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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시대 구분법에 따르면 20세기는 19세기보다 짧다. 그는 일률적인 세기 구분을 지양하고 세기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20세기는 사상 최악의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난 전례없는 세기였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무르익었고, 예술은 모더니즘의 유행으로 기존의 예술과는 단절된 듯 아예 궤를 달리하며 변모했다. 전간기 유럽은 전쟁의 영향으로 쑥대밭이 되었으나 학문의 발전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멀리 대서양 건너 미국은 유례없는 황금기를 구가하다가 대공황을 촉발시켜 전세계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변곡점들이 발생한 데에는 채 반백 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그 사이의 대공황의 와중 많은 이들이 세상에 나왔고, 또 세상을 떠났다. 그중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가 있었다. 학부 때 독문학을 전공한 나는 불문학에 무지하다. 엘뤼아르라는 시인도 처음 들어봤다. 내가 아는 프랑스 시인이라면 라신, 몰리에르, 랭보, 보들레르 정도 뿐이고 그마저도 작품은 접한 적 없이 이름만 들어봤을 뿐이다.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그 두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랑스어는 언젠가 한 번 배워봐야겠다고 생각만 했다. 시가 가장 어려운 문학인 걸 알면서도, 엘뤼아르라는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음에도, 프랑스어를 전혀 알지 못함에도 그의 시 선집을 구태여 찾아서 읽은 이유는 왠지 모를 끌림, 그것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듯 싶다.
병약한 체질,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의 교류, 좋지 않은 건강에도 참전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의 기치를 노래한 시인... 시인이 고심 끝에 고르고 고른 시어는 짧디 짧지만 시인의 관념은 아스라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다(나는 바람의 지붕 위를 활주하네 / 나는 바다의 지붕 위를 활주하네 / 나는 감정이 풍부해졌지 - <말> 중에서). 모든 감각이 무너지는 초현실에 탐닉하는 와중에도 그는 무언가 근원적인 것에 집착했다(너는 순수해, 너는 여전히 나 자신보다 더 순수해 - <언제나 함께 있는, 전부인 그녀> 중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예찬하기도 했고(그 해는 풍요롭다 대지는 부풀어 오른다 / 하늘은 벌판에 넘쳐흐른다 - <나무-장미> 중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부르짖었다(나는 너를 알기 위해 태어났다 / 네 이름을 부르기 위해 // 자유여. - <자유> 중에서)
낯선 시인의 언어에서 내가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던 건,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면모를 층층이 겹쳐볼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국문학으로 예를 들자면 모더니스트 이상, 소극적 저항 시인 한용운, 윤동주, 그리고 적극적 저항 시인 심훈, 이육사 등으로 치환할 수 있을 거다. 보라, 한 사람은 더 이상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의 범주는 실로 한 사람을 뛰어 넘는다. 한 시인의 생애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골라내기 위해 석사, 박사 논문을 모두 엘뤼아르와 함께 한 역자가 얼마나 신경 썼을지 차마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 을유문화사의 서평단 모집에 당첨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