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양육 - 아이가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읽고 소통하는 법
셰팔리 차바리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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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나르시스) 이야기를 읽고 큰 의문에 잠긴 적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해 말해보자면, 아름다운 소년 나르키소스의 어머니는 일찍이 예언을 하나 받는다. '자기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겠지.' 그리고 스스로를 모른 채 자라난 이 소년은 투명한 샘물에 비친 제 얼굴에 반해 상사병으로 숨을 거둔다. 나는 '아니, 거울만 보여주면서 키웠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라는 마음에 격하게 반발했다. 신화에 담긴 은유와 상징을 깨닫기에는 어려도 한참 어렸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이 신화가 '헛된 자기애'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1. 나를 알고 나서야 타인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 

2. 그 타인(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독립된 개체이며, 이걸 알아야 자기애를 넘어서서 타인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 

3. 그러나 아이가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부모였다. 

이렇게 보자면 나르키소스 신화는 '자기 발견 - 타인에 대한 인식 - 그것을 막은 문제적 양육'에 대한 비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걸 배운 건 대학 교양 강의에서였는데 그때 우리는 교수님에게서 꽤 유용한 조언도 함께 얻었다. 취업을 앞두고 자기계발서 같은 실용서적을 많이 읽고 있겠지만, 때로는 정신의학/심리학이나 인간관계론, 심지어는 육아법을 다룬 책이 더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늘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였기 때문에 누군가 꽤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평생 아이를 낳을 일 없고 교육업에 종사하지도 않을 사람에게 육아팁 같은 게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고 아마 같은 장소에 있던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육아서적에 아기를 목욕시키고 분유 온도를 맞추는 방법만 나와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모두 아이였고 그 아이는 지금도 우리 마음 어딘가에 있어요. 어른이 된 자신이 그 어린 아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서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을까요? 다른 방면으로도 생각해봅시다. 부모된 이들만 아동과 어린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회가 건강합니까?'



이런 이유에서 나는 가끔 자녀교육/육아서적 카테고리에 있는 책을 찾곤 하며, <깨어있는 양육>도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저자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교수님처럼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은 정신 분야에서 귀하게 여기는 값진 경험'이라 말하고 있으며, 바로 그런 관점에 입각해 도움말을 건넨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을 그대로 발췌해본다. 아이는 저절로 자라지 않으며 부모는 부모가 되기 위해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 부모가 아닌 이들도 어른이 되려면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과거의 노예이며, 아이들은 그 과거를 곧잘 불러낸다. 왜냐하면 분명 잊힌 것 같은 사건들도 우리가 마주하고 그 사건을 둘러싼 감정들을 해소하기 전까지는 무의식 차원에서 계속 우리를 조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심리 치료사로 일하다 보면 40대, 50대, 60대 남녀가 아직도 정서적으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모의 분노와 멸시, 방치, 억압의 메아리에 갇혀 있는 경우를 자주 접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갈등은, 그 대상이 아이든 배우자든 아니면 다른 어른이든, 어느 정도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갈등 상황에 어른은 존재하지 않고, 떼쓰는 아이들만 있는 셈이다. 이를 양육에 적용하면 여러 면에서 애가 애를 키우는 꼴이다.



이 책은 전작 <깨어있는 부모>와 이어진다. 여기서는 딱 한 문장만을 가져오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의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불안'에 반응한다. 저자가 이 사실을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책을 썼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 한 줄을 많은 이들과 공유했는데, 자식이 없거나 비혼인 이들조차 '아이'를 '남(타인)'으로 바꾸면 그냥 내 이야기인 것 같다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우리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나도 모르게 부모와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불안을 먼저 치료할 필요가 있다. 나도 모르게 굳어진 행동패턴, 낡은 사고방식, 해묵은 상흔, 오래된 습관들로 뭉쳐지고 굳어져버린 응어리들이 해소된 다음에야 타인을 왜곡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있는 부모> 마지막 장에서 와서야 훈육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깨어있는 양육>은 그 훈육에 대한 실전상황 대처법 정도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저자는 우선 용어의 개념부터 명확히 하고 넘어간다. 훈육(訓育, 가르칠 훈-기를 육) = discipline의 어원을 disciple(추종자, 복종)이 아니라 disco(배우다)에 두자고. 전자가 '징계에 따른 복종'이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후자는 이 일이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배움(learn)'임을 강조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에 관해 부모의 책임과 가정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것이 '처벌'이나 '징계'라는 방식으로만 나타난다면 장기적인 효과가 없으리란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훈육이 필요한 상황, 즉 아이가 일탈행위와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부모와 어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깨어있는 양육>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적절한 조언을 해주려 노력하면서 동시에 <깨어있는 부모>에서부터 반복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불량하게 구는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지금까지 충분히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어쩌면 부모의 불량한 정서 상태를 먼저 치유해야 하는 건 아닐까? 



가령 부모가 아이에게서 존중과 신뢰를 얻는 방법은 무엇일까? 누구나 어릴 때 같은 행동을 하고도 어떤 때는 혼이 나고 어떤 때는 그냥 넘어간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되고 직업을 가지고 직장에서 일을 해도 명확하고 일관된 기준이 없으면 혼란스럽다. 하물며 부모가 절대적인 세상에서 사는 아이가 매일 복불복을 하는 상황에 놓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저자는 기분이 태도가 되는 일, 특히 감정에 따라 '된다/안 된다'를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을 매우 경계한다. 훈육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문제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인간이 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에 있다. 깨어있는 부모가 되어 깨어있는 양육을 하려면, 부모는 아이의 행동을 점검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예리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의 피곤과 오래된 습관이 겹쳐져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언행이 튀어나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미숙한 에고를 단련해 아이와 함께 커나가는 어른이 되려면 우리는 용기있게 자신과 직면해야 한다. 아이가 낳아놓으면 저절로 크는 존재가 아니듯이,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한다고 해서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적인 토대를 쌓는 것에는 자녀나 부모나 아이나 성인이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또한 성장하는' 것이다. 



나와 또래들은 대부분 지극히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훈육되었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방식을 제일 익숙하고 편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네가 ~하면 나는 ~하겠다'는 말을 수백 수천 번 들어왔다. 배운 대로 물려주는 것이 일견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일컬어 '죄수와 간수 양육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네가 숙제하지 않고 게임만 하면 휴대폰을 압수할 거야. 하지만 네가 숙제를 하면 놀이공원에 데려가마. 아이와 어른, 자녀와 부모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이 대화를 복기해보자. 이게 거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죄수의 행동을 감시하며 그 행동에 따라 보상 혹은 처벌을 내리는 간수와 다를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통제를 받으면 인간은 무엇을 빼앗기거나 반대로 무엇을 얻는 것에만 집중해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게 된다. 



물론 이런 방법이 필요할 때도 많겠지만, 모든 상황에서 통하는 만능해결법이 아님에도 우리는 거의 평생을 이런 대화를 나누며 살아왔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은 자기조절능력을 획득하지 못한 채 타인의 벌과 상에 끌려다니고, 스스로를 절제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내적 동기가 아닌 외부의 통제에 휘둘리다 보면 자신의 중심을 세울 수 없다. 나의 바람이 진정 나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리라. 그래서 저자는 실질적이고 실제적으로 위험이 발생하는 순간(아이가 도로에 뛰어들거나 남에게 피해를 줄 때)이 아니라면, 부모가 과하게 개입하지 말고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경험하게 하라고 충고한다. 배고파서 허기를 느껴야 밥을 찾지 않겠나. 식사하지 않는다고 억지로 대가를 제시하면서 밥을 먹이거나 벌을 주는 것은 순간만 모면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책에는 이런 실제적이고 세세한 카운슬링이 가득하다. 양육, 훈육,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독립적인 한 개체가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도록 기르는 것이 양육이라면, 그 양육의 주체도 단단하게 자립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따라서 저자는 아이의 모든 문제를 부모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며, 아이에게 모멸감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엄하게 말하는 동시에 괴로운 순간을 잠시 넘어가게 만드는 사탕발림도 단호하게 끊어내고자 한다. 아이가 안 좋은 일을 겪어 곤란해하고 있을 때 회피를 택하는 것은 쉽고 해결로 나아가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에게 사탕과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휴대폰과 게임기를 쥐어주고 '참 속상하겠다'며 달래기 바쁘다. 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어른들이 먼저 회피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분명 존재하고, 이는 육아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는데 그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다 보니 우리는 진상이 되고 만다. 부모로서도 게다가 인간으로서도. 하여 저자는 자녀와 교감하되 그의 성장과 발달을 막지 말라고 거듭해 이야기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가 정신적으로 자랄 때 부모도 함께 커갈 거라고. 부모가 먼저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면 아이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혐오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해할 거라고. 부모가 아이와 연결되어 있을 때 양쪽 모두 잘 '배울' 수 있다고.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지켜보기 Witness

물어보기 Inquire

중립 지키기 Neutrality

협상하기 Negotiate

공감하기 Empathize

해결하기 Resolve

부모와 아이가 모두 만족할 '윈윈전략 WINNER' 및



'내 아이와 제대로 소통하기 위한 10계명'은 책을 읽는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부분이다. 특히 10계명은 대인관계와 직장생활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성인에게도 유용하게 쓰일 법하다. 욱하지 않기, 나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하지 않기, 잠시 타임아웃 주고 호흡하기,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등은 실생활에서 바로 적용 가능하고 실제 내 잘못된 행동 교정에도 꽤 효과가 있었다. 



자녀는 부모를 통해, 아이는 어른을 통해 이 세상을 구성한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반대의 경우는 잘 생각지 않는 것 같다. 부모도 자식으로 인해, 성인도 어린이로 인해 자신의 세계를 재구성한다. '양육'이란 제목에 얽매이지 않고 부모가 아닌 이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저자가 쓴 '내 아이의 다짐'이라는 글에서 '내 아이'를 '타인'으로 바꾸어도 뜻은 무리없이 통한다. 

내 아이는 내가 색칠할 도화지가 아니며,

내가 다듬을 다이아몬드도 아니다.

내 아이는 세상과 공유할 전리품이 아니며,

내 영예로운 훈장도 아니다.

내 아이는 하나의 견해나 기대 혹은 환상이 아니며, 

나를 비추는 거울도 내 유산도 아니다.

내 아이는 내 인형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며,

내 노력이나 소망도 아니다.


​내 아이는 더듬거리고, 비틀거리며, 

시도하고, 울고, 배우고, 망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아이 아닌 어른도 마찬가지다. 부모도 다르지 않다. 누구나 더듬거리고 비틀거리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울고 망치면서 다시 도전할 수 있다. 다들 그렇게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갈 수 있다. 아이를 기르고 있는 많은 보호자들과 교육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많이 찾는 감정코칭 책이겠지만, 그저 나를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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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ㅣ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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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어떤 것을 깊게 공부하는 일을 '해상도가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유튜브 영상을 볼 때 144P 화질과 4K 화질이 비교 불가할 만큼 다른 것처럼, 지식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도 그러하다. 어떤 일을 자세히 알게 되면 이전에 그것을 흐릿하게 보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인식과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질 때마다 따라오는 뿌듯한 만족감과 성취.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면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많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전달했다. '이 전쟁은 적어도 내 지리지식을 넓혀주고 있어요. 석 달 전 나는 세계에 폴란드 로즈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요. 들어도 아무 것도 몰랐을 테고 알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그 면적, 위치, 군사상 의미에 이르기까지요.' '한때는 나도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쓰지 않았지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식은 넓어질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는 괴롭답니다.' <베를린 함락 1945>를 읽는 일이 바로 그렇다. 



나는 전쟁을 전혀 모르고 겪어보지도 않았으니 작가의 말대로 '무장해제된' 사람 그 자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회인이 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전체가 전쟁들의 결과물로 이루어졌음을, 전란을 빼놓고 우리 사회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함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가 궁금해서 땅을 파고 있으면 손에 걸려나오는 건 언제나 전쟁이었다. 막연한 공포심 때문에 그걸 내려놓은 다음 다시 묻어버리면 이내 평화로워질 수 있었지만, 그건 영원히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올해 6.25 전쟁(한국전쟁)이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자 나는 미루고 또 미루던 1~2차 세계대전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매일 검색 포털에 뜨는 전화(戰火) 소식들을 외면하고 넘어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베를린 함락 1945>가 늦게 번역되었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때를 고를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올해 5월 말, 러시아가 바흐무트를 점령한 직후 이를 1945년 베를린 함락에 비유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서점의 세계사 신간 코너에는 이 책과 함께 <제3제국사>가 함께 진열되어 있었고, 관련된 책들이 줄지어 꽂힌 아래 칸에는 <1945>, <제2차 세계대전>, <아르덴 대공세 1944>, <한국전쟁의 기원>, <독소전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들이 있었다. 세상 어딘가는 오늘도 전장의 화마에 휩싸여 있고 우리는 아직 세계대전을 옛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릴 만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조금이나마 다각도로 공부했다고 할 만한 전쟁사는 한국의 삼국통일전쟁과 임진왜란밖에 없는데, 그로 미루어보면 전쟁을 다룬 글들은 크게 정치​·외교와 전략​전술·군사지리·무기 두 파트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베를린 함락 1945>는 후자 쪽에 약간 더 가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에(작가가 전직 육군 장교 출신이다!), 전자에 관련된 배경지식들을 먼저 알고 나서 읽는 것을 권한다. 책은 

1. 1945년 4월 16일~5월 2일에 걸쳐 

2. 러시아의 붉은 군대 Vs.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진 

3. 베를린 전투

를 다루고 있으므로 전쟁의 결정부터 전개, 귀결, 영향과 유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사고들을 통사(通史)적으로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일은 무리다. 물론 저자는 다짜고짜 바로 1945년 봄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며, 300쪽에 가까운 분량을 통해 서서히 나치 독일의 수도를 향해 다가간다. 유럽을 점령했던 제국의 수도에서 '비인간적인 도적의 수도'로 전락한 베를린으로. 



700쪽이 넘는 벽돌책이지만 무게는 의외로 가볍다. 양장본이고 제본이 잘 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안정적으로 잘 펼쳐지고, 책을 고정시키는 문진과 독서대의 도움 없이도 읽기 편했다. 지정학적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자료가 충실하며, 2차 세계대전이나 독소전쟁의 양상에 대해 잘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를 찾고 싶을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만큼 마지막에 인물 색인이 잘 정리되어 있다. 동생은 괴벨스와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만 골라 읽더니 대단히 불유쾌한 얼굴로 책을 돌려주었는데, 며칠 뒤 히틀러의 최후만큼은 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책을 가져갔다. 



시종일관 돋보이는 부분은 작가의 서술 방식으로, 그는 러시아 연방 국립기록보관소에 있는 미공개문서까지 수집하며 검증된 사실을 생생히 보도하고(시사 저널리즘), 나날의 사건들이 역사와 인간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평가하며(서사 기록) 우리로 하여금 격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문예). 독자는 비버의 글을 읽으며 단지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정서를 느끼는데, 그 감정의 진폭이 너무 엄청나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현실의 사건과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한' 역사는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이게 문학(文學,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저자가 연표와 사건과 잘 알려진 인물들을 쫓아갈 때는 빠른 속도감과 적당한 거리감 때문에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문장은 간결하고 대사가 많아 더더욱 소설 같다. 그러나 그가 참호와 방공호에 있는 개개인의 일기​·서신​·회고록을 가까이 클로즈업해서 눈앞에 들이댈 때마다 나는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의 증언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얼어붙었다. 군대를 지휘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총 한 번 제대로 들지 않은 하인리히 힘러를 비웃고 경멸하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계속 읽겠다는 용기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멈추고 주저하고 책을 덮어 달아났다. 

어떤 어머니들은 동사해 둘둘 말아놓은 아기 위에 엎드려 울었다. 다른 어머니들은 눈 속에서 정신을 잃고 길가의 나무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아이들은 무서워서 그저 울며 가까이에 서 있었다. 어차피 그 추위 속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 죽은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곡소리가 침묵을 깼다. 공포와 공황이 나를 덮쳤다. 그런 참담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리고 이 광경 뒤로 무섭고 강력한 환상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우리가 바로 이들이었다. 우리에게 닥칠 미래였다. 



여성이라면 끝까지 이 책을 잡는 일이 더 괴로울 것이다. 약육강식에 따른 재앙, 방화, 파괴, 약탈, 그리고 강간. 전시가 아니더라도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쟁 범죄로서의 강간이 어떤 것인지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그리신 <빼앗긴 순정>을 보고 뱃속이 싸늘한 한기로 가득차 부르르 떨었던 경험을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2002년 이 책이 출간되기 전 러시아는 베를린에서의 집단 강간을 이야기하는 일은 '나치 침략에 저항한 소련의 신성한 성취'를 더럽힌다며 반발했다. 붉은 군대의 성전(聖戰)은 그런 비도덕적 사건 따위로 흠집이 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러시아는 아직도 그때처럼 '독일인, 특히 독일 여성들(그리고 모든 적대국)에 대한 우리 병사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며, 우리는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에서 '사냥당한' 피해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저자 역시 그 책을 일부 인용해 대조국전쟁(The Great Patriotic War)의 추악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2023년, 우크라이나 인권변호사 마트비추크는 고발한다. 처벌받지도 단죄되지도 않은 전쟁 범죄가 21세기에 어떻게 재현되는지. 



글쓴이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에서 강간이 어떤 것인지도 말한다. 윤간은 병사들 사이에서 유대감과 동지애를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며, 성폭행이 그들에게는 휴식 겸 성적 욕구도 충족하는 거라고 설명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전쟁 강간은 최초에 복수라는 명분 아래에서 잔인하고 즉각적인 폭력으로 나타난다. 적국과 적군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 위한 대체물로 힘없는 여성이 선택되고, 가해자의 비인간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단계도 이때다. 일찍이 적이 저질렀던 짓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 뿐이고, 이제는 적이 마땅히 그 고통을 겪을 차례이므로 여성들은 증오를 받아내야 할 보복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강간은 전쟁의 전리품을 취하는 행동과 흡사해지고, 더 나아가면 피해자들도 생존에 대한 위협과 거듭된 굶주림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음식을 얻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서, 단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소련군 장교의 '점령군 아내(현지처)'가 되었다. 히틀러는 '남자가 위대할수록 여자는 더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며 강한 남성을 찬양했지만, 독일 남성들은 이 거대한 패배에서 도피하기를 원했다. 여성들이 집단 강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말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던 모습과 달리 남자들은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조차 회피했다. 



저자는 세뇌를 통해 학습한 체제 이념이 인간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적들을 절멸시키고 자신도 죽기를 원할 만큼 삶이 산산조각난 히틀러 유겐트 소년들. 페이지가 넘어가고 윤간당한 피해자들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자 가해자들이 말한다. '러시아 병사들은 여자를 쏘지 않아. 독일군이나 그러지.' 적보다 내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이념은 증오를 심어주는 선전활동으로 더 강화되고, 결국 이쪽도 저쪽도 우리의 분노는 비이성적이지 않고 우리가 하는 복수는 맹목적이지 않다는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야 만다. 그러니 내가 더 우월한 사상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너희를 해방시키러 왔다고 생각한 소련군들이 독일 농가의 부유한 생활상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다 못해 격노한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질투로 내가 가질 수 없는 라디오, 피아노, 거울, 도자기를 깨부수었다. 배신감에 휩싸여 (장교라면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쓸 수 없을) 가죽 소파를 찢어버렸다. 그러다가도 온갖 자재들을 본국으로 부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온 사람이라면 여기서도 현대 화학​·물리학이 자본주의며 군국주의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또 그게 얼마나 비극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시체를 가공해 비누를 만드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만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소련은 독일의 실험실과 공장들을 빼앗아 본국의 핵 프로그램에 활용하려 했지만 사회주의의 패배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독일에서 많은 장비를 강탈했으나 원자재가 없고 연구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그 모든 게 그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군사주의와 궤를 같이 하여 발달시키려던 과학은 자본의 힘 없이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서문부터 마지막 인용자료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명멸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독소전쟁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 책을 골랐던 거지만, 그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사에도 완전히 파묻히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계대전 하면 떠오르는 히틀러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상세히 쓰여있으나 그건 전혀 놀랍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 망상도(이런 망상병자를 춘원 이광수는 '가정도 없고 향략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사람'이라며 숭배했다. 세계대전이 한국인의 근현대 정신세계와 절대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상자가 아무리 많아도 미래를 위한 영광의 씨니까 괜찮다며 소리친 광기도, 비루한 권력을 탐한 비열한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불멸을 원했고 확실히 역사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치욕을 얻겠지만 나는 그를 필요 이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인생사를 더 잊지 못할 것 같다. 모든 이름을 떠올릴 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 오래도록 고여있을 것이다. 



너무 어려 '어린이 병사'라 불리며 지옥으로 내던져진 아이들,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갈 테고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겠지'라는 노래를 부르는 붉은 군대, 화장실 휴지를 양팔에 가득 들고 죽은 여자, 후송된 중상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연인을 발견하고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노르웨이 간호사, 소련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던 예배 광경, 인간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봄이면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나는 튤립과 라일락, 베를린의 정복자로서 자신이 엘리트라고 생각했던 소련군 병사들, 절망적인 상태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려고 수류탄을 던지려던 어린 소년과 미친 짓 하지 말라고 그를 저지한 병장, 조국의 변절자라며 총살당한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죽지 못해 살아남았고 살기 위해 포로수용소에서 일했을 뿐이건만), 수도 바르샤바가 파괴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독일에 대한 어떤 자비심도 가지지 않았던 폴란드인 부대들 그러나 폴란드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했던 스탈린, 어머니를 강간하는 소련군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총에 맞은 13세 남자아이...... 이런 삶을 그리고 이런 죽음을 어떻게 망각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겠나. 그것도 정전(停戰) 상태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해상도가 너무 높아져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버렸다 해서 다시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사건에 속한 인간들을 '독소전을 겪은 독일인 전체'이라는 식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균질한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걸 잊는다면 과거사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저자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로 통제되지 않는 권력의 잔인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도 인간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깊이 사유하며 극한에 놓인 이들의 최악과 최선을 번갈아가며 조명한다. 탁월한 연구가인 동시에 빼어난 문장가이기는 쉽지 않은데 앤터니 비버는 제대로 된 전사(戰史)를 찾는 탐구자와 다큐멘터리 혹은 르포 문학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 양쪽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다. 세계사에서 중요한 자리에 놓여있는 전투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잔혹한 역사의 전환점을 어떻게 버텼는지 알고 싶은 이에게도 권한다. '몰살 투쟁만을 중심에 둔다. 우리는 적을 살려두는 식의 전쟁 따위 하지 않는다'는 연설이 흐르던 시대, 원한이 충돌하던 시기를 사람들은 무슨 수로 살아냈는가? 저자는 역사의 물줄기에서 인간을 놓치지 않는다. 



읽는 이의 정신에 많은 씨앗을 뿌리는 책이며, 그 씨앗이 어떤 방향으로 싹터 자랄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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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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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소설과 영화/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버릇처럼 늘 고등학교 문학시간이 떠오른다. 문학의 갈래(장르 구분)를 공부하던 날, 계절은 가을이었고 날씨는 맑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필 5교시라 짝이 거의 가수면 상태에 빠졌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는 일이 잦은가 하면, 우리가 그날 국문학에 관해 '극과 서사 ≒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개념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느 서사든 주인공의 '자아'가 있고, 그와 대립하는 '세계'가 있는데 어느 한쪽이 완전한 우위를 점하지는 않는다. 모든 극과 소설을 이렇게 일률적으로 다룰 수는 없겠지만 수업 마지막 10분 동안 우리는 <콩쥐팥쥐>와 <인어공주>부터 <해리포터>와 <난쏘공>에 이르기까지 아는 이야기를 죄다 꺼내며 그 이론을 검증(?)했다. 



여기에도 '세계'와 갈등하고 있는 '자아'가 있다.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2016년을 사는 열다섯 은유가 느리게 가는 우체통 시스템을 통해 1년 뒤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5년 평생을 데면데면하게 지내온 아빠는 갑자기 재혼을 선언해 은유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안기고, 이 '엿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은유는 독립(a.k.a 가출)을 결심한다. 그런데 은유 말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 편지에 답장이 왔다. 바로 그 다음 페이지에서 종이 색깔이 연하게 물든 분홍보라색으로 바뀌고, 또다른 은유가 나타난다. 이 은유는 국민학교(!) 3학년이고 1982년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성실하게 '-읍니다' 맞춤법을 지켜가며 말을 걸어온다. 여기까지 읽고 책배를 보니 흰색과 보라색이 교차한다. 소설은 시작부터 끝까지 편지와 편지로 이루어져 있구나. 나는 순식간에 단짝 친구와 교환일기를 주고받던 중학생으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열다섯 은유가 잔뜩 열이 올라 너 누구냐며 따지는 편지를 부치자, 이번엔 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저쪽 세상의 국민학생 은유가 그새 2살을 더 먹은 것이다. 이미 재개발되어 사라진 주소, 편지에 동봉된 1982년산 500원짜리 동전과 위조지폐 같은 2000년대 천 원 한 장, 인터넷 검색으로 과거를 알아보는 소녀와 미래에서 도착한 예언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아이, 간첩과 암호문이란 무시무시한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국민학생과 코스프레니 사이코패스니 하는 외래어가 입에 붙은 중학생. 두 동명이인은 서로를 미친 사람 취급하다가 이내 자신들이 쓴 편지가 시간을 건너 여행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며 대흥분한다. 과거에 있는 은유야, 너 대단한 행운을 잡은 것 같지 않아? 어쩌면 우리가 미래를, 역사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둘은 과거와 미래에서 안부를 주고받는 특별한 사이가 된다. 



왜 우리는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문자로, 메일로, 편지로는 쓸 수 있을까? 

- 너한테만 이야기하는 거야.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인 것도 모자라 쪽팔리게 멍청한 말까지 해버렸어. 

어째서 가까이 있는 이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멀리 있는 이에게는 다 풀어낼 수 있을까?

- 난 15년 동안 혼자 방치된 채로 살았어. 세상 어떤 아빠가 자식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눈으로 봐? 아빠도 싫고 아빠가 재혼하려는 여자도 싫어서 가출하고 싶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느리고 번거로운 편지로 소통하고 교감할까? 

- 언니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나를 돌아보게 돼.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는 점점 더 지금의 나에게 가까워지고 있는데, 어째서 편지에 쓰인 글씨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걸까. 언니, 아직 거기 있는 거지?



이제는 거의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린 '시간 여행' 아래 이루어지는 소설이지만, 여기서 '세계'는 한 발 더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다르게 설정한다. 미래에 사는 은유가 딱 한 살을 더 먹을 동안 과거의 은유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20년을 겪는다. 그래서 둘은 처음엔 언니 동생 사이였다가 이내 친구가 되고 곧 다시 거꾸로 동생과 언니가 된다. 처음엔 미래의 은유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만(학력고사 문제를 찾는 걸로도 모자라 로또 당첨 번호까지 알려주겠다는 야심찬 청소년이여!), 이내 과거에 사는 은유가 어른으로 자라 탐정 노릇을 하게 되었다. 중학생 은유는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도, 이름도, 아무 것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지와 불신과 의심에 시달리는 은유 동생을 위해, 과거에 사는 은유 언니가 그나마 신상명세라도 파악된 아빠를 찾아나선다. 과거에서 모은 씨줄과 현재에서 얻은 날줄이 교차되어 은유들은 서서히 진실에 다가서고, 왜 하필 두 사람의 편지가 시공간을 거스르고 앞질러가며 서로에게 도착했는지도 깨닫게 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의 편지는 마치 내 앞으로 오는 것만 같아서, 40쪽 즈음 읽었을 때 이미 나는 은유들과 친구가 되어있었다. 이야기는 소꿉놀이 같은 교환일기로 시작되었다가 중반부에는 청소년 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의 이중주로 변화하고, 이내 긴박한 추리소설을 거쳐 애정어린 성장담으로 마무리된다. 낯선 타인들의 시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비밀과 오해가 벗겨지면서 파편화된 '세계'가 비로소 통합되고,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거'냐고 괴로워하던 은유는 '계속되고 또 계속되는 인연'을 느끼며 가족을 되찾는다.



예상 가능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시종일관 긴장을 내려놓지 못했다. 왜냐하면 소설가 이꽃님을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죽이고 싶은 아이>의 기막힌 엎어치기로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파격적이고 강렬한 미스터리는 없었지만, 대신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곳곳에 사소한 사랑스러움이 넘쳐나서 좋았다. 서간체 문학 특유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 우리를 금방 은유들의 세상으로 빠지게 만들고, 30년 차이가 나는 시대상은 편지 곳곳에 낯익은 현실성을 부여한다. 특히 캐러멜 마키아토가 뭔지 궁금해하다가도 그게 간첩 암호라면 알려주지 말라고, 혹시 연탄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서 미친 거라면 물김치 국물 좀 마셔 보라고 하는 1984년 은유의 단호함이 그야말로 압권이다. 편지 형식답게 입말의 말 맛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이꽃님 작가의 주특기 중 하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내어 웃게 되는 건 덤이다. <키다리 아저씨>,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채링크로스 84번지> 등 편지글 형식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도 네 마음에 들 거야' 하는 메모와 함께 건네주고 싶어진다. 



우울하고 울고 싶어질 때 우리는 의외로 가족과 친구에게 괴로움을 흘릴 수 없다.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거리감 없이 매일 보며 일상을 함께 하는 사이라면 뭐든 다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관계는 생각보다도 끈기와 지구력이 약하다. 은유는 아빠에 대한 고민을 친구에게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말하지 못하고(아빠도 마찬가지다.) 또다른 은유 역시 언니에게서 비롯된 열등감을 주변과 나누지 못한다. 두 은유는 멀리 있어서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마주대할 기회가 없었지만, 그토록 아득하고 그만큼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세상은 계속될 거'라는 말을 들은 다음 '걱정하며 살기엔 우리 삶은 너무 짧다'는 말을 해주기. 모든 게 뒤엉켜버린 순간에도 언니만은 그대로인 거냐고, 그렇다면 나도 늘 언니의 동생일 거라는 절박함에 '여전히 내 동생인 은유'라고 돌려주기. 쏟아내면 꼭 받아주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은유는 휘청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만날 수 없는 친구, 세상에 없는 엄마, 다가오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 아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아빠의 여자친구. 은유를 둘러싼 비밀들, 나를 할퀴고 상처입히는 것 것만 같은 세상, 영원히 갈등하고 대립하여 화해란 불가능해 보였던 '세계'... 하지만 그 세계는 결코 일방적인 우위에 놓여있지 않았다. 언젠가 해리 포터에게 그의 스승인 덤블도어가 말했다. '강력한 사랑은 그 나름의 독특한 흔적을 남긴다는 걸 알고 있니? 흉터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흔적도 아니지만... 그렇게 깊은 사랑은 우리를 영원히 보호해 준단다. 너는 그렇게 아름다운 무언가의 흔적이 남겨진 사람이지.'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는 모든 서신을 통해 은유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한다. 



쿵쿵대며 다가오는 세계를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은유는 긴장했지만, 세계는 사실 오랫동안 은유에게 가기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은유를 안을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를 생각하고 네가 나를 생각하는 한 우리는 만날 수 없어도 잊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옆에 있는 사람과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특별한 기적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네가 거기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서로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과도 같은 일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검은 표지에 반짝이는 색상으로 제목이 쓰여져 있다. 검은 바탕을 긁어내면 아래에 묻혀있던 총천연색들이 드러나는 스크래치 기법처럼, 이 소설은 어두운 밤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아내는 이야기다. 더 많은 것들을 내 세상 안으로 들이고 내가 자라며 많은 날들을 잊어가더라도, 우리는 이제 서로를 모르던 때로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단선되지 않았고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므로. 아빠가 은유에게 처음 쓴 편지까지 포함해서, 모든 문장이 사랑의 은유 같다. 언제든 세계를 건너 네게 가겠다는 다짐. 네가 부를 때 나는 언제나, 지금도 여기에 있다는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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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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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분명히 적혀있는데도 두 번째 이야기를 읽다가 '어? 아까 나온 인물 아닌가?' 하며 연작소설임을 깨달았다. 서로 상관없는 인물, 공간, 배경을 가진 단편집 모음이라고 생각하다 연작이라는 걸 안 순간 나도 모르게 좀 더 집중하게 되고 그걸 깨달으면서 웃었다. 



범인을 밝혀야 하는 추리소설도 아니고 누가 내게 시험을 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다음 글에는 누가 등장하게 될 지 그런 걸 알아맞혀보고 싶은 기분. 지금 읽고 있는 글에서는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그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물 간 관계도를 그려보서 전체를 파악하고 싶은 기분.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아, 그 인물 이야기도 보고 싶었는데 역시 끝까지 스쳐지나가는 조연으로밖에 나오지 않았어.' 같은 아쉬움. A가 주역인 이야기에서 B는 엑스트라일 뿐이지만 C 스토리에서 B가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나타날 때의 작은 짜릿함. 



이 책을 함께 읽은 친구는 <은하의 밤>과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에 등장하는 아이돌 양요를 더 많이 볼 수 없어 아쉬워했고,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인물 '현우'는 그만 봐도 될 것 같았다는 말로 나를 웃겼다. 다른 독자들은 어느 인물이 드러나기를 기대했는지, 누굴 좀 더 보고 싶었는지 앙케이트 설문이라도 해보고 싶다. 



그리하여 읽는 이들은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것을 책장에 넘어갈 때마다 깨닫게 된다. 손 안에 작은 만화경이 있는 기분이었다. 인물들은 교차되었다가도 평행선을 달리고, 우연히 또는 필연적으로 만날 것 같았다가도 멀어진다. 단편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사건들은 꽤 격한데 살짝 마른('건조하다'기보다도 '조금 마른' 느낌) 문체 때문에 그 감정의 높고 낮은 파도들이 확 덮쳐오지는 않는다. 그런 후폭풍은 책을 다 읽고 회상할 때야 찾아온다. 읽는 도중에는, 모든 것이 화끈하게 터지는 대신 손 안에서 잘못 굴리면 작게 '파삭'하는 소리를 내면서 깨질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게 꽤 조심스러웠다. 책이나 문장을 무슨 그런 식으로 비유하냐고 묻는 이도 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 책은 동물계보다는 식물계에 가깝다. 그리고 생각보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글들이 담겨있다. 



글은 거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묘하게 1인칭 관찰자 같은 분위기를 전달하며, 때때로 각 단편의 주인공들보다 그 주인공이 지켜보고 있는 타인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유리벽 너머로 독자인 내가 그들 모두를 관찰하고 있다는 감각. 가령 <데이, 이브닝, 나이트>에서는 한가을이 주인공이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병원 동료 안미진과 환자 승미 씨였다. <하바나 눈사람 클럽>에서는 한 두 페이지밖에 등장하지 않는데도 남희가,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었다가도 모진 말을 듣고 울게 되는 남희가 좋았다. 



예쁜 표지와 크리스마스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이 주는 정취 때문에 따스한 힐링을 기대하고 소설을 펼친다면 조금쯤 서운할 수도 있겠다. 서늘한 북풍이 몸을 스쳐지나가다가 얇은 어깨담요를 살짝 걸쳐주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너무 춥고 싶지 않다는 분께는 중후반부에 있는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를 먼저 권하고 싶다. 작가가 배치한 순서대로 읽지 않는다 해도 책의 인상을 해치지는 않는다. 반려견 설기를 잃은 세미가 카카오톡 목록을 보며 개를 키우는 이들에게 연락할 때, 내가 모은 강아지 사진들이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느릿하게나마 조금씩 설기 없는 삶을 견뎌내려고 하는 세미를 보고 난 다음, 



혹시 연애 이야기 같은 건 없나요? 하고 묻는다면, 이번에 추천하고 싶은 건 <월계동 옥주>와 <하바나 눈사람 클럽>이다. 앞은 예쁘기도 하고 깨지기도 쉬워보이는 구슬 같은 청년들의 여름, 뒤는 성마른 청소년들의 겨울. 친구가 되었다가 다른 감정이 생기고 그래서 힘들고, 어떤 관계는 깨져나가고, 어떤 사이는 다시 만날지도 모르지요. 눈알을 굴리며 얘들 재회하나요?! 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그냥 이대로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다음으로는 리얼 르포 예능국 이야기;;인 <은하의 밤>, <첫눈으로>, <크리스마스에는>을 차례로. 



많은 캐릭터와 많은 서사를 가진 글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 그 자체보다 어떤 장면이 또렷하게 새겨지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크리스마스 타일>이란 소설을 <월계동 옥주>의 한 장면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호숫물을 떠다 등잔을 밝힐 정도로 아름답고 맑은 호수. 한 그룹을 이룬 친구끼리 모두 같이 가고 싶어했지만 결국은 모두가 헤어지고, 옥주와 예후이가 둘이서만 갔던 거울 같은 호수. 두 손으로 물을 떠다 등잔에 넣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지만 어쩐지 책을 읽는 내 이마 위로 그 등잔불이 비추는 느낌이었다. 



그 물이 흐르기도 하고, 얼기도 하고, 눈으로 변화해 내리기도 한다. 그 흐르는 물을, 눈을 맞으며 나와 내 일상을 되돌이켜보게 되는 책, 마냥 환하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메리 크리스마스'인 책, 금이 간 타일도 완전히 깨져버린 타일도 있지만 '못 쓰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 이야기, 내가 읽은 <크리스마스 타일>이다. 여름에 읽어서 더 좋았다. 겨울 입김과 쌩쌩 부는 바람에 지쳤어도, 이별의 상실을 겪었어도,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다. 인물들도 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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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 ㅣ 궁궐 기담
현찬양 지음 / 엘릭시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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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부터 입추까지는 세상 누구도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내가 더위에 유독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한 달 동안은 누구도 날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타인에게 그 어떤 것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계절, 뻔뻔스러운 말일지도 모르지만 책만은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한겨울에 읽었으나, 역시 여름이야말로 '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기담과 잘 어울리는 계절 아니겠나. 더구나 CCTV가 활약하는 현대보다는 먼 옛날 이야기가 더 흥미로운 법이다. 고려 말기의 그림자가 짙게 남아있고 유교국가가 확립되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시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 시대 인물과 배경에 능통해 딱히 부연설명이 필요없고 권력제도가 아직 어딘가 붕 떠 있는 때인 여말선초 궁궐이 배경이라는 것에 일단 높은 가산점을 주고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시기ㅡ 피바람은 몇 번이 불었고 한을 품은 채 이승을 떠난 사람들은 몇이겠나. 


세종과 성종을 거쳐 유교국의 기틀이 완전히 마련되기 전이지만, 태종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왕으로 등장한다(단, 그는 논리적 성향과 '공포 및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걸 알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알에서 탄생하던 신화적 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을 조각하던 주술적 시대에서 벗어나던 때의 왕. 감정과 느낌은 자신이 어쩌지 못하더라도, '이성'이 우선시되는 시대를 만들고자 했던 왕이 이 책의 배후에 버티고 있다. 많이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그 무게감만은 차고도 넘친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딸 경안궁주에게 궁 안의 금기+궁녀규칙조례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궁주'라는 호칭 자체가 고려시대의 여성 작호이다. 이렇듯 전 시대가 남긴 유산들이 다 정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현 시대가 완전히 정립되지도 않았다. 새로운 궁이 만들어지고 나라의 주인이 바뀐 때 '이야기'가 탄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보고 들은 것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구중궁궐에서, 순종과 성실만이 최고 미덕인 궁녀의 목소리로 궁궐의 비밀들이 흘러나온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면서, 수련회와 수학여행을 가서 친구들끼리 교실과 방의 불을 꺼놓고 숨죽이며 나누던 그 이야기들의 분위기가 그대로 되살아난다. 


책 앞부분에는 세로로 적힌 궁녀 규칙 조례가 한 장 길게 접혀있는데, 말로는 궁에 온 걸 환영한다고 되어있지만 이것도 저것도 온통 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의구심을 품지 말라는 말만 가득하다. 처음 읽을 때는 궁이라는 곳이 그렇지 사람이 사라져도 찾기 어렵지 하고 넘겼지만, 사실은 이런 조례를 만들어야만 했던 비밀이 저 멀리 숨어있고 그 비밀은 후반에야 폭로된다. 그리고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가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정말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괴이쩍인 이야기들에 다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순간, 잠 못 드는 밤의 잠기운이 싹 달아나버릴 수도 있으니 주의! 


궁녀들은 궁의 또다른 주인이자 공무원이고, 직업인이고, 여자이며, 서로에게는 직장동료이자 친구고 또한 지지고 볶는 경쟁상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의 전개 방향과 등장인물의 시점에 따라 책은 오피스 드라마가 되기도 하고,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리는 여자 기숙사의 즐거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여고괴담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궁궐은 그들의 집이고 학교고 직장이었다. 그 복합공간에 얼마나 많은 웃음이, 그리고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과 비명이 잠들어있겠는지. 하나의 줄기 아래 뿌리를 파보면 여러 맛이 나는 감자와 고구마가 있는 기분이 들어 읽는 내내 즐거웠다. 삼국통일전쟁 시기의 신라 강수 선생이 등장해서 읽는 이를 깜짝 놀래킨다거나, 춘향전의 탄생에 관한 비화로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거나, 지금도 남아있는 옛 절기행사나 풍습의 기원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거나. 


미스터리/기담/괴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어쩐지 꼬박꼬박 그런 장르를 읽게 되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괴담 시리즈를 읽은 이들이 한국 책도 추천해달라고 할 때 골라줄 것이 마땅치 않았다. 구비문학과 민속문학 서적에 수많은 전설과 민담과 설화가 실려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ㅠㅠ 올해 이 책을 많이 추천했는데, 대부분 다 좋은 반응을 돌려주어 뿌듯했다. 2부가 결정되었다고 들었는데, 영화나 드라마로 촬영되는 것도 바라고 있다. 


*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마지막에야 적어놓자면 내가 역사용어에 능통하지는 않지만 왕의 딸이거나 왕의 후궁들로서 하나의 독립된 거주공간(여기서는 주로 '당堂'이라든가 '재齋')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이 자신을 '본궁'이라 칭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본궁'이 그런 식의 지칭이나 호칭으로 불린 적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다. '냉궁'이란 용어도 마찬가지고. 작년에 방영된 퓨전사극 드라마에서도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부분인데, 너무 많은 형식을 지키는 것에 지쳐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부분을 소홀히 하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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