언어를 마주한 적은 없다. 비록 이 대목이 영어 학습의 가장 큰 난관이지만 영어 속에 숨어있는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루한 문법과 일관적이지 못한 발음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도 영어 속에 살아 숨쉬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알게됐으니 내가 다음에 배워볼 외국어는 역시 프랑스어가 최우선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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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탐사선을 탄 걸리버 - 곽재식이 들려주는 고전과 과학 이야기
곽재식 지음 / 문학수첩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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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이론을 공부하면 마주하는 설명이 내재적 관점과 외재적 관점이다. 내재적 관점은 작품의 구조, 운율, 형식과 같은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반면 외재적 관점은 작가, 현실, 독자 등의 요소를 함께 고려하여 작품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작가-작품-독자-현실을 칼같이 구분하는 건 힘든 일이라 문학에 대한 내재적/외재적 관점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에 주안점을 둬야하는지 입장 차이를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곽재식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말을 곱씹어본다면 그동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관점의 폭을 스스로 제한한 게 아닌가 싶다.


  작가의 말처럼 학문을 문과와 이과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학문이 더욱 심화되고 학제 간의 연구도 활발한 오늘날의 기준에서 기계적으로 문이과를 양분하는 것은 학문 그 자체는 물론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우리에게도 좋지 않은 사고를 심어주기 쉽다. 당장 이 책의 저자인 곽재식 선생님은 공학 박사 출신이다. 글을 쓰기에 비교적 유리하거나 수월한 전공은 있지만, 공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글이 난해하다거나, 아니면 너무 계산적이거나 치밀하다는 생각은 큰 편견이다.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만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게 글을 쓰는 방식인데 성별이나 전공 같은 아주 사소한 단서로 그 사람의 글을 지레짐작하는 건 우리의 사고와 이해를 오히려 가둬놓는 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곽재식 작가의 작품을 검색해보면 빠른 집필 속도와 다양한 장르에 놀랄 수 밖에 없는데 이 책은 저자의 폭넓은 관심사과 지식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흔히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도 하는데, 시대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시대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과학과 기술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고대부터 현대부터 이어지는 문학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시대상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13개의 문학 작품과 그와 연관된 과학 이론과 발명품은 저자의 흥미가 가장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 한다. 책을 순서대로 읽으면 짧은 문학사를 읽는 기분이다. 1장 <길가메시 서사시>와 기후변화에서는 자연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원초적 서사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단서를 제공해준다. 2장 <일리아스>와 금속학, 3장 <변신 이야기>와 콘크리트, 4장 <천일야화>와 알고리즘은 고대와 중세인의 수준이 오늘날과 비교해봐도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의 통찰력이 가장 빛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5장 <수호전>과 시계, 6장 <망처숙부인김씨행장>과 화약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학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중국과 한국의 비교적 낯선 고전을 인용해 각각 송나라와 임진왜란을 독해하는 방식은 새로웠고, 저자의 상식이 얼마나 폭넓은지 신기했다.


  여러 종류의 책을 썼지만 곽재식 작가는 SF를 중심으로 글을 쓰시는 분이다. 7장 <걸리버 여행기>와 항해술, 8장 <80일간의 세계일주>와 증기기관에서는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한 시대 변화가 오늘날 SF의 근간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9장 <오 헨리 단편집>과 전봇대, 10장 <무기여 잘 있거라>와 질소 고정, 11장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자동차는 20세기 초중반의 사회상을 위 작품을 통해 색다른 관점으로 제시한다. 12장 <픽션들>과 냉장고, 13장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와 화성 탐사선에서는 옛날 사람들의 상상력이 점차 오늘날의 현실로 변하고 있는 상황을 얘기하며 상상과 현실 사이의 매개체로서 SF의 역할을 역설한다. 비록 이 책이 본격적으로 SF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과 과학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면서 저자의 말처럼 SF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나 역시 계속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것도 자연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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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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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감각이란 건 사실 그다지 미덥지 못하다. 낯선 대상과 환경에는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카롭게 집중을 하다가도 그것이 반복되면 감각은 점점 무뎌진다. 적응하는 과정이 체화되고, 효율성은 곧 익숙함과 편안함이라는 느낌에 가려진다. 해외여행을 가면 아주 사소한 차이에도 쉽게 반응을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나라, 도시, 마을의 특이점은 쉬이 찾지 못한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기에 일어나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발명품인 도시는 일종의 유기체다.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는 온갖 생명 활동은 분명 실재하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도시를 이루는 수많은 구성 요소도 어지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시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라는 상이한 공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통찰은 어느 한 지점으로 치우치지 않은 채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1부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환경의 차이가 인간의 다른 행동을 끌어낸다는 것이 결론이다. 왜 어떤 차만 정지선을 지킬까. 정지선을 준수하는 운전자들은 단순히 개인의 양심을 떠나서 정지선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된 결과이다. 이 환경의 차이는 신호동의 위치에 기인한다. 프랑스의 신호등은 정지선 앞에서 멈추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한 반면 한국에서는 정지선을 조금 벗어나더라도 다음 신호를 보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국회에서 고성이 오가는 까닭은 마치 원형극장을 연상시키는 위계질서가 내부 구조에 그대로 반영된 탓이다. 서로 마주 앉는 영국의 의사당 구조와 대비된다.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공간의 구획을 더 뚜렷이 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을과 묘지는 각각 삶과 죽음을 나타내기에 엄밀하게 나눠진 곳이고, 서로의 공간을 구분하려는 문화는 한옥 안의 여러 건물과 현대에는 특유의 ‘방 문화’로 이어졌다.

  내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광장과 무덤에 관한 장이었다. 주로 2부 “보이지 않는 도시”에 서술되는 내용인데 1부의 내용을 더욱 확장시킨 느낌이다. 한국에는 왜 유럽처럼 광장이 없냐는 건의가 빗발치자 우리나라에도 광화문 같은 공간이 서구식 광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시를 가로지르는 길이 먼저 형성되고 나머지 공간에 건물이 들어선 서구식 도시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건물이 먼저 생기고 길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점을 이어주는 선과 같은 느낌으로 발달했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길은 일종의 사적 공간의 연장선으로 작용했고 따라서 공적 공간인 광장이 들어설 필요성이 떨어진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상대적으로 희미한 한국과 엄격한 유럽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길의 다른 성격이 선명해진다.

  무덤의 경우 산 자와 죽은 자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게 한국의 문화지만 유럽에서는 묘지를 공원으로 조성하여 접근성을 높였다.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머물 때 도시마다 있는 공원묘지waldfriedhof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하며 일상을 보내는 게 신기했는데, 이들에게는 공원과 묘지가 별개의 공간이 아닌거다. 삶과 죽음은 구분된다고 해도 공간을 굳이 엄격히 나눌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국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머무는 곳이니 말이다.

  비교를 하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그러나 그 차이를 너무 선명하게 드러내다 보면 자칫 자국에 대한 폄하와 한탄, 멸시, 타국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과 추종으로 빠지기 쉽다. 저자도 이런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단순한 비교에서 끝을 낸다. 특별한 해결책을 보여주지 않아도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충분히 던져준다. 말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 많은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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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된다는 것 - 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아닐 세스 지음, 장혜인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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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본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 After Yang>은 고도로 발달한 테크노 사피엔스, 즉 인간과 차이가 없는 안드로이드형 로봇이 대중화된 근미래를 작중 배경으로 한다. 입양된 중국계 딸인 미카가 백인 아버지 제이크와 흑인 어머니 카이라의 슬하에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양은 아주 세심한 마음으로 선택된 안드로이드 '세컨드 시블링스(second siblings)'다. 미카와 양은 같은 중국계 문화와 기억, 그리고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때로는 친남매처럼, 때로는 인간과 로봇 비서처럼 지내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양이 작동을 멈추면서 남겨진 가족은 양의 메모리 칩을 살펴본다. 그 속에는 리퍼된 로봇인 양이 가족들과 만나기 전의 기억부터 주인공 가족들과 지냈던 추억까지, 그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SF의 단골소재인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이 처음 논의되고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 극히 짧지만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즉 인간을 구성하는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의 로봇이라도 결국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인공지능과 기체를 어떻게 연결할지가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구현해내야 하는 셈인데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가시적인 하드웨어에 비해 이를 통제하는 소프트웨어를 무어라 정의하고 개발하기란 훨씬 힘든 일이다. 인간에 최대한 가까운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통찰이 필수적인데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쉽지 않은 책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인간은 '동물기계'같은 존재이기에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 문명이 가장 급속도로 변화했던 근대 시대, 이를 뒷받침했던 근대성의 원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주체성, 자율성, 합리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동물이긴 하지만 여타 동물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러나 최근의 신경과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토록 고상하다고 여겨졌던 인간의 의식은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건 우리 생각만큼 객관적이지 않으며, 지금도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생명 활동을 총괄하는 처리 과정인 것이다. 요컨대 철학에서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던 의식의 문제는 심리학, 생물학, 의학, 화학, 공학 등 온갖 학문이 융합된 신경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로 인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   


  학부 새내기 때 들었던 교양과목인 심리학개론이 문득 떠올랐다. 그 때까지의 내 지식으론 심리학은 곧 프로이트의 학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100년동안 심리학은 무척이나 빠르게 변하여 이제 심리학에는 수많은 제반분야가 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신경과학은 프로이트의 이론과는 아주 거리가 먼, 생물학에 훨씬 더 가까운 학문이 되었다. 신경과학의 핵심 탐구과제는 이 책의 주제인 '의식'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각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각의 메커니즘은 곧 '본다'라는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본다는 능동적인 행위는 사실 빛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반사되는 빛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시각 외에 온갖 감각을 통해 우리가 총체적으로 인지하는 대상은 우리의 의식이 종합적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가깝다는 게 책의 요지다. 의식을 더욱 과학적, 객관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가 역설적으로 우리 의식은 생각만큼 그리 과학적, 객관적이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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