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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어왕

suy_65


  한 때 자해를 하곤 했다. 기껏 그래봤자 커터 칼 같은 우스운 것 따위로 왼쪽 손목 안쪽을 여러 차례 그어 내리는 것이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에 죽고 싶어서 그었고, 다음엔 살고 싶어서 그었다. 처음에는 새까만 새벽까지 혼자 숨죽여 울다 지쳐 너덜거리는 얼굴로 그으면, 심장은 머리 뒷골이 울리도록 거세게 발버둥을 처대서 마치 귓불까지 들썩이는 느낌이 들곤 했고 바들거리며 얕게 떨리는 손끝엔 두려움이 살아있었다. 다음엔 이미 짠 기에 흠뻑 찌들어 빡빡해진 얼굴은 어떤 표정도 담지 못한 채, 소독해서 미리 준비한 칼로 손목을 그었다. 피가 흐르면 잠깐 보다가 깨끗이 닦은 후 갈라진 상처에 소독하고 밴드를 붙었다. 그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마음과 머리에 힘이 빠져 편안하게 잠들었다. 죽으려고 했던 것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몇 번씩 반복되었고, 그 당시엔 자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사실 자해였음을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죽은 사람과 같은 나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평범한 방법이었을 뿐이었다. 뛰는 맥박을 확인하고 나면 하루 종일 바글바글 뜨겁게 끓던 냉각수가 차분히 식어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것을 전혀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자해의 이유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니었고, 의식적으로 숨긴 것도 없지 않았으니까. 아주 나중에 내가 직접 보여주며 얘기하기 전까지, 매일 아침 마주앉아 정수리와 어깨를 맞대고 식사를 했지만 어머니조차 아무것도 알지 못 했다. 비몽사몽한 당신의 정신 하나 차리기 정신없는 아침에, 피로에 젖어 가라앉는 몸뚱이와 계속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 그 사이 칙칙하고 좁은 시야로 나의 그 작은 구석을 날카롭게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아주 나중에, 보여주기 위해 내민 나의 손을 어머니는 꼭 잡았다. 엄마도, 나도 울었다. 엄마는 꾹꾹 삼키며 울었고, 나는 펑펑 목 놓아 울었다. 엄마는 악착같이 눈물을 잡아내며 그 순간의 내 얼굴과 표정과 눈빛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또렷이 떴고, 나는 눈을 감고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그 속에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주 평범한 가장이었다. 살림과 육아는 엄마가 담당했으니, 이런 것에 무뚝뚝했으며, 알아서 잘 하겠지, 널 믿는다는 그런 생각으로 결국엔 수수방관하는, 유독 독특하고 특이한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우리의 아버지였다. 너무 평범해서 내가 그 길을 나아가기 위해 내딛는 수많은 걸음걸음에 아버지는 어떠한 한 마디로도, 눈빛으로도, 토닥임으로도, 어떠한 형태로도, 형상으로도 없었다. 혹여나 내가 놓친 게 아닐까 고개를 내빼고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아주 나중에 아버지는 변명하듯 나를 바라보지 않고 괜히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면서 선명하지 않게 흘리며 말했다.

  '원래 그땐 다 누구나 그래.'

  그것이 아버지의 전부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어떠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어떠한 자식으로서 믿었는지 결코 모르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모르는 아버지만의 어떠한 신념으로 가만히 지켜만 본 것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단지, 그저 수많은 발자국을 찍으며 걸어온 나의 그 긴 길을 돌아봤을 때, 아버지의 발자국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쌉쌀할 뿐이다. 잘 지내다가도 문득 문득 퍼지는 그 쌉쌀함은 입맛을 차게 할 뿐이다.

  리어왕의 첫째와 둘째의 혀는 나의 이 쌉쌀함보다 더 독한 씁쓸함에 익숙했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의 그 씁쓸함에 그 둘의 혀는 굳어갔을 것이다. 사실 저 두 딸이 원했던 것은 넓은 땅덩어리와 많은 유산보다 아버지의 진심과 진실을 담은 말과 대화, 마음을 헤아려주는 작은 토닥임 따위가 아니었을까. 혹은 그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욕쟁이 할아버지 저리가라 급의 리어왕의 언행과 성마른 성미, 수용은 둘째치고 듣지도 않는 고약한 아집들이 저 두 딸의 이미 굳어버린 혀를 산산조각 내어 서로를 찌르게 만드는 칼이 된 것이 아닐까.



/그외 이야기


  우선 연극에 대해서 할 말이 너무 많아요. 그치만 귀에서 피나면 안되니까 최대한 조절을 할게요. 귀 소중해.

  단지 '리어왕'을 성과 악에 대한 대답,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작품으로 두리뭉실하게 굴려 넘어가기엔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아요. 특히나 현실적으로 와닿지도 않고요. 그래서 저의 관점으로는 기존에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포인트보다 다른 포인트들이 눈에 보였고 체감적으로 감각하면서 봤어요. 두 딸이 선을 넘어 미쳐 돌아가는 막장 스토리 요소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건 리어왕을 비꼬는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리어왕의 언행과 성미가 환장이었어요. 근데 또 더 환장이었던 것은 현실에도 저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 후반부로 갈수록 두 딸이 선을 넘어 막장으로 향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는데, 좀 너무 극적인 요소 같다는 느낌이 확 들더라고요. 살짝 권선징악을 짜맞춰야 하니까, 나쁜 놈 완전 나쁜 놈으로 만들고, 착한 놈 진짜 착한 놈으로 만들자! 의도가 너무 보였달까요. 참 셰익스피어는 타고난 극작가였던 거죠.

  리어왕이 조금이라도 두 딸에게 막내한테 하는 것의 절반이라고 해줬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후반부에 두 딸이 남자에게 과도하게 목을 매는 모습이 나오는 것도 저는 뭐랄까 아버지로부터의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지 못해서 발현되는 결핍의 한 모습과 같다고 느꼈어요. 저도 저런 아버지의 어쩌면 어느 아버지나 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하고 뻔하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또 다른 상처를 받아 여전히 품고 있잖아요. 절대 잊을 수 없죠. 그래서 저 두 딸은 더 비참했겠구나 싶어더라고요.

  아, 자해와 관련해서는 앞서 썼던 <야, 나도 그래.>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 이유였어요. 그때 참 힘들기도 했고, 많이 성장도 했고,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결국 내 몸뚱이의 한 조각이 되어서 지금의 내가 된 것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 그래서 더 소중한 것,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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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태양

suy_65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괴롭다고 했다. 자꾸 자신과 남을 평가하고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며, 좋지 않은 것임을,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분명 커다란 전체의 아주 작은 조각의 부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리를 끊어내지도 못하는 자신이 싫고 한심해서, 짜증이 나고 괴롭고 무기력하다고. 이런 자신이 싫다고 했다.

  저것에 참 많이도 방황했었다. 그것은 외모가 되기도, 내면이 되기도 했으며, 재력이 되기도, 직업이 되기도 했다. 어떠한 신념이나 사상이 되기도, 아주 작고 하찮을 어떤 행동이나 습관, 누군가의 버킷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내 주변에 있길 바랐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곳으로 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 곳은 분명히 더 행복해 보였으며, 더 낫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였다. 분명히 내가 가지고 있고 쥐고 있는, 허나 당시 나의 것인지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은 그런, 나의 것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마치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숴!어느 배우의 대사처럼 나도 저렇게 되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가질 수 있는,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 채, 아니, 애초에 무엇을 그렇게 가지려고 했는지도 모른 채, 불빛에 달려드는 눈 먼 나방이었다.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따라했고, 무작정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나를 괴롭혔다. 그 곳은 완벽해보였고 나는 모자랐으며, 그 곳은 빛나보였고 나는 칙칙했으며, 그 곳은 화려해보였고 나는 초라했다. 나를 뒤돌아보고 돌보기도 하며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 곳만 봤고 그 곳의 발자국을 따라 밟으며 그 곳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것은 결핍이었다. 특정한 부분에 대한 결핍이 아닌 나 자체에 대한 이해의 모자람. 두껍게 가면만 쌓아올릴 줄만 알던 나는 나의 민낯을, 나체를 볼 줄 몰랐다. 두려움이었고, 낯선 것에 대한 불편함과 어색함이었고, 본질은 사회 학습과 매체 미디어를 통한 세뇌의 결과였다. 눈을 마주하고 끄덕이며 털고 일어나는 것보다 탓을 돌리는 것이 더 쉬웠다. 소독제로 치료를 시작하는 것보다 환각제를 먹고 고통을 잊은 채 잠에 취하는 것이 더 쉬운 법처럼. 효과는 강력했고,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상상하는 그것들이 손이 쥐어질 것처럼 망상에 빠지곤 했다. 진짜 다 나아질 것 같은데, 다 해결될 거 같은데. 결핍을 마주하는 두려움이 클수록, 상상 속 소독제의 쓰라린 고통에 지레 겁을 많이 먹을수록, 그 망상은 더욱 달콤하다. 그저 숨을 쉬고 싶었을 뿐인데. 그렇게 계속 가라앉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알 하나 보이지 않는, 짙은 푸른색은 어느새 새까만 검은색이 되어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발에는 무거운 추가 달려있는 것처럼, 족쇄로 묶인 것처럼 상처와 고통이 달려있어서 더욱 가라앉게 했다. 그렇게 계속 탓만 하며 내려앉는 몸을 놓고 있었다.

  순류를 찾는 역류는 작은 파동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 손끝을, 발끝을, 온갖 나의 살갗을 감싸서 나를 삼켜내는 그 검정색의 물결에 얄팍한 파동을 만들어냈는 것. 물결을 통과해서 내 동공에 닿는 저 빛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 느낌을 걷어내고, 그 빛을 향해 거품을 만들어내는 남의 파동을 바라만 보는 망상을 끊어내고, 당장 잡히는 물결을 일어서 헤엄쳤다. 작은 파동, 작은 물결, 작은 거품, 그렇게 커다란 나의 움직임은 검은 색의 역류를 만들어냈다. 이거였다. 단 한마디면 될 것을, 단 한 번의 눈 맞춤이면 될 것을, 그렇게 단 한 번의 끄덕임이면 될 것을 오랜 시간 몰랐다. 아니, 오랜 시간 외면했다. 모르는 척 그렇게 무시한 채 어떻게든 겹겹이 덮어 숨기고만 싶어서 남의 가면까지 끌어왔었다.

  한 대사가 이 글을 끌었다. 인간의 모든 결함을 월등히 초월한 녹스 후지타를 향해 기존 인간인 데츠이코는 그 초월성에 대한 맹목적인 선망과 추앙을 하며 환상을 내뱉는다. 그들에게도 초월의 대가로 태양을 마주보지 못하는 절망이, 효율과 이성의 지배에 질식당한 감정의 상실이 있지만 데츠이코는 당장 자신의 결함과 절망만으로 자신의 존재 부정하며, 당장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녹스가 되는 것뿐임을 울부짖는다. 그런 그를 향해 후지타는 차갑게 절규한다. “이런 네가 녹스가 된다고 뭐가 바뀔 거 같아?”

 

 

/이외 이야기

 

  조금 글이 늦었어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음, 하나의 글쓰기 발달 과정이랄까요. 느낌적인 느낌의 표현이지만 제가 그렇게 느끼니까요. 아, 최근 새로운 소식으로는 제가 '브런치'라는 플랫폼에도 서재의 글을 업로드한다는 거죠. 다를 것은 1도 없어요. 그냥 여기는 놀이터라면, 저기는 정돈된 산책길 정도의 차이랄까요. 이렇게 글 쓰는 게 저를 숨쉬게 만드니, 참 신기하네요.

  저 연극을 본지는 꽤 되었어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한 대사가 진하게 마음에 계속 남는 거예요. 이해가 되었고 공감이 되어서 초원하기도 하고 아련도 했달까요. 마치 예전에 썼던 나의 일기장을 본 듯한 그런 여운처럼요. 예전에 비교를  참 많이 했었어요. 뭐 비교가 문제는 아니죠. 비교로 나를 괴롭히는 게 문제죠. 극심하게 살을 빼기를 반복했었고, 남을 한없이 부러워만 하면서 내가 나를 어찌나 못난이 취급을 했던지요.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미운 기억은 결코 아니예요. 오히려 그 길을 걸어 봤기에 지금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제 신념이나 마인드이기도 한데요. 바꿀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바꾸되,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냥 안아줘라. 딸랑 나 하나라도 완전 충분하니까. 누가 안아줄까 생각하지만 말고 스스로 안아줘요. 이렇게나 까다로운 내가 안아준 것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것일 테니까. 물론 넌 너고 난 나다는 토핑까지 올리면 환상이죠.

  그래서 지금은 비교말고 영감을 얻어요. 더 나은 나를 위해서 말이죠. 악, 이런 말 하니까 제가 뭐 막 주름 잡는 거 같아서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데, 진짜 그냥 전 말하는 감자거든뇽. 그냥 말하는 감자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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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일의 기쁨과 슬픔

suy_65

 

  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그 미묘하고도 흐릿한, 그러나 명백히 선명한 경계를 민감하게 경계한다. 저 둘은 다르다. 그러나 얼핏 보면 엇비슷하다. 지상에 반사되어 나타나는 빛깔은 항상 찰나기에. 그 찰나의 빛깔을 담은 눈을 감고 눈꺼풀아래에 남은 빛의 잔상을 되감아야, 그 여리고 가냘픈 경계를 겨우 잡아낼 수 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빛의 잔상을 되씹어본다. 대견한 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순간을 잡고, 어느 날은 한없이 부끄러운 한숨을 내쉰다. 복잡한 머리를 더욱 어지럽히기도 하며, 번뜩 커다란 번개가 그 자리를 휩쓸고 깔끔한 상쾌함을 선사하곤 한다. 그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경계는 우습게도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 경계의 커다란 기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가, 주지 않는가. 그 경계는 참으로 미묘하고도 명백히 선명하다. 밑에 깔린 환경과 상황과 상대와 그 관계의 복잡함과 명백함, 각자의 위치. 얽히고 얽힌 토핑을 얹어야 비로소 완성이니까.

  한 직원이 제안한 부탁을 거절했다. 내가 감당하기에 뻔히 어려운 것이었고, 꾸역거리며 삼켜낼 과중의 아찔함이 보였으며, 상식적으로 그러한 부탁을 받아 줄 경력도, 입장도, 위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의 의견과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으며, 한없이 외로웠던 이 자리를 온기로 채우기 위해 흘렸던 나의 많은 눈물과 절박했던 발버둥의 기억을, 그 직원은 자신의 편의와 이익에 눈이 가려 보지 못했다.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거절했다. 거절했고, 나는 그 직원에게 이기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당황이 머리를 후덥지근하게 덥혔다. 후끈한 허공에 끈적거리는 생각이 생각을 물고 얽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빙글빙글 도는 생각의 중심을 바로 잡으려 혼자서 한참을 애썼다. 그렇게 바람이 불어왔고, 바람이 몰고 온 신선한 공기의 흐름은 후덥지근한 공기덩어리를 쓸어냈다. 깔끔한 산뜻함이 생각의 중심을 잡아 눈앞에 들이댔다. , 차라리 이기적일래. 오히려 좋네. 직장에서 이기적이라는 말.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분명히 나눌 필요가 있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모여 앉아있는 공적의 영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마주보고 얼굴을 쓰다듬는, 서로의 상처를 내비쳐 토닥이는, 가만히 아무 말 없어도 그저 편안한 사적의 영역. 이 둘의 경계를, 두 영역의 본질적 목적의 차이를 또렷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일을 위해 모였다면, 일이 우선이고, 공적 업무 처리가 우선이다. ‘일에 실수가 많다.’등 일에 대한 얘기엔 귀를 기울이고, 정당한 업무 비판은 받아야 들어야 한다. 그러나 간혹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영역까지 끌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다. 이렇게 사적인 것들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나는 단 하나인데, 누군가에게 버릇이 없는 직원이, 이기적인 직원이 되기도 하며, 친절한 직원이, 얌전한 직원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영역을 흐리는 이들로 인해 휘둘려 영역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순간, 천둥 뒤에 걷잡을 수 없이 밀어 닥치는 태풍과 같이, 온몸으로 떠받아내야 할 파도가 밀려온다. 그것은 일말의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업무과중이 될 것이며, 끝없는 야근으로, 그렇게 소중한 저녁과 가족과 친구와의 시간을 빼앗길 수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지끈거리는 두통이, 손끝이 떨리는 우울과 분노가, 무너지는 어깨와 척추가 되기도 할 것이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공간에 끌고 오는 이들이 있다면, 야, 가볍게 털어 무시해. 왜 이래, 안 그래도 이미 해야 할 업무들이 많아. 어쩌면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단지 이기적이라는 말. 저런 얘기라면 기꺼이 나는 이기적직원이 되겠다.

  울고 웃은 당신의 지친 퇴근길, 사실은 업무보다 사람 때문이지 않을까. 그치, 어찌 업무와 사람을 케이크 자르듯이 싹둑 말끔히 잘라낼 수 있을까. 그저 타인이 마음대로 휘두르는 어리석은 몸짓에 중심을 잃고 한 쪽으로 휩쓸리지 않기를, 자신을, 그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외이야기

 

  연극은 삼삼하고 잔잔했어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른하지만 군데군데 박힌 소금처럼 위트도 섞여서 편안한 그런 연극.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맞아요. 제 취향저격은 아니었습니다. 근데 썩 괜찮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그날 좀 지치고 피곤했거든요. 뭐, 특별한 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직장인이라면 지극히 평범함에 속한 상태라는 거, 알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도 있고, 무엇보다 누구나의 것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의 평범함이 썩 흥미로운 재미로 다가왔어요.

  거참, 직장을 다니다보면, 뭐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이지 더욱이 공과 사의 경계가 중요하다고 느껴요. 근데 그거 참 어렵죠. 중요한 것이고, 잃고 싶지 않은, 놓고 싶지 않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어려워요. 그래서 많이들 고민하고, 공감하고, 위로 받고, 확인 받고 싶은 거겠죠. 뭐, 사실은 저한테 얘기하고 싶은 말을 적었어요. 나한테 와닿은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남겨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달까요. 나에게 했던 말들이 누군가에게도 닿는다면 그거야말로 영광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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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템플

suy_65

 

  연극을 보고, 맛있는 저녁으로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발을 올렸다. 쾌적하다 느껴질 정도로 생각보다 사람이 없는 지하철에는 듬성듬성 많지 않은 빈자리가 있었고, 전자책을 읽고 있던 중 정신없이 앉은 자리는 우연히도 임산부 배려석의 바로 옆자리였다.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으면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차분히 몸을 기댔고 지하철은 역에 멈추다 다시 출발함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책을 읽던 나의 시야 바로 너머로 한 일행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것을 인지하고 고개를 살짝 드는 순간, 내 옆에 비어있던 임산부 배려석에 누군가가 앉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보았고, 그 앞에 서있는 동행인을 차례로 보았다. 외국인이었다. 굳이 책에서 시선을 떼서 그들을 보았던 것엔 어떤 의도는 없었다. 단지,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앉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 나의 시선과는 한 치 겹치지도 않은 채, 동행인은 배려석에 앉은 누군가에게 바닥에 있는 배려석 안내를 가리켰고, 빨리 일어나라는 몸짓을 보였다. 그러자 어정쩡하게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있던 누군가는 빠르게 엉덩이를 들어 배려석을 벗어나, 동행인과 함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찰나였다. 이 모든 일은 단 10초도 걸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단지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불편하고도 보통의 나를 발견했다. 뒤이어 밀려오는 얕은 부끄러움에 멍하게 공중에 뜬 눈길을 한참 뒤에나 거둘 수 있었다. 그들이 외국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동남아시아쪽 사람들 같아보였다는 것만으로,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아니면서 배려 없이 앉은 것에 감히 그들의 기본 상식의 부족함과 인성의 뻔뻔함을 모두 연결 지었던 것이다. 매번 주의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흔한 일상에서 말이다. , 외국인이니까 잘 모르겠지, 알아도 그 외국인이라는 변명으로 뻔뻔하게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외국인은 항상 그러니까, 무지하고 뻔뻔하니까.

  국가가 다르니, 태어나 자란 곳이 다르니, 그들이 다른 것은 맞다. 달라서 모를 수 있다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 다름이 틀림이 될 수는 없다. 다름이라는 것이 배척하는 이유가, 무시하는 이유가, 지레 판단하여 혀를 차는 이유가, 그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틀렸다고 단언하여 비난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외국인이라서, 나와는 달라서 지레 무지하다고 판단하고, 뻔뻔하다고 비난할 권리가 나에게 없다. 어쩜, 하필, 이 연극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나를 발견한 것일까. ‘정말 기적이야.’ , 정말 기적적인 일이네.

  어디서 오는 걸까. 다름을 틀림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마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하니 이해하지를 못하고, 이해하지를 못하니 대화하지 못하고, 대화하지 못하니 더욱 알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 또는 낯설고 새로운 다름을 빠르게 틀림으로 판단하여 넘기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사람의 뇌는 낯설고 새로운 것이나 자신의 기존 생각과 다른 것을 마주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의 영역이 새로 형성이 되기도, 어떤 부분은 무너지기도, 또는 재형성이 되어 새로운 모양이 되기도 하며 확장되고 깊어질 테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참 비열하고 게으르며 최대한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기에, 외면과 회피를 하고, 왜곡과 곡해를 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자신의 생각만 들이대는 경우도 많다. 또는 뭐,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쌓인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데이터베이스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외면일 수도 있고. 확실한 것은 무지에서 온다는 것이다. 무지에서 편견이 생긴다. 그렇게, ‘다름틀림이 된다.

  자폐증이 엄마의 냉담한 태도로부터 발병한다는 그 시대의 무지함, 자폐증의 진짜 원인을 알고서도 귀를 막으며 비난하고, 유도검사를 통해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여 원인을 부모로 떠미는 의사들의 태도, ‘템플의 다른 점을 성도착증 환자의 증상으로 오해하며 더 이상의 이해도 하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으려는 선생과 학생들, 템플의 다름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또는 알려주고 이해시켜주는 어른이 있지도 않은 아이들의, 다름을 향한 틀린 놀림들. 결국, ‘다름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알고 이해하는 순간이 오자, 템플은 스스로 성장한다.

  참으로, 연극의 마지막쯤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템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세상을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그림으로 인식하는 템플에게 그들은 템플과 다른 것이다. 여태 템플이 그들에게 다름이었는데, 템플에게도 그들이 다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같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것이 된다. 그러니, 그 누가 다름을 틀림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이 아닐까.

 

 

/그외 이야기

 

  솔직히 이번 연극은 제 취향 저격은 아니였어요. 살짝 시큰둥했달까요. 아니, 모든 연극이 취향일 수는 없는 거니까요. 뭐 다들 취향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그냥, 음, 전형적인 자서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말 자서전 그 자체의 스토리텔링, 그걸 연출가도 알고 있는 건지, 초반에 친절하게 이 연극은 자서전 연극임을 상기시켜 주더라고요. 또 있다면, 절정을 위해 쌓아 올리는 서사의 빈약함, 그로인해 느껴지는 비약적임, 중간 중간 이 연극의 교훈과 방향성을 대놓고 설명까지 해주는 낯선 친절함, 눈물 날 포인트란 포인트는 싹 다 긁어모은 게 뻔히 보이는 감동의 해피엔딩, 아니, 잠시만, 진정하세요. 그냥 제 취향이 아니었다는 거지, 거참, 나쁘다는 말이 아니랍니다. 충분히 생각의 환기는 되는 연극이었는데, 딱, 집가는 길에 저런 저를 발견하면서, 확, 생각의 시너지가 터진 거예요. 형식적인 교훈들이 뭐랄까 체감으로 와닿았달까요. 그러면서 다른 방식으로 이 연극이 저한테 인상깊게 남은 거죠. 어쩌면, 네 맞아요. 참 부끄러운 이야기죠. 근데,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게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문장 번득 생각나네요. '생활은 생각하지 않아도 유지되지만, 삶은 생각하지 않으면 망가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사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나의 삶을 망칠까 검이 났던 것이다.' 완전 공감되는 맞는 말. 이 문장의 책의 이름은 바로바로바로, 5페이지만 더 읽고! 올리도록 할게요. 헤헤헤. 읽고 있는데, 재밌어요. 잘 읽고 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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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만선

suy_56

 

  딱 보면 알 수 있는 건, 시대성을 알려주는 특유성이 언뜻 언뜻 발견되는 꽤 오래된 극본, 그것을 이제 현대의 흐름과 감성을 곁들인 재해석, 그리고 전형적인 비극. 아휴, 그냥 한마디로 꿀잼이라고. 아니, 저게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 있어. 연극을 보고 난 다음 머리에 맴도는 단어들은, 집착, 몰입, 몰두, 골몰, 낭패, 매몰. 곰치와 바다, 구포댁과 아들, 슬슬이와 범쇠, 임제순과 돈. 이 모든 것은 몰입으로, 집착으로 얽혀있다는 것. 어떤 것은 소망, 또는 모성애, 또는 욕구, 그게 아니면, 결핍이라는 말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정말? 진짜? 그거까지만?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곰치에게 바다는 무슨 의미였냐니까. 아니면 아예 의미가 없는 집착이었을지도 모르지, . 근데 어디서부터 오는 집착? 그건 소망, 바람, 희망이 아닌, 바로 죄책감. 어쩌면 참으로도 싱거운 가장 근본.

  자신의 신념, 욕심, 또는 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애정하는 사람들이 바삭하게 메말라가는 것을 보면서도,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울고 있으면서도, 다시, 또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 바다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고도 다시 바다로 나가는, 분명 뭍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다를 고집하는, 새로운 고기잡이 방식과 장비들이 쏟아져도 꿋꿋이 옛날 선조와 조상들의 방법을 사용하는, 그리고 결국 그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아들을 잃은 곰치에게, 바다는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바다는 선조와 조상,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삼켰고, 그 속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유일한 생존과 강한 생명력이 아닌, 결국 그가 그런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영영 잃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거짓이라고 선언하듯, 그런 갈등은 감히 자신에게 허락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울부짖듯, 소리 높여 외치는 그의 가족과 바다 이야기는 그것을 더욱 강조한다. 그렇게 그의 모습은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이어지고, 우리들은 각자가 지닌, 누구도 모를, 혹은 본인도 모를 그 미안함과 죄책감에 기꺼이 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러, 자신의 얕은 몸을 현재에 내던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그 길이 더 좋다는 것을 알아도, 그깟 귀한 미안함 때문에, 그래, 그 숭고한 죄책감 때문에 오늘도 힘차게 손을 흔들며, 맞바람이 쏟아질 듯 불어오는 바다에 돛을 두 개나 들고 나간다. 정말 만선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근데, 네 몸통이 잘려나가고 있는 건 알고 있니. 꽤 오래된 극본에서 이어지는 현재의 기가 막히는 곰치들이다.

 

  배우들의 동선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특히나 '구포댁'의 동선이 재밌어서, 괜히 농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나가는 고릴라를 찾았나요?’ 따위의 영상을 보는 것 마냥 집중했다. 연극 후반까지조차 구포댁은 집과 그 앞마당을 벗어나 부두로 가는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 계속 앞마당에 머물며, 바닷일로 집을 대부분 비우는 곰치를 대신해 집안의 중심을 잡는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앞마당을 벗어나 부두를 내딛는데, 그때가 비극의 맛을 곱절로 올린다. 그 맛을 본 관객들은 그녀의 선택에 가슴을 내려치고 머리를 부여잡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극에서 구포댁은 그녀를 지칭하는 단어만 보더라도 그 시대의 전형적인 현모양처이자, 책임 있는 안사람, 자식만이 세상의 중심이자 전부인 인물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전부가 되도록 만든 것은 시대가 일방적으로 끌어낸 모성애의 결과일수도, 허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최선의 선택,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을 감히 생각한다.

  구포댁과 대조라면 대조를 준, 현대적 요소라면 현대적인 인물이라면 슬슬이로 볼 수 있는데, ‘범쇠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자 낫을 들고 범죄를 죽인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런 슬슬이가 결국 자신도 자살을 한다는 점이지만, , 이게 비극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납득되는 부분이기도 해서, 뭐. 그런 슬슬이와 범쇠를 보며, 계속 되새김질한 생각이 있다. 전쟁이든, 가난이든, 침략이든, 집단이 힘을 잃고 공격을 받게 되면, 바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왜 여성일까라는, 그 위험은 힘 있는 자, 우위에 있는 자에게 한없이 가볍게, 여성에게는 한없이 무겁게, 그리고 끔찍하게, 내려치는 그런 저질스럽고 추잡한 폭력을 말한다. 연극 동안에도, 그 후에도, 계속 반추하게 된다. 가난하고 빚만 있는 집에서 바로 방도이자 돈줄이 되는 게 젊은 미혼 여성 슬슬이’, 곧 바스라질 인생이라도 야무지게 살아가는 그런 그녀가 도저히 그런 인생을 한 발짝도 걸어 나아갈 수도 없게 무너지길 바라는 범쇠의 내심, 그런 내심의 숨겨지지 않은 악취를 내뿜는 태도. 대조되는 그들의 욕구와 뒷목에 날이 서게 만드는 상반된 결핍. 그 돈줄은 슬슬이가 늙은 노인의 세 번째 처가 되는 것이, 그 돈줄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공장길에 들어서는 것이, 그 돈줄은 힘 있는 자의 손장난에 깊이 패는 상처가 남겨지는 것이, 또 그 돈줄은 뭐가 되고, 뭐가 될까. 쓰다. 그래서 쓴다. 그래, 저렇게 꽤 오래된 극본이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논제를 제시한다.

  어쩌면 꽤 오래된 극본, 글쎄, 어쩌면 제일 와 닿는 극본. 어휴, 이게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가 있냐고. 내말 맞지?

 

 

/그외 이야기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이렇게 심장 두근두근하면서 재밌게 본 건 간만이었어요. 예전에 이런 느낌이랑 비슷한 연극이 있었는데, 바로 딱 생각나는 건 '얼굴도둑'이네요. 그 연극도 진짜 재밌었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여운 있었죠. 암튼 극이 끝나고 딱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는데, 다른 관객들도 육성으로 '야, 진짜 재밌다.'라고 하기도 하고, 소곤소곤 재밌다고 막 서로 대화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은근히 내적으로 흐뭇한 거 뭔지 아시나요? 막 내적 공감 생기잖아요. 나만 그래요? 아, 나만 그래? 아니, 근데 재미가 없을 수가 없어. 심지어 현대적 가감을 한 것도 튀거나 어색하거나 그러지 않고 완전 물들어서 스며들었음. 여기서 재미는 연극 자체를 즐기는 풍류에서 오는 재미를 말하기도 하고, 연극이 주는 사유 거리에 대한 재미를 말하기도 함요. 아니, 솔직히 이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 굉장히 어렵단 말이죠. 근데 그걸 해냈습니다. 누가요? 만선이요.

  또또 배우분들 연기가, 와. 진심 영혼을 갈아넣었다는 말이 뭔지 직접 두 눈으로 봤단 말이죠. 모든 배우분들 완전 열연하셨는데, 진심, 구포댁 역할의 배우 '정경순'님의 연기는 미쳤다고요. 막판에 정신 놓고 나서 막 슬슬이 범쇠한테 시집가라고 얘기? 독백? 그런 대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름 돋았잖아요. 특히, 연극은 현장감이랑 생동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 배우분의 에너지가 ㄷㄷㄷ 멀리서 관극했는데도 느껴지는데, 그냥 쩔었어요. 장난없었어. 또 연극 프로그램북 구성도 알찼고, 솔직히 기대 없었는데 재밌게 관극했답니다. 생각할 거리도 많아서, 열심히 꼭꼭 씹어 먹었어요. 맛있게 잘 관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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