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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속의 영원 -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
이레네 바예호 지음, 이경민 옮김 / 반비 / 2023년 3월
평점 :
최근 중세 1000년을 단순히 모든 것이 신학에 매몰되었던 시기, 게르만 신화와 체계를 중심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꽤 보인다. 그렇지만 결국 서양 문명의 근본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있다. 사실 그리스와 로마를 얼핏 비교하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두드러진다. 내륙에 산지가 워낙에 많았던 탓에 헬라스 반도에 있었던 도시들은 한 나라 속 도시가 아닌 각자 특징을 발전시켜 도시 국가로 기능했다. 육상 교통 대신 배를 이용하여 해상으로 활발히 진출했다. 농사가 부적합한 곳이었기에 상업이 중심이었다. 반면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지배 영역을 확장할 때마다 잘 닦은 도로를 만들어 육상 교류를 원만히 했다. 새로 정복한 곳에는 포도를 재배해 와인을 보급했다. 이렇게 다른 게 많은 두 문명을 한 데 모아 지칭하는 데엔 결국 상이한 문명을 공통으로 묶어주는 정신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책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스에서 로마로 서구 문명의 주도권은 넘어갔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로마식으로 이름을 바꾸어 여전히 로마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본디 신화는 구전되던 것이다. 그러나 구전에만 의존하다 보면 내용이 변주를 넘어 왜곡되거나 아니면 아예 전승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 인간이 언제부터 언어를 사용하고, 문자를 발명해 기록을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순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인간이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가 책이라는 대상과 결합해 이동성과 전파력을 갖춘 후부터, 인간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은 분명하다. 동굴 벽이나 바닥, 점토판을 거쳐 식물을 가공해 만든 종이, 그리고 그것을 엮어 만든 책에는 그래서 책에 기록된 내용을 넘어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리스 문명을 헬라스 반도를 넘어 전세계급 문명으로 성장시키는 데에 공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 그리고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에게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록물을 입수해 거대한 도서관을 자랑했던 알렉산드리아에 얽힌 일화는 그나마 다른 책에서도 조금씩 접한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다만 이 책에는 그런 유명한 일화 외에도 이름 모를 전령, 서적 상인, 이교도들이 어떻게든 기록을, 지식을 보전하려 했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데메트리오스라는 인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서 업무를 처음 창안하고, 도서관 분류를 체계화하여 책을 종류별로 분류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온갖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듯, 데메트리오스 역시 책을 생물처럼 나눠놓았다. 카오스(chaos)가 코스모스(cosmos)가 된 순간, 실로 아름답다.
문자 매체보다는 영상 매체가 우월해지고, 독서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책의 종말을 예측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통계 수치로 판단한다면 책이 예전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은 책 말고도 다른 재미난 일이, 소통 수단이, 기록 매체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책이 완전히 다른 걸로 대체될 거라 생각친 않는다. 책이란 매체엔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사연이 얽혀있고, 인간의 물질계와 정신계를 이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물이고, 그렇기에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는 물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무언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갈대로 만든 책에 영원을 담는다는 건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헌사다. 도서관의 날과 책의 날이 있는 4월에 이 책을 접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독서였다.
"아, 하늘이 양피지고 바다가 잉크라면 좋았을 것을." - p.101
*. 반비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 모집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