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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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냐 에세이냐, 이런 장르 구분은 시중에 나온 많고 많은 책 중 우리가 읽을 것을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무언가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르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을 터이다. 좀 더 크게 보아서, 문학, 아니 그냥 글을 마주하는 거다.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태여 고민하기 보다는 내가 읽을 글에 얼만큼 글쓴이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나를 따져보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다. 


  나름 생각의 전환이란 걸 해보아도 그리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덴마크의 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코펜하겐 삼부작 중 첫 번째인 『어린 시절』속에서 나는 토베의 무덤덤한 문체와 대비되는 넓디 넓은 행간의 여백을 읽어내야 했다. 인간의 기억이란 건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하기에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라고 해도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기억과 망각은 한 쌍이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당시의 경험보다 미화되거나 악화되기가 쉽다. 전체 맥락을 기억하기 보다는 어떤 일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그래서 내 기분도 좋았는지 나빴는지 이렇게 단편적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기억이 안고 있는 건 과거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자신의 파편화되고 단편적인 순간의 감정에 가까울 거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석탄과 재냄새가 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당신의 삶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알아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 p.47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는 주인공이 마들렌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훨씬 빨리 피로해지지만 옛 경험도 오래 머금고 있나 보다. 익숙한 냄새를 맡으면서 과거에 빠져드는 건 프루스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자주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냄새라는 게 여간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감각은 자신의 몸에 찍힌 일종의 낙인으로 작용한다. 전형적인 노동자 아버지, 좀처럼 딸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리고 자유분방한 오빠와 함께 자란 작가의 경험은 오랫동안 몸에 붙어 있는다. 전에 읽었던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그리고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처럼 유년 시절의 경험이 인셍 전체의 궤적에 얼마나 큰 흔적을 남기는지 알 수 있었다.


  덴마크 문학도 처음이고, 토베 디틀레우센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아직 너무 낯설다. 얇은 책 한 권이지만, 백 년 전 덴마크에서 자란 토베는 자신의 꿈을 도와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서 접한 온갖 문학책들이 결국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친 거다. 3부작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을유문화사의 암실문고 서포터즈 활동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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