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세계사 - 세 대륙이 만나는 바다, 그 교류와 각축의 인류사
제러미 블랙 외 지음, 데이비드 아불라피아 엮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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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지구의 공간을 정말 넓게 구분하는 표현으로 ‘5대양 6대주’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척도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이 공간들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비록 5대양 6대주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인류 문명의 변천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하나 있다. 이름 그대로 육지로 둘러싸인 바다, 지중해(the Mediterranean Sea)다.

오늘날 전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계가 서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걸 부정하기는 힘들다. 서구, 그러니까 유럽 문명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그리스로마신화라는 정신이다.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유대교의 발상지는 지금의 이스라엘이고, 그리스로마신화는 이집트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 다시 말해 유럽을 형성한 근본은 지중해의 은혜를 입은 셈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유럽이 아시아를 추월하기 시작한 계기로 대항해시대를 통한 팽창을 지목한다.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에 ‘로마의 호수’라고 불리었던 지중해, 그리고 여기에 맞닿았던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는 고대와 중세를 거치며 점차 유럽의 중심부에서 멀어졌다. 지중해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북쪽의 네덜란드와 영국이라는 신흥 해양 세력이 부상하면서 지중해는 더이상 바다의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세계사는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오스만 투르크의 지중해 차단,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란 흐름을 언급하며 지중해를 중심에서 없앤다.

지중해만큼 끊임없이 연결되었던 바다가 근대 이후 역사에서 잊히는 건 내 생각엔 지극히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무엇보다도 지중해의 ‘연결성’이란 특징에 주목하여 8개의 시대 구분을 통해 지중해와 그 연안에서 일어난 방대한 역사적 흐름을 소개한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한 지중해를 단편적인 시선이 아니라 물자의 이동과 교류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시대순으로 살펴볼 수 있는 건 이 책이 각 분야 연구자들이 저마다의 전문 지식을 풀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저작을 모아놓은 책은 많다. 그 와중에 이 책이 보여주는 강점을 꼽자면 데이비드 아불라피아라는 엮은이, 지중해 역사의 전문가 덕분이다. <위대한 바다(The Great Sea: A Human History Of The Mediterranean, 2011)>라는 방대한 분량의 연구서를 집필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서로 다른 성격의 글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있는 아불라피아의 보충 설명은 배경 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는 동시에 앞선 내용의 요점을 충실히 요약해준다. 읽는 이들의 흥미와 수준에 따라 책을 자유로이 읽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충실히 세계사를 배운 사람이라도 오리엔트 문명과 고대 그리스를 연결해 준 페니키아, 그리스와 로마 문명 사이의 교두보를 마련해준 에트루리아 문명은 꽤 낯설지만 책에서는 비중있게 설명해주어 기억에 남는다. 책의 절반 정도는 고대와 중세를 중심으로 지중해 문명의 큰 맥락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를 하지만, 보다 시사적인 텍스트를 원한다면 책 말미의 현대사 부분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라는 서로 다른 문명권으로 둘러싸인 바다, 지중해! 각기 다른 문명이 오늘날까지도 상호작용을 하는 데엔 이 바다의 공로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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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 코펜하겐 삼부작 제2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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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는 ‘인생’을 “B(태어남)와 D(죽음) 사이의 C(선택)”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했지만 토베 디틀레우센에게 주어진 가짓수는 거의 없었다. 겨우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지만 이제 사회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이제 막 학교를 벗어난 청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기껏해야 가정부, 하숙집 청소, 간호용품 재고 관리 같은 게 전부였다. 이런 불안정한 일자리에 가족들이 의지하기 시작하면서 토베는어린 나이에 가장의 책임을 조금씩 느낀다. 


  다른 선택지는 결혼을 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결혼 생활이란 건 좋아하는지도 확신이 채 들지 않는 상대방을 만나고, 온갖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론 덴마크라는 나라는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는 나라지만 당시는 100년 전이다. 토베 디틀라우센이라는 인간은 한 사람의 여성이기 이전에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거다.


  인간은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려고 하는 것조차 결국 운명이란 플롯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게 확고히 정해져 있다는 법이 어디에 있나. 인생이라는 공고한 틀에 균열을 내야 한다. 토베의 인생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건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시인의 삶이다. 시인은 올곧고, 강직하며, 타협하지 않는다. 


 “다만 정말로 간절히, 진짜 시를 쓰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 갖고 싶다. 네 개의 벽이 있고 문이 닫힌 방 안에 있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것처럼 여성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공간, 그러니까 ‘자기만의 방’이다. 한 켠짜리 방이라도 작가는 작품과, 다른 작가와, 세계와 통할 수 있는 통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한결같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토베는 어려서부터 시를 쓰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 청소년이 되어서도 그 꿈은 아직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환경은 예전 같지 않다. 부모는 점점 딸에게 의존하고, 토베 역시 남들처럼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뤄야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내가 아무리 변하고 싶지 않더라도, 정작 나를 둘러싼 환경이 바뀐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청춘이란 건 기실 그리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어중간함 속에서 시간은 그저 흐르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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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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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시대 구분법에 따르면 20세기는 19세기보다 짧다. 그는 일률적인 세기 구분을 지양하고 세기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20세기는 사상 최악의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난 전례없는 세기였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무르익었고, 예술은 모더니즘의 유행으로 기존의 예술과는 단절된 듯 아예 궤를 달리하며 변모했다. 전간기 유럽은 전쟁의 영향으로 쑥대밭이 되었으나 학문의 발전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멀리 대서양 건너 미국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다가 대공황을 촉발시켜 전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변곡점들이 발생한 데에는 채 반백 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의 와중 많은 이들이 세상에 나왔고, 또 세상을 떠났다. 그중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가 있었다. 학부 때 독문학을 전공한 나는 불문학에 무지하다. 엘뤼아르라는 시인도 처음 들어봤다. 내가 아는 프랑스 시인이라면 라신, 몰리에르, 랭보, 보들레르 정도 뿐이고 그마저도 작품은 접한 적 없이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다.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그 두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어는 언젠가 한 번 배워봐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시가 가장 어려운 문학인 걸 알면서도, 엘뤼아르라는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음에도,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함에도 그의 시 선집을 구태여 찾아서 읽은 이유는 왠지 모를 끌림, 그것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듯 싶다. 


  병약한 체질,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의 교류, 좋지 않은 건강에도 참전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의 기치를 노래한 시인... 시인이 고심 끝에 고르고 고른 시어는 짧디 짧지만 시인의 관념은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다(나는 바람의 지붕 위를 활주하네 / 나는 바다의 지붕 위를 활주하네 / 나는 감정이 풍부해졌지 - <말> 중에서). 모든 감각이 무너지는 초현실에 탐닉하는 와중에도 그는 무언가 근원적인 것에 집착했다(너는 순수해, 너는 여전히 나 자신보다 더 순수해 - <언제나 함께 있는, 전부인 그녀> 중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예찬하기도 했고(그 해는 풍요롭다 대지는 부풀어 오른다 / 하늘은 벌판에 넘쳐흐른다 - <나무-장미> 중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부르짖었다(나는 너를 알기 위해 태어났다 / 네 이름을 부르기 위해 // 자유여. - <자유> 중에서)


  낯선 시인의 언어에서 내가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던 건,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면모를 층층이 겹쳐볼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국문학으로 예를 들자면 모더니스트 이상, 소극적 저항 시인 한용운, 윤동주, 그리고 적극적 저항 시인 심훈, 이육사 등으로 치환할 수 있을 거다. 보라, 한 사람은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의 범주는 실로 한 사람을 뛰어 넘는다. 한 시인의 생애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골라내기 위해 석사, 박사 논문을 모두 엘뤼아르와 함께 한 역자가 얼마나 신경 썼을지 차마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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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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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냐 에세이냐, 이런 장르 구분은 시중에 나온 많고 많은 책 중 우리가 읽을 것을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다. 무언가를 엄밀히 정의하는 것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르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을 터이다. 좀 더 크게 보아서, 문학, 아니 그냥 글을 마주하는 거다.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태여 고민하기 보다는 내가 읽을 글에 얼만큼 글쓴이의 생각이 투영되어 있나를 따져보는 게 좀 더 쉬울 것 같다. 


  나름 생각의 전환이란 걸 해보아도 그리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덴마크의 작가 토베 디틀레우센의 코펜하겐 삼부작 중 첫 번째인 『어린 시절』속에서 나는 토베의 무덤덤한 문체와 대비되는 넓디 넓은 행간의 여백을 읽어내야 했다. 인간의 기억이란 건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하기에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라고 해도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기억과 망각은 한 쌍이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당시의 경험보다 미화되거나 악화되기가 쉽다. 전체 맥락을 기억하기 보다는 어떤 일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그래서 내 기분도 좋았는지 나빴는지 이렇게 단편적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기억이 안고 있는 건 과거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한 자신의 파편화되고 단편적인 순간의 감정에 가까울 거다.

 

  "당신은 당신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당신이 어딘가에 서서 석탄과 재냄새가 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소녀가 당신의 삶이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알아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다." - p.47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에는 주인공이 마들렌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후각은 다른 감각보다 훨씬 빨리 피로해지지만 옛 경험도 오래 머금고 있나 보다. 익숙한 냄새를 맡으면서 과거에 빠져드는 건 프루스트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자주 접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냄새라는 게 여간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감각은 자신의 몸에 찍힌 일종의 낙인으로 작용한다. 전형적인 노동자 아버지, 좀처럼 딸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어머니, 그리고 자유분방한 오빠와 함께 자란 작가의 경험은 오랫동안 몸에 붙어 있는다. 전에 읽었던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그리고 J. 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처럼 유년 시절의 경험이 인셍 전체의 궤적에 얼마나 큰 흔적을 남기는지 알 수 있었다.


  덴마크 문학도 처음이고, 토베 디틀레우센이라는 작가의 이름도 아직 너무 낯설다. 얇은 책 한 권이지만, 백 년 전 덴마크에서 자란 토베는 자신의 꿈을 도와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서 접한 온갖 문학책들이 결국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친 거다. 3부작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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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단어로 읽는 중세 이야기 - 어원에 담긴 매혹적인 역사를 읽다
김동섭 지음 / 책과함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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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학원에서 알바를 한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학생들의 단어 시험을 봐주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인데 고등학생들이 보는 영어 단어장 중에는 어원을 기준으로 단어를 나누어 단어의 뜻을 쉽게 파악하고 암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오늘날 영어는 명실상부한 세계공용어lingua franca이고, 한국에서 영어는 곧 권력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어와 영어는 도무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언어이기에 학습의 과정이 지난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자료 중에는 미국 외교부에서 선정한 언어 중 가장 배우기 힘든 언어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꼽혔다고 한다. 미국인 기준으로, 영어와 가장 거리가 먼 언어가 한국어와 일본어이고, 그래서 미국인들에겐 두 언어가 그만큼 학습 난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 학습에는 절대적인 난이도보다는 모국어와의 유사성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기에 한국인이 한국어와는 글자도, 문법 체계도 모국어와는 너무도 상이한 영어를 배우기 어려워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부에도 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 한자를 알고 있으면 모르는 단어의 뜻을 수월하게 유추할 수 있다. 한국어 어휘의 상당수는 한자어이고, 한자를 알면 동음이의어도 맥락별 용법을 쉬이 알기 때문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문법과 발음에 온갖 예외가 많은 것은 그만큼 영어에 많은 언어들이 뒤섞여 일관성을 잃은 탓인데, 복잡한 영어의 역사에도 중심이 되는 변곡점은 존재한다. 『100단어로 읽는 중세이야기』에 따르면 영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어이고, 프랑스어의 영어로의 유입은 중세에 두드러졌다.


  역사학에서 시대 구분의 기준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중세의 시작은 476년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 중세의 끝은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구 문명의 근간이었던 로마 제국의 명맥이 불완전하게나마 지속됐던 시기가 바로 중세인 것이다. 하지만 1453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외에도 역사적 사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당시 서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1337년부터 이어졌던 백년전쟁이 종식되었던 것도 같은 해에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워낙 중요한 사건이라 책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한 내용인데 1066년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윌리엄 1세로 즉위하였다. 즉 잉글랜드 왕은 공교롭게도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 헨리 2세가 프랑스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던 아키텐 지방의 상속녀 엘레오노르와 결혼을 하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가져가 프랑스로서는 더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명목상 신하였던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이러니로 인해 116년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두 로마 제국의 멸망 사이엔 십자군전쟁과 백년전쟁같은 굵직한 전쟁도 있었지만 중세하면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종교, 즉 기독교다. 중세의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생활 전반과 사람들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개념이었다.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성경Bible은 고대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이시스로부터 출발하여 페니키아의 비블로스Biblos 왕국, 고대 그리스에서 파피루스를 통칭하던 단어 biblos의 뜻이 확대되어 결국 책 중의 책인 '성경'이 되었다. 책은 100개의 단어를 세분화하여 '중세의 일상', '의식주', '사람들', '이름', '경제', '직업', '사랑과 명예', '종교', '오락', '왕과 전쟁'이란 주제별로 묶었다. 원래 전쟁사에 관심이 많던 내게 왕과 전쟁, 사랑과 명예에서 나온 기사도와 관련된 설명이 가장 잘 읽혔다. 또한 윌리엄William, 에드워드Edward, 헨리/앙리Henry, 샤를/찰스Charles, 루이Louis, Otto로 대표되는 중세 왕들의 이름으로 통사를 설명한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비슷한 이름들이 반복되는 유럽사에서 헷갈리는 대목인데 이 부분의 요점을 정리해줬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q-나 ch-로 시작하는 영단어들은 프랑스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고 이 흔적이 일상어 곳곳에 남아있다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내가 따로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없지만 프랑스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적이 있다면 아마 이 부분의 설명이 가장 재밌게 다가왔을 것이다. 윌리엄 공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영국의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영어의 고급 어휘들은 프랑스어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뜻이 확대되어 평민들이 사용하던 일상어를 조금씩 대체했다. 원래 켈트족이 살고 있던 잉글랜드를 로마, 앵글로색슨, 바이킹, 노르만족이 차지하면서 게르만어군의 한 갈래였던 영어는 이웃 언어들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불규칙한 언어의 대표 주자가 되었다. 지금껏 유럽 언어 중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영어만큼 체계성과 규칙성에서 거리가 먼 언어를 마주한 적은 없다. 비록 이 대목이 영어 학습의 가장 큰 난관이지만 영어 속에 숨어있는 역사를 배우는 것은 지루한 문법과 일관적이지 못한 발음을 학습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도 영어 속에 살아 숨쉬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알게됐으니 내가 다음에 배워볼 외국어는 역시 프랑스어가 최우선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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