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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평점 :
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아내고 비교적 늦은 시기에 인위적으로 세워진 나라, 미국이다. 영국 출신 이주민이 주류를 이루긴 했지만 미합중국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선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전 세계 각지에서 미국으로 온 사람들은 '신대륙'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미국인'으로 묶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정체성이 과거를 모두 지우지는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구별짓기'는 인간의 오래된 본능 아니던가. 인간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건만, 출신은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요소다.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걸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같은' 미국인이지만 정말로 '같지는' 않았다. 미국인이라는 정체성 뒤에는 으레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뒤따라 붙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2세대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꼬리표는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어졌다. 근대에 '국민 국가(nation-state)' 개념이 자리잡고,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의거하여 많은 나라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세기에도 곳곳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1948년에야 비로소 제 나라를 가진 유대인이 받은 핍박과 설움은 엄청났다. 유대인이 많은 민족으로부터 멸시를 받은 건 오래됐지만, 2차 대전 중에는 파시즘이라는 광풍 속에서 민족이 절멸당할 위기를 겪었다. 온갖 멸시를 당한 유대인이 끝내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에는 단연 유대교라는 민족 고유의 종교를 꼽을 수 있다.
엄격한 유대교 교리를 지키진 않지만 모리스는 유대인 정체성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생계가 어려운 와중에도 꿋꿋하게 양심을 지키고 선의를 베푸는 모리스는 칸트가 주장한 정언명령 그 자체를 체화한 듯하다. 강도를 당해 모리스는 다치고, 가게에도 피해가 생긴다. 그러나 강도에 가담했던 프랭크가 모리스에게 빚진 마음을 느끼며 가게에서 일을 시작한다.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가게에서 돈을 조금씩 빼돌리는 일탈을 일삼던 프랭크가 감화되는 건 모리스의 딸 헬렌 덕분이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인물 사이에 공고했던 일종의 장벽이 서서히 옅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에게 공감을 한다면, 구태여 '구별짓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