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밑바닥에서 고양이가 가르쳐준 소중한 것
다키모리 고토 지음, 이경희 그림, 손지상 옮김 / 네오픽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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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찾아주거나 찾으러 다니며 만나게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묶은 일본 소설, 이라고 말하면 다들 아아, 하지 않을까. 아아, 뭔지 알 것 같다. 딱 그런 느낌의 소설이었다. 몇몇 장치들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서 한숨이 더러 나오기는 하는데, , 빤한 맛에 보는 소설도 있는 거고. 그래도 이야기는 따뜻하고 고양이는 활자만 봐도 귀여워서 반은 먹고 들어가니까. 결론적으로 읽는 게 더 낫다는 쪽의 빤함이어서 시간이 아깝진 않았다. 자신과 현실을 제대로 마주보고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게 주요 메시지인데, 우린 이미 다 알지만 민들레 씨앗처럼 의지 없이 이 땅에 뿌리를 박고(70p) 살고 있는 고로 씨는 이걸 몰라서, 이제야 큰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이제 고양이 구하러 가자! 그리고 그는 고양이를 찾기 전보다 왜인지 더 믿음직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 역시 고양이는 인류를 구하나 보다. 그렇게 갈무리한 소설이었다.

 

 아마도 지금의 현실은 나 자신에게 편한대로만 생각해온 것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 2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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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비밀
신혜선 지음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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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저지르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한데도 그러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가해자는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가고, 법과 절차의 테두리 속에 있는 경찰은 어쩔 도리가 없다. 주변인들마저 가해자의 편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 속에서 죽어나는 건 피해자다. 평생을 싸워야 하는 두려움과 죽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 그들은 스스로를 구제할 방법을 찾아 나선다. 무모할지라도 확실한 해결책을. 이 일련의 과정들이 <동생의 비밀>에선 형제들을 통해 전개된다. 주인공 병학이 익히 잘 알고 있다고 단정했던 동생, 병윤의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걸 시작으로 형제의 실체가 낱낱이 파헤쳐진다. 솔직히 좀 뻔한 흐름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가닥이어서 꽤 흥미로웠다. 대책 없이 사건을 파고들려는 형 때문에 초반 긴장감이 대폭 떨어지긴 했었는데 지금 와 보니 그는 본래 어설프게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닌가 싶고. 애초에 이런 소설은 중반 이후까지는 봐야 가닥이 좀 잡히지 않나. 도중에 그만두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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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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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장을 펼친 당신은 분명 놀랄 것이다. 작가의 전작을 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크게 놀랄 것이다. 내가 그랬다. 긴긴 기다림 끝에 도착한 짝남의 답장을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던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읽자마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얼빠진 소리를 냈다. “!” 그리곤 외쳤다. “아니, 이 인간이?!”
 
프레드릭 배크만은 로맨스의 귀재다. 다른 독자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렇다. 나는 그만큼 사랑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도 드물 거라 생각한다. 그는 고작 한 문장을 덧대는 것만으로도 심쿵하고 뭉클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그 사랑의 범주가 무한하고 한계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히 천부적이라 느껴질 정도다. 연인이든, 산 자와 죽은 자든, 부부든, 남매든, 친구, 할아버지와 손자, 심지어 마을 주민과 동네 고양이 사이에서도 그가 쓰면 남다른 애정이 읽힌다. 독보적인 울림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금세 사랑에 빠져버려서 등장인물들을 따라 웃고 울고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니 나는 더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양반은 어쩌자고 이토록 으스스한 서두를 내 머리에 꽂는 것인가. 사랑둥이들은 어디 갔지? 기껏해야 까칠한 할배가 나오는 거 아니었어?
 

3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11p)

 
숲속에 운동경기를 좋아하는 어떤 마을이 있다(314p). 어둠과 추위 실업자들뿐(25p)인 작은 마을이다. 희망에서 점점 더 멀리 쇠락해가는 도시, 그곳이 바로 베어타운이다.
 
베어타운이란 이름처럼 마을 사람들은 곰을 연상시킨다. 열심히 노력하고,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고, 투덜거리지 말고, 입 꾹 다물고, 대도시 개새끼들에게 우리가 어디 출신인지 본때를 보여줄 것(15p)이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청소년들에게 열렬히 가르치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하키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더욱 그렇다.
 
하키. 이 책에서 하키는 거대한 배경이 된다. 베어타운=하키라고 써도 무방할 정도다. 베어타운 사람들은 하키를 사랑한다. 병적일 정도로 사랑한다. 베어타운에서 하키를 뺀다면 정적만 남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는 곰! 우리는 곰! 우리는 베어타운의 곰!(108p)을 연호하며 정말 곰처럼 포효한다. 몸소 힘과 몸집과 공포를 뜻(133)하는 구단의 상징이 되고 있다. 그들은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족속(360p)이기에 승리를 원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지금이다. 이번의 승리로 20년 전의 영광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망이 없는 마을을 구원할 재건의 불씨. 그들에게 하키는 더 이상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다. 경제고 자존심이며 생존이다.
 
공교롭게도 불꽃은 아이들이 쥐고 있다. 청소년팀의 하키 시합이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아이들의 우승이 마을을 살릴 것이다. 그 시합은 전부나 다름없(22p)기에 다들 무엇이든 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어린 선수들조차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법한 극단의 각오를 보여준다. 그들은 부러진 다리로도 시합을 할 것이다. 어떤 부상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하키란 본래 그런 것이므로. 하키는 일부에 만족하지 않는다. 전부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럴 때, 하나의 공동체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곰처럼 내달릴 때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예상치 못한 피해자가 나오고 그 피해자를 은폐시키거나 변질시키려는 시도가 자행된다. 성폭행이라는 극악의 사건이 벌어져도 마찬가지다.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지키고 싶은 쪽을 지키면 된다. 혹 그쪽이 가해자일지라도 곰들이 똘똘 뭉치면 그는 당한자가 될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쉬운 일이다. 무리의 힘은 그래서 대단하다. 목적에 눈이 먼 자들이 말한다. 그건 공동체를 위해서라고,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인 거라고. 되뇌고 스스로 속는다.
 
하키를 유난히 사랑하는 마을의 이야기는 결국 공동체란 무엇일까(418p)라는 질문에 닿는다. 똘똘 뭉치면 무서울 게 없는 집단의 힘이 잘못된 방향을 향했을 경우 얼마나 맹목적으로 부당해질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폭력적인 방법으로 개별적인 존재들을 위협하는지, 작가는 세세하게 보여주었다. 고찰해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당신은 어느 무리에 곰이 되어 힘을 보탤지, 누구를 리더로 선택하여 따를지. 옳고 그름을 잘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더라도 선과 악은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언제나 바른 눈을 지켜야 한다고. 여자아이가 싫다고 할 때는 정말로 싫은 거(450p), 하키는 지금까지 아무도 강간한 적이 없(446p)다는 것, 알려주지 않아도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쓰다 보니 공동체로 귀결되었지만 <베어타운>을 놓고 할 수 있는 얘기는 아직도 잔뜩 남아있다. 성폭행을 당한 소녀와 그녀의 가족, 아버지의 자살을 경험한 십대 동성애자, 완벽 밖에 모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천재소년, 허리가 아픈 어머니를 위해 반드시 출세하고 싶은 어린소년, 얻어맞는 게 일상인 임대 주택 거주 소년들, 하키로 정해지는 계급, 소녀와 소년의 결말, 구단을 둘러싼 정치적인 세력들, 잘못된 일이란 걸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들……. 생각나는 것만 언급해도 이만큼이다. 이 많은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겨져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마을에 사는 사람 전부를 끌어올 작정이냐, 싶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다들 개성이 확실해서 분간하기 쉬운데다가 탕, 소리와 함께 짧고 자주 끊기기 때문에 나 같이 외국이름 못 외우는 사람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 심하다 싶을 만큼 장면전환이 잦기도 한데 외려 그 때문에 이동 중에도 짤막짤막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에세이보다 더 효율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들고 다니기에 만만한 무게는 아니었지만.
 

 

 

중간기록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명장면이 너무 많아 꼽을 수가 없다고. 그 말 그대로다. 플래그를 너무 많이 꽂아서 어느 한 구절을 꼽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후속작을 이미 완성하셨다고 하던데, 어서 내놓아주셨으면 좋겠다. 이번엔 어떤 시작이라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거기 나올 애들이 여기 나온 애들일 테니까. 그런 식의 연결고리 정말 좋다. 사랑둥이들을 또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물론 그런 설정이 없었더라도 나는 이 작가를 좋아했을 것이다.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도 이리 술술술, 따뜻하게 쓰는데.
 
<베어타운>에도 애정이 마구마구 읽힌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사랑둥이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제대로 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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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모임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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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기술이 유난스럽게 탐이 날 즈음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 모임>이 개정판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실연이라니, 그것은 무참한 정리의 시간을 뜻하는 말 아닌가. 나는 혹 했고, 일찍이 이건 꼭 내가 읽어야 할 소설이었다 점지해두기도 했던 차라 이번에야 말로 때가 왔다 생각했다. 새로 옷을 입은 책의 표지가 너무도 차분한 색감이어서 강박증처럼 어수선했던 마음이 절로 가라앉던 순간이 기억난다. 좋은 출발이었다. 유령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하여도 크게 놀라지 않을 만큼.

 

상처받은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각도가 조금 기울어진 낡은 나무 벤치, 어디에서 죽었는지 모를 길가의 새, 알약을 삼키고 있는 사람들, 정량보다 조금 많은 수면제를 파는 약국의 위치나 이름 같은 것들……. 21p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마도,
이곳에 도착하게 될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러하리라. 18p

 

오전 일곱 시. 나로서는 눈도 뜨지 않은 그 시각, 조찬을 위해 레스토랑에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의문스런 그 모임에 참가자들은 모두 실연당한 사람들이다. 이 무슨 황당한 조합인가 싶지만 실소할 일이 아니다. 실연 후 남게 되는 물건들을 서로 교환하고 실연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영화 4편을 단체로 감상하고 있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로 웃어넘길 수 없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들은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그곳에 모였다.
하지만 치유란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이루어지던가. 생경한 이벤트에 기댄다고 치유될 리 없었다. 외려 그곳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실연의 현실을 더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곳이었다.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를 마주보며 하는 식사와 의자 너머 거울로 비치는 자신의 유령 같은 얼굴, 얼굴 너머로는 실연과 거리가 먼 것 같은 사람들과 행복한 커플들이 수도 없이 지나가는 장면. 내적으론 혼자가 되었다는 현실을 실감하고 외부적으론 나는 실연한 사람이다 선언 중인 현장.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뛰쳐나가기도 하는 그 분위기 속에서 과연 이건 누구를 위한 모임이었는지를 절로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는.

알다시피 치유도, 용서도 자신의 몫일 뿐이다(48p). 주인공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꽃을 버리거나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208) 모두 꽃밭이 버리는(208) 것이므로 꽃피던 그 시절로 가는 것이다.
처음으로 먼저 고백하여 시작했던 사강의 연애 이야기와 십 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한 여자와 만났던 지훈의 연애사를 듣노라면 공감의 밑줄을 벅벅 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애란 전부 다르면서도 이상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하곤 했다. 그것은 마치 내 이야기처럼 읽혔고, 이미 지나버린 일이라는 걸 알기에 실연당한 사람처럼 마음이 울적해지도 했다. 깊이 공감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수의 얼굴을 보면 늘 말하고 싶었다. 사강은 정수와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관계이길 원했다. 전화 걸지 않은 이유를, 전화 받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왜 전화했는지, 그때 어째서 울음을 터뜨려야 했는지 이해받기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죽도록 노력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51p
현정이는 우리 사이에 우연과 낭만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어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사랑이라고. 하지만 전 연애를 우연히 이루어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는 질문이고, 누군가의 일상을 캐묻는 일이고, 취향과 가치관을 집요하게 나누는 일이에요. 전 한순간 사랑에 빠지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믿지 않았어요. 대단한 영감으로 순식간에 걸작을 써내는 작가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트루먼 커포티는 『인 콜드 블러드』를 쓰는 데 육 년이나 걸렸어요. 그런 거예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도록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 우연히 벌어지는 환상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철저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게 제가 알고 있는 연애예요. 289p

 

몰입하여 읽었으나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우연들이 내심 신경 쓰이긴 했다. 고질적인 의심병일지도 몰랐다. 최근엔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 사강과 지훈이 서로의 물건을 교환하게 된다거나, 그들이 조찬 이전 이미 만났던 사이라거나, 공항에서 만나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되는 것도, 일본의 지진을 겪게 되는 건 작가의 힘이 유난스레 느껴졌다. 이거 너무 우연의 연속인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되었지만 의외로 그건 또 로맨틱한 장치가 되기도 하여서 우연의 연속이면 좀 어떠냐, 금방 체념하게 됐다. 뭐, 어떤 사람의 경우, 우연한 여행 때문에 낯선 곳에서의 삶이 결정되(237p)기도 하는 법이니까 우연을 꼭 허구라고만 보기만도 좀 그랬고, 사실 사강도 지훈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컸던 상태인지라 그건 또 그거대로 좋아졌다. 그러고 나니 놀랍게도 실연당한 사람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으면서도 연애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흐름이었다. 잘 되어가고 있다, 흐뭇해했다.

 

“……(중략), 박사가 말하길 사람들은 어떤 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무의식적으로 밝은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대요. 하지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선 생각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고 충고하더군요.”
지훈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저 남자도 촛불 밑에 있을 게 아니라, 처음 자신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이동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도요?”
“칠흑 같은 어둠이라 해도.” 277p
침묵은 실연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보편적인 언어였다. (262)
사강이 지훈을 빤히 바라봤다. 지훈은 사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훈은 사강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이 어색하지 않는다는 게 놀랍게 느껴졌다. 긴 침묵이 흘렀지만 둘 중 누구도 그것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깊은 침묵이 모래톱처럼 그들의 눈앞에서 완만히 쌓여가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만난 사람들끼리 할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259p
어둠이 모든 걸 덮어버리자 지훈이 자신의 몸 어딘가와 연결된 것 같았다. 271p
검정색 재킷을 입은 그의 몸은 어둠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기적같이 돋아난 또 다른 그림자 같았다. 272p
고통은 분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275p

 

결국 치유는 어둠 속에서, 침묵과 공감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우연을 지나왔고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시 조찬모임’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나눈 두 사람은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비틀거리는 상대를 잡아주거나 울기도 하면서 나란히 밝은 곳을 향했다. 진부한 교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기에 그것이 정답이라 생각했다. 들여다보기, 털어놓기, 살갑게 만져주기. 지나야 할 시간을 차분하게 지나는 것. 불편하고 껄끄러운 상황마저도 잘 받아들여 진심이었던 그 시간에 제대로 된 인사를 고하는 것. ‘안녕’이 ‘굿바이’인 것만은 아니니까. 진짜 이별을 이해하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일 테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슬픔을 떠나보내지 않고, 슬픔에게 손짓할 수 있다면(312p)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312p) 겠지.

 

모든 연애에는 마지막이 필요하고, 끝내 찍어야 할 마침표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사람은 도리 없이 어른이 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바깥과 안을 모두 보게 되는 것. 사강은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317p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현정이 들고 가는 저 사진들처럼.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속에서도 진짜 이별을 이해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321p

 

실연이란 비단 연인과 헤어지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글 속에 등장하는 결혼정보회사의 대표가 말했듯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 꿈에 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래 전 헤어진 아버지로부터 자폐증에 시달리는 형으로부터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실연의 감정들은 어디서든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블랙홀 같은 그 시간을 빠져나가는 일을 지나야만 한다. 정리의 중요성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사강의 아버지의 말을 상기하며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침묵으로 고민해봐야겠다. 비로소 정리의 시간.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어떤 컴컴한 슬픔이라도 촛불이 필요하지 않는 아침(293p)은 반드시 올 것이라 믿는다.

 

‘안녕’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걸 네가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건 내가 알아낸 생의 가장 큰 비밀이었거든. 그래서 슬픔을 떠나보내지 않고, 슬픔에게 손짓할 수 있다면 네가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얘길 하고 싶었어. (3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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