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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탐사선을 탄 걸리버 - 곽재식이 들려주는 고전과 과학 이야기
곽재식 지음 / 문학수첩 / 2022년 7월
평점 :
문학 이론을 공부하면 마주하는 설명이 내재적 관점과 외재적 관점이다. 내재적 관점은 작품의 구조, 운율, 형식과 같은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반면 외재적 관점은 작가, 현실, 독자 등의 요소를 함께 고려하여 작품을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실 작가-작품-독자-현실을 칼같이 구분하는 건 힘든 일이라 문학에 대한 내재적/외재적 관점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에 주안점을 둬야하는지 입장 차이를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곽재식 작가가 서문에서 밝힌 말을 곱씹어본다면 그동안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관점의 폭을 스스로 제한한 게 아닌가 싶다.
작가의 말처럼 학문을 문과와 이과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학문이 더욱 심화되고 학제 간의 연구도 활발한 오늘날의 기준에서 기계적으로 문이과를 양분하는 것은 학문 그 자체는 물론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우리에게도 좋지 않은 사고를 심어주기 쉽다. 당장 이 책의 저자인 곽재식 선생님은 공학 박사 출신이다. 글을 쓰기에 비교적 유리하거나 수월한 전공은 있지만, 공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글이 난해하다거나, 아니면 너무 계산적이거나 치밀하다는 생각은 큰 편견이다.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만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게 글을 쓰는 방식인데 성별이나 전공 같은 아주 사소한 단서로 그 사람의 글을 지레짐작하는 건 우리의 사고와 이해를 오히려 가둬놓는 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곽재식 작가의 작품을 검색해보면 빠른 집필 속도와 다양한 장르에 놀랄 수 밖에 없는데 이 책은 저자의 폭넓은 관심사과 지식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흔히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도 하는데, 시대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지만 시대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은 과학과 기술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고대부터 현대부터 이어지는 문학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시대상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13개의 문학 작품과 그와 연관된 과학 이론과 발명품은 저자의 흥미가 가장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 한다. 책을 순서대로 읽으면 짧은 문학사를 읽는 기분이다. 1장 <길가메시 서사시>와 기후변화에서는 자연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원초적 서사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단서를 제공해준다. 2장 <일리아스>와 금속학, 3장 <변신 이야기>와 콘크리트, 4장 <천일야화>와 알고리즘은 고대와 중세인의 수준이 오늘날과 비교해봐도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의 통찰력이 가장 빛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5장 <수호전>과 시계, 6장 <망처숙부인김씨행장>과 화약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학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중국과 한국의 비교적 낯선 고전을 인용해 각각 송나라와 임진왜란을 독해하는 방식은 새로웠고, 저자의 상식이 얼마나 폭넓은지 신기했다.
여러 종류의 책을 썼지만 곽재식 작가는 SF를 중심으로 글을 쓰시는 분이다. 7장 <걸리버 여행기>와 항해술, 8장 <80일간의 세계일주>와 증기기관에서는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한 시대 변화가 오늘날 SF의 근간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9장 <오 헨리 단편집>과 전봇대, 10장 <무기여 잘 있거라>와 질소 고정, 11장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자동차는 20세기 초중반의 사회상을 위 작품을 통해 색다른 관점으로 제시한다. 12장 <픽션들>과 냉장고, 13장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와 화성 탐사선에서는 옛날 사람들의 상상력이 점차 오늘날의 현실로 변하고 있는 상황을 얘기하며 상상과 현실 사이의 매개체로서 SF의 역할을 역설한다. 비록 이 책이 본격적으로 SF를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과 과학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면서 저자의 말처럼 SF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나 역시 계속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것도 자연스레.
*. 문학수첩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