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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데어라 혼 지음, 서제인 옮김, 정희진 해설 / 엘리 / 2023년 4월
평점 :
[죽은 유대인들은 우리에게 세계의 이름다움과 구원의 놀라움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그들을 죽이는 일의 의미가 뭐란 말인가? 그것이 죽은 유대인들의 쓸모다! - p.139]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아니 인류 역사상 전례없었던 사건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의 뇌리에 이 사건이 각인된 이유는 인간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끔찍하고 조직적인 대량학살이 반복돼선 안된다고 동의하며, 이 사례를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게 유대인이 겪었던 씻을 수 없는 상처는 이제 우리에게 교훈이 되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뒤로한 채.
[그렇다, 모든 사람은 홀로코스트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홀로코스트에 못 미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홀로코스트는 아니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장벽이 제법 높다. - p.288]
하지만 홀로코스트가 전례없는 규모로 일어났다고 해서 아무 징조없이 갑자기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오랫동안 유대인은 온갖 이유로 박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살아있는 동안 쓸모없는 민족이었다. 그렇지만 죽고 나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대인의 죽음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목숨은 통계 수치로, 그리고 교훈으로 바뀌면서 철저히 ‘대상화’된다.
유대인이고 히브리어와 이디시어 문학을 깊이 전공한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역사 속 온갖 유대인 혐오 사례가 있다. 모든 내용이 내게 낯설고 새로웠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서 야물커를 쓸 수 없었고, 유대인이 건설한 하얼빈에서 추방당했고, 소련에서 이용당하다가 박해받았고, 대중 매체 속에서 철저히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묘사되고, 미국 사회 속에 녹아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유대인 성을 바꿔야 했고, 전쟁을 피해 목숨 걸고 멀리 이민을 떠나야 했고, 세력 다툼에 유대교가 발생한 중동에 발붙일 수 없었다.
[반유대주의는 기본적으로 음모론이고, 음모론의 한 가지 매력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어려운 의무를 쉬운 파괴 충동으로 대체하면서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서 책임을 면제해준다는 점이다. 반유대주의적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광기 어린 음모론들은 진짜 자유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다. 그것은 독재자에 대한 애호이자 자신과는 다른 생각에 대란 혐오이고, 무엇보다도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책임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다. 유대인들을 받아들이는 사회들은 번영을 누려왔다. 유대인들을 거부하는 사회들을 쇠약해져 역사의 밤 속으로 사라졌다. - p.177]
이 책이 단순히 과거 사례를 모아놓은 건 아니다.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 년의 고독>은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몇 년이 지나 총살을 당하게 된 순간,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오래전 어느 오후 아버지에게 이끌려 얼음 구경을 하러 간 일을 떠올렸다.” 한 문장 안에 과거, 현재, 미래시제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책도 단순히 과거를 넘어 그 사례를 능동적으로 현재와 미래로 연결짓는다. 책 중간중간에 삽입된 ‘죽은 미국계 유대인들 1, 2, 3>에선 피츠버그, 샌디에이고, 저지시티에서 발생한 유대인 대상 테러를 언급하며 유대인 혐오가 현재 진행형인 걸 보여준다. 마치 힙합 앨범 중간중간에 삽입된 skit이 트랙 사이를 연결해 앨범 전체에 통일성, 일관성, 유기성을 부여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백미는 11장이다. 당시 10살이던 아들이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베니스의 상인>을 궁금해하자 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유대인, 작가, 엄마로서 정체성을 어떻게 충돌시키지 않을지 고심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오래전도 아니고 멀지도 않은“ 이 혐오를 어떻게 미래 세대에게 설명해줘야 할까.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찰나이지만 미래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오랫동안 쌓인 해묵은 시선을 한순간에 바꿀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회에서든 유대인의 존재는 자유라는 것이 가능하지만 오직 책임이 따를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전혀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준다. - p.176-177]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는 서로에 대한 책무 앖이는 의미가 없다. 시민으로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 세대를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헌신 없이는, 자유의 시작이란 곧 책임의 시작이다. 우리의 경계의 밤은 이미 시작되었다. - p.177]
*. 엘리 출판사에서 모집한 엘리지식탐구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