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템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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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을 보고, 맛있는 저녁으로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발을 올렸다. 쾌적하다 느껴질 정도로 생각보다 사람이 없는 지하철에는 듬성듬성 많지 않은 빈자리가 있었고, 전자책을 읽고 있던 중 정신없이 앉은 자리는 우연히도 임산부 배려석의 바로 옆자리였다.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으면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차분히 몸을 기댔고 지하철은 역에 멈추다 다시 출발함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책을 읽던 나의 시야 바로 너머로 한 일행의 모습이 들어왔고, 그것을 인지하고 고개를 살짝 드는 순간, 내 옆에 비어있던 임산부 배려석에 누군가가 앉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 누군가를 보았고, 그 앞에 서있는 동행인을 차례로 보았다. 외국인이었다. 굳이 책에서 시선을 떼서 그들을 보았던 것엔 어떤 의도는 없었다. 단지, 임산부 배려석에 누가 앉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런 나의 시선과는 한 치 겹치지도 않은 채, 동행인은 배려석에 앉은 누군가에게 바닥에 있는 배려석 안내를 가리켰고, 빨리 일어나라는 몸짓을 보였다. 그러자 어정쩡하게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있던 누군가는 빠르게 엉덩이를 들어 배려석을 벗어나, 동행인과 함께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찰나였다. 이 모든 일은 단 10초도 걸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단지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불편하고도 보통의 나를 발견했다. 뒤이어 밀려오는 얕은 부끄러움에 멍하게 공중에 뜬 눈길을 한참 뒤에나 거둘 수 있었다. 그들이 외국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동남아시아쪽 사람들 같아보였다는 것만으로,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아니면서 배려 없이 앉은 것에 감히 그들의 기본 상식의 부족함과 인성의 뻔뻔함을 모두 연결 지었던 것이다. 매번 주의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흔한 일상에서 말이다. , 외국인이니까 잘 모르겠지, 알아도 그 외국인이라는 변명으로 뻔뻔하게 엉덩이를 붙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외국인은 항상 그러니까, 무지하고 뻔뻔하니까.

  국가가 다르니, 태어나 자란 곳이 다르니, 그들이 다른 것은 맞다. 달라서 모를 수 있다는 것도 맞다. 그러나 그 다름이 틀림이 될 수는 없다. 다름이라는 것이 배척하는 이유가, 무시하는 이유가, 지레 판단하여 혀를 차는 이유가, 그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틀렸다고 단언하여 비난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이 외국인이라서, 나와는 달라서 지레 무지하다고 판단하고, 뻔뻔하다고 비난할 권리가 나에게 없다. 어쩜, 하필, 이 연극을 보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 나를 발견한 것일까. ‘정말 기적이야.’ , 정말 기적적인 일이네.

  어디서 오는 걸까. 다름을 틀림으로 정의하는 것은. 아마 무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하니 이해하지를 못하고, 이해하지를 못하니 대화하지 못하고, 대화하지 못하니 더욱 알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 또는 낯설고 새로운 다름을 빠르게 틀림으로 판단하여 넘기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사람의 뇌는 낯설고 새로운 것이나 자신의 기존 생각과 다른 것을 마주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 생각의 영역이 새로 형성이 되기도, 어떤 부분은 무너지기도, 또는 재형성이 되어 새로운 모양이 되기도 하며 확장되고 깊어질 테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참 비열하고 게으르며 최대한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하는 동물이기에, 외면과 회피를 하고, 왜곡과 곡해를 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자신의 생각만 들이대는 경우도 많다. 또는 뭐,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쌓인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데이터베이스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외면일 수도 있고. 확실한 것은 무지에서 온다는 것이다. 무지에서 편견이 생긴다. 그렇게, ‘다름틀림이 된다.

  자폐증이 엄마의 냉담한 태도로부터 발병한다는 그 시대의 무지함, 자폐증의 진짜 원인을 알고서도 귀를 막으며 비난하고, 유도검사를 통해 잘못된 결과를 도출하여 원인을 부모로 떠미는 의사들의 태도, ‘템플의 다른 점을 성도착증 환자의 증상으로 오해하며 더 이상의 이해도 하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으려는 선생과 학생들, 템플의 다름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또는 알려주고 이해시켜주는 어른이 있지도 않은 아이들의, 다름을 향한 틀린 놀림들. 결국, ‘다름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알고 이해하는 순간이 오자, 템플은 스스로 성장한다.

  참으로, 연극의 마지막쯤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템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세상을 그림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을 그림으로 인식하는 템플에게 그들은 템플과 다른 것이다. 여태 템플이 그들에게 다름이었는데, 템플에게도 그들이 다름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같은 것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것이 된다. 그러니, 그 누가 다름을 틀림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본질이 아닐까.

 

 

/그외 이야기

 

  솔직히 이번 연극은 제 취향 저격은 아니였어요. 살짝 시큰둥했달까요. 아니, 모든 연극이 취향일 수는 없는 거니까요. 뭐 다들 취향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그냥, 음, 전형적인 자서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말 자서전 그 자체의 스토리텔링, 그걸 연출가도 알고 있는 건지, 초반에 친절하게 이 연극은 자서전 연극임을 상기시켜 주더라고요. 또 있다면, 절정을 위해 쌓아 올리는 서사의 빈약함, 그로인해 느껴지는 비약적임, 중간 중간 이 연극의 교훈과 방향성을 대놓고 설명까지 해주는 낯선 친절함, 눈물 날 포인트란 포인트는 싹 다 긁어모은 게 뻔히 보이는 감동의 해피엔딩, 아니, 잠시만, 진정하세요. 그냥 제 취향이 아니었다는 거지, 거참, 나쁘다는 말이 아니랍니다. 충분히 생각의 환기는 되는 연극이었는데, 딱, 집가는 길에 저런 저를 발견하면서, 확, 생각의 시너지가 터진 거예요. 형식적인 교훈들이 뭐랄까 체감으로 와닿았달까요. 그러면서 다른 방식으로 이 연극이 저한테 인상깊게 남은 거죠. 어쩌면, 네 맞아요. 참 부끄러운 이야기죠. 근데,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게요.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문장 번득 생각나네요. '생활은 생각하지 않아도 유지되지만, 삶은 생각하지 않으면 망가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하지 않고 사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나의 삶을 망칠까 검이 났던 것이다.' 완전 공감되는 맞는 말. 이 문장의 책의 이름은 바로바로바로, 5페이지만 더 읽고! 올리도록 할게요. 헤헤헤. 읽고 있는데, 재밌어요. 잘 읽고 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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