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만선
suy_56
딱 보면 알 수 있는 건, 시대성을 알려주는 특유성이 언뜻 언뜻 발견되는 꽤 오래된 극본, 그것을 이제 현대의 흐름과 감성을 곁들인 재해석, 그리고 전형적인 비극. 아휴, 그냥 한마디로 ‘꿀잼’이라고. 아니, 저게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 있어. 연극을 보고 난 다음 머리에 맴도는 단어들은, 집착, 몰입, 몰두, 골몰, 낭패, 매몰. 곰치와 바다, 구포댁과 아들, 슬슬이와 범쇠, 임제순과 돈. 이 모든 것은 몰입으로, 집착으로 얽혀있다는 것. 어떤 것은 소망, 또는 모성애, 또는 욕구, 그게 아니면, 결핍이라는 말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정말? 진짜? 그거까지만?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곰치’에게 바다는 무슨 의미였냐니까. 아니면 아예 의미가 없는 집착이었을지도 모르지, 뭐. 근데 어디서부터 오는 집착? 그건 소망, 바람, 희망이 아닌, 바로 죄책감. 어쩌면 참으로도 싱거운 가장 근본.
자신의 신념, 욕심, 또는 꿈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애정하는 사람들이 바삭하게 메말라가는 것을 보면서도,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울고 있으면서도, 다시, 또 다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 바다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고도 다시 바다로 나가는, 분명 뭍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다를 고집하는, 새로운 고기잡이 방식과 장비들이 쏟아져도 꿋꿋이 옛날 선조와 조상들의 방법을 사용하는, 그리고 결국 그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아들을 잃은 ‘곰치’에게, 바다는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바다는 선조와 조상, 그리고 자신의 형제들을 삼켰고, 그 속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유일한 생존과 강한 생명력이 아닌, 결국 그가 그런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영영 잃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거짓이라고 선언하듯, 그런 갈등은 감히 자신에게 허락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울부짖듯, 소리 높여 외치는 그의 가족과 바다 이야기는 그것을 더욱 강조한다. 그렇게 그의 모습은 그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이어지고, 우리들은 각자가 지닌, 누구도 모를, 혹은 본인도 모를 그 미안함과 죄책감에 기꺼이 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러, 자신의 얕은 몸을 현재에 내던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그 길이 더 좋다는 것을 알아도, 그깟 귀한 미안함 때문에, 그래, 그 숭고한 죄책감 때문에 오늘도 힘차게 손을 흔들며, 맞바람이 쏟아질 듯 불어오는 바다에 돛을 두 개나 들고 나간다. 정말 만선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 근데, 네 몸통이 잘려나가고 있는 건 알고 있니. 꽤 오래된 극본에서 이어지는 현재의 기가 막히는 ‘곰치들’이다.
배우들의 동선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특히나 '구포댁'의 동선이 재밌어서, 괜히 ‘농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나가는 고릴라를 찾았나요?’ 따위의 영상을 보는 것 마냥 집중했다. 연극 후반까지조차 구포댁은 집과 그 앞마당을 벗어나 부두로 가는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 계속 앞마당에 머물며, 바닷일로 집을 대부분 비우는 곰치를 대신해 집안의 중심을 잡는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앞마당을 벗어나 부두를 내딛는데, 그때가 비극의 맛을 곱절로 올린다. 그 맛을 본 관객들은 그녀의 선택에 가슴을 내려치고 머리를 부여잡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연극에서 구포댁은 그녀를 지칭하는 단어만 보더라도 그 시대의 전형적인 현모양처이자, 책임 있는 안사람, 자식만이 세상의 중심이자 전부인 인물이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전부가 되도록 만든 것은 시대가 일방적으로 끌어낸 모성애의 결과일수도, 허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녀가 스스로 결정한 최선의 선택,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을 감히 생각한다.
구포댁과 대조라면 대조를 준, 현대적 요소라면 현대적인 인물이라면 ‘슬슬이’로 볼 수 있는데, ‘범쇠’가 자신을 해치려고 하자 낫을 들고 ‘범죄’를 죽인다. 아쉬운 부분이라면 그런 ‘슬슬이’가 결국 자신도 자살을 한다는 점이지만, 뭐, 이게 비극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납득되는 부분이기도 해서, 뭐. 그런 슬슬이와 범쇠를 보며, 계속 되새김질한 생각이 있다. 전쟁이든, 가난이든, 침략이든, 집단이 힘을 잃고 공격을 받게 되면, 바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왜 여성일까라는, 그 위험은 힘 있는 자, 우위에 있는 자에게 한없이 가볍게, 여성에게는 한없이 무겁게, 그리고 끔찍하게, 내려치는 그런 저질스럽고 추잡한 폭력을 말한다. 연극 동안에도, 그 후에도, 계속 반추하게 된다. 가난하고 빚만 있는 집에서 바로 ‘방도’이자 돈줄이 되는 게 젊은 미혼 여성 ‘슬슬이’, 곧 바스라질 인생이라도 야무지게 살아가는 그런 그녀가 도저히 그런 인생을 한 발짝도 걸어 나아갈 수도 없게 무너지길 바라는 ‘범쇠’의 내심, 그런 내심의 숨겨지지 않은 악취를 내뿜는 태도. 대조되는 그들의 욕구와 뒷목에 날이 서게 만드는 상반된 결핍. 그 돈줄은 ‘슬슬이’가 늙은 노인의 세 번째 처가 되는 것이, 그 돈줄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공장길에 들어서는 것이, 그 돈줄은 힘 있는 자의 손장난에 깊이 패는 상처가 남겨지는 것이, 또 그 돈줄은 뭐가 되고, 뭐가 될까. 쓰다. 그래서 쓴다. 그래, 저렇게 꽤 오래된 극본이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논제를 제시한다.
어쩌면 꽤 오래된 극본, 글쎄, 어쩌면 제일 와 닿는 극본. 어휴, 이게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가 있냐고. 내말 맞지?
/그외 이야기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이렇게 심장 두근두근하면서 재밌게 본 건 간만이었어요. 예전에 이런 느낌이랑 비슷한 연극이 있었는데, 바로 딱 생각나는 건 '얼굴도둑'이네요. 그 연극도 진짜 재밌었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여운 있었죠. 암튼 극이 끝나고 딱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는데, 다른 관객들도 육성으로 '야, 진짜 재밌다.'라고 하기도 하고, 소곤소곤 재밌다고 막 서로 대화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은근히 내적으로 흐뭇한 거 뭔지 아시나요? 막 내적 공감 생기잖아요. 나만 그래요? 아, 나만 그래? 아니, 근데 재미가 없을 수가 없어. 심지어 현대적 가감을 한 것도 튀거나 어색하거나 그러지 않고 완전 물들어서 스며들었음. 여기서 재미는 연극 자체를 즐기는 풍류에서 오는 재미를 말하기도 하고, 연극이 주는 사유 거리에 대한 재미를 말하기도 함요. 아니, 솔직히 이 두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 굉장히 어렵단 말이죠. 근데 그걸 해냈습니다. 누가요? 만선이요.
또또 배우분들 연기가, 와. 진심 영혼을 갈아넣었다는 말이 뭔지 직접 두 눈으로 봤단 말이죠. 모든 배우분들 완전 열연하셨는데, 진심, 구포댁 역할의 배우 '정경순'님의 연기는 미쳤다고요. 막판에 정신 놓고 나서 막 슬슬이 범쇠한테 시집가라고 얘기? 독백? 그런 대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름 돋았잖아요. 특히, 연극은 현장감이랑 생동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 배우분의 에너지가 ㄷㄷㄷ 멀리서 관극했는데도 느껴지는데, 그냥 쩔었어요. 장난없었어. 또 연극 프로그램북 구성도 알찼고, 솔직히 기대 없었는데 재밌게 관극했답니다. 생각할 거리도 많아서, 열심히 꼭꼭 씹어 먹었어요. 맛있게 잘 관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