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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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내 트위터 프로필에는 오랫동안 ‘NOWHERE’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위치를 표시하는 말이었다. ‘NOW HERE’로도 ‘NO WHERE’로도 읽을 수 있는 그 단어는 당시 내 성향을 잘 반영해주고 있었다. 나는 여기 있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너는’과 ‘어디’로 이루어진 질문에 삐딱선을 딴 건지도 몰랐다. 어디에 있냐니 그렇게 심오한 걸 호락호락 가르쳐줄 성 싶으냐. 툴툴거렸던 게 생각난다. 나도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간단한 질문도 숙제가 됐다. 자신을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 한 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지금 어디냐는 말은 무책임하다고 느껴질 만큼 막 던진 말처럼 다가왔다.

지금은 여기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여기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럼 나는 내가 어디에 있다고 대답해야 하나?


사실 답은 간단했다. 다수의 답을 따라 (아마도 질문자의 의도에 적합했을) 행정구역을 말하면 됐다. 동네 이름이라든가 도시명, 나라명 같은 걸 프로필의 위치를 묻는 칸에 써두면 튀지도 않고 적절한 인간처럼 보였다.


나만이 느끼는 부족함만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인생을 결정하는 주관식 시험 문제에 반드시 썼어야 할 중요한 문장 몇 개를 깜빡하고 제출한 듯, 퇴고하고 또 퇴고했어도 반드시 살아남는 오타를 맞닥뜨린 듯. 몸을 뒤틀며 속 안의 것을 다 게워내고 싶은 그 환장할 것 같은 답답함만 참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엔 나 같은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대다수가 간단하다고 여기는 문제 앞에서 한없이 복잡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샤 스타니시치도 그 중 하나라도 볼 수 있었다. 그의 소설 《출신》은 자전적이기에 훨씬 더 실감나게 그의 사정을 엿볼 수 있었다.



2

사샤 스타니시치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일 국적을 획득하기 위하여 외국인청에 자필이력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뭘 써넣어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피아에서 일한 할머니 얘기를 써야할지, 마음씨 착한 공산단원인 친할아버지 얘기를 써야할지. “유년기때 즐겁게 놀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는 이력을 말할 수(13p)” 없으니까 그걸 써야하나?


“여기 내가 가진 것이 많이 있다.” (23p)

그는 말했지만, 그의 이력서는 좀처럼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샤는 단순명쾌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사샤에게 “자네, 어디 출신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소속감을 갖게 하는 감성팔이 질문이군!(46p)”하고 생각할 것이었다. 웨얼 알 유 프롬에 아임 프롬 뭐시기로 대답하는 건 하우 알 유에 아임 프롬 땡큐, 앤듀?로 답하는 것만큼이나 관습적이었다. 그런 관습은 예외적 상황에 인색한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 상황은 예외를 경험하지 않으면 동감하기 어려운 온도를 가졌다. 관습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대다수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사는 게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 사샤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나는 유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많은 유고 사람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고 사람이 아닌 학우들에게 내가 유고에서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일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차별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206p

유고 사람이 아니라면 겪을 리 없는 어려움.

별거 아닌 게 아닌,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닌 차별.


모든 건 “출신 때문에” 왔다. 사샤의 이력서가 완성되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3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샤는 유고(슬라비아)사람이었다. 


유럽 동남쪽 발칸반도 서부에 있었다던 그 나라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 때문에 사샤가 이력서를 못 채웠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간단명료한 이유였다면 그가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연방공화국이었다.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시작으로 유고슬라비아는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 문제는 사샤가 그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성장한 아이였다는 것이었다.


1992년, 열네 살의 사샤는 어머니와 함께 국경을 넘어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고향에서 발발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진짜 전쟁을 피해서 잠시(166p)” 떠난 거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은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강제적으로 쫓겨난 고향 밖에서, 사샤는 자신의 고향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봤다. 다민족으로 하나이던 국가가 서로를 폭력적으로 공격하며 갈라지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 이상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했다. 세르비아계 어머니와 크로아티아계 아버지를 둔 유고슬라비아인 사샤는 전쟁이라는 잔혹한 칼날이 부모로부터 자신까지 길게 베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사샤는 ‘출신’이라는 말의 이상한 기능을 목격했다. “영토 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종적, 종교적, 혹은 도덕적 우월감(132p)”을 주장하기 위하여 “개인 증명서나 다름없는 민족 혈통(132p)”, 즉 출신이 사용되는 것이었다.


부유한 연방국을 시작으로 각 연방국들은 출신을 기준으로 모였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나온 주장은 모두 거짓이다.(132p)”라는 식의 증오에 가까운 민족적 반감을 내세우며 거짓과 폭력의 목소리로 마침내 민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1991년, 민족 소속감은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출신과 관련하여 모두가 똑같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어디 출신이든 잘못된 출신은 없었다. 그러나 출신을 둘러싸고 마침내 민족 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133p

이쯤 되면 출신이 어디냐는 질문에 다소 삐딱하게(?) 보이던 사샤의 태도도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안 좋은 경험이 떠올라서라기보다는 너무도 많은 의미가 한꺼번에 다가와서 그럴 것 같았다. 사샤에게 출신이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찢어버린 것이었다. 고향을 잃고 난민이 된 사샤를 영원한 동네의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조상들이 그에게 짐처럼 지우려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그에겐 외국인청에 제출해야 하는 이력서 앞에서 받아야 하는 고통과 다르지 않았다.


출신, 대체 뭘까?


야심으로도 교육으로도 재능으로도 바로 잡을 수 없는(163p), 그럼에도 한 인간을 나아가 민족과 나라까지도 평가하고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그것은. 사는 동안 아무 때고 갈고리 같은 꼬리를 달고 찾아오는 그것은.


올 때마다 그것은 어떤 의도를 품었을까.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자네, 어디 출신인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출신》은 그걸 반복해 묻는 소설이었다. 사샤라는 한 인물의 고민을 통해 출신이란 무엇인지, 그 답을 독자가 능동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여정이었다.



4

소설의 구성에 대해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 “산만함은 곧 내 문체(50p)”라는 저자의 말처럼 소설은 두서없이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87세인 동시에 11세인 그의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쩐지 납득이 되는 흐름이기도 했다.


사샤는 할머니인 “크리스티나가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86p)”고 고백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머니의 “기억 속 빈자리를 채우(140)”려 한 것이었다. 그 바탕엔 기억 속의 만남을 실행에 옮기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깔려있었다. 일생을 이방인으로 세상을 떠돌며 살던 그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여행길”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소설의 마지막 파트가 특히 인상적인데, 어릴 적 사샤가 발견했다던 “《당신 자신의 모험을 선택해보라(choose you own adventure)》”라는 책처럼 이 책도 독자가 “이야기의 흐름을 결정하고 바꿀 수 있(17p)”었다.


나는 지극히 나다운 현실적인 선택으로 소설을 진행시켜나갔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시시했다. 그러다 뒷표지에 쓰인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장례식”이라는 문구를 읽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여기서 나는 출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이력은 결국 누군가가 취사한 것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닌가. 내가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지 않는 한,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영영 살아있는 이력으로 남는 것이 아닌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출신이 창조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44p)”다는 사샤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는 문제에 단순한 답을 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 한번쯤은 심오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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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피에르 크리스탱 지음,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그림, 최정수 옮김 / 마농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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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을 읽은 후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이거 다른 번역으로도 봐야겠다. 이 작가 다른 작품도 봐야겠다.


조지 오웰의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유려한 문체와 그의 작품 세계는 나를 단숨에 매혹시켰고 나는 곧 그의 작품들을 부지런히 쓸어담기 시작했다. 그의 칼럼집을 샀고 《1984》를 샀다. 밀리에서 볼 수 있는 오웰의 책은 전부 다 담아놓고 그러고도 남은 책은 뭐부터 언제쯤 데려올지 신중하게 고민했다. 하필 그때 알라딘에서는 조지 오웰이란 제목의 책을 펀딩하고 있었다. 참여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조지 오웰》은 조지 오웰 70주기를 기념해 나온 그래픽 전기였다. 평소에도 작가의 이력을 오래 읽는 터라 한 2시간 쯤 더 들여다보는 기분일 거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 전반을 맡은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의 그림이 너무 취향이어서 한컷에서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나는 그냥 오웰이 살고 있는 그 시절로 들어가 앉아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 사람이 다른 작가들의 전기도 그려주면 좋을 텐데. 그럼 나는 드디어 그래픽 노블을 모으는 데까지 손을 뻗게 될 것이었다.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말고도 프랑스 만화계를 대표하는 다른 작가들의 삽화도 함께 볼 수 있어 좋았다. 저마다 자신들만의 느낌으로 오웰의 작품을 표현했다. 오웰의 일대기와 작품들, 오웰의 문장들까지 시간순으로 함께 보니 정말 그의 생애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기분이 되었다. 예기치 않게 작품의 결말을 알게 될 땐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 점만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다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오웰은 "내가 만약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치와 무관한 글을 썼을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 정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쓰던 사람이다. 강한 어조만큼 그의 삶도 거침 없고 전투적이었다. 그 모습을 일부나마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오웰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즐겁게 볼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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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피에르 크리스탱 지음,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그림, 최정수 옮김 / 마농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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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 앵베르디에 의 그림이 너무 취향이어서 한컷에서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나는 그냥 오웰이 살고 있는 그 시절로 들어가 앉아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웰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즐겁게 볼 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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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 시녀 이야기 세트 - 전2권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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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억압이 싫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부자유의 상태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자유를 잃은 나는 아마 100%의 확률로 망가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들이 굉장한 행운 같고 항상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고마운 걸 일상처럼 잊고 사는 여느 사람들같이 나도 그렇게 크고 특별하고 당연한 일에 대해선 무심하게 산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는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강한 펀치의 소유자였다. 나는 이 경각심에 대해 오래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녀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래픽 노블로 접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시각적 효과를 제외한다고 해서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보는 세계에 대한 충격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이 세계의 여성들은 ‘여성’과 ‘비여성’으로 구분된다. ‘비여성’들은 ‘콜로니’로 옮겨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죽도록 노동을 한다. ‘여성’은 기능에 따라 구분되는데, 알아보기 쉽도록 정해진 색상의 옷만 착용한다. 푸른색은 ‘아내’, 초록색은 ‘하녀’란 식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빨간색을 입고 있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19p)”. ‘시녀’다.


‘시녀’는 오로지 출산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을 소유한 남자와 그의 ‘아내’의 아이를 낳는다. 출산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다른 남자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또 출산을 노력한다. 출산을 아주 못하게 되어 ‘비여성’으로 분류되고 ‘콜로니’로 옮겨질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한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싶겠지만 그 말 같지도 않은 일이 계속해 일어난다.


이 일을 증언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오브프레드다. 오브프레드, ‘프레드의 (것)’이라는 뜻. 여성은 소속된 남자에 따라 수시로 이름이 바뀐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를 ‘길리어드’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는 전쟁과 환경오염, 각종 성질환과 출산율 급감 등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증언들》에서는 보다 더 확장된 시각에서 길리어드를 보여준다. 시녀에 한정되어 있던 렌즈가 시녀를 육성하는 ‘아주머니’와 사령관의 ‘딸’, 국경 밖의 소녀로 늘어나면서 나라 안팎은 물론 길리어드의 핵심부를 시대를 초월해 조망한다. 말하자면 길리어드의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독자의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다던 이 책은 《시녀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의문스러웠던 점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며, 기괴한 세계를 붕괴시키는 과정으로 독자의 애정과 바람과 기대 모두를 충족시킨다. ‘독자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내지는 ‘고구마 다섯 개 먹은 후 마시는 사이다’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그만큼 만족감이 높은 후속작이라는 뜻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인물들 간의 관계는 폭죽 같고 길리어드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주먹을 불끈 쥐지 않고는 볼 수 없다. 국경 안과 밖에서, 아니 심지어는 같은 길리어드 내에서도 상충하는 가치관으로 서로 다르게 굳어져버린 여성들의 대화를 듣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뜻을 모으고 하나로 움직이기로 했을 때 주먹 쥐어있던 손이 저절로 깍지를 낀 것도 당연했다.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가눌 수 없게 된다. 가자, 정상正常의 땅으로. 자유로, 인간적으로.


정상, 자유, 인간적. 시녀이야기 시리즈는 이런 말들이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정상의 세계는 그토록 쉽게 건설되었으며 지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군림함과 동시에 그 명분을 피지배인에게 돌린다. 이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며, 과거의 너희가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기 위함이고, 신의 뜻과 결코 다름이 없고.


여성을 끔찍하게 묘사한 포르노가 판을 치고 강간이 성행한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 길리어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내 뒤통수에선 강렬한 통증과 함께 불꽃이 번쩍 튀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우리는 망가뜨리는 명분이 될 수 있다. 그건 내 목에 내 손으로 올가미를 채울 수 있으며 그 밧줄은 이미 손에 들린 건지도 모른다는 뜻과 같았다.


따라서 나는 애트우드를 환상이라고 읽지 않는다. 예언이라고도 읽지 않는다. 현실로 읽는다. 어영부영 해결하지 못하고 날을 넘기고 있는 문제들을 잡아채라는 메시지로 읽는다. 애트우드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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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역사
에밀리 프리들런드 지음, 송은주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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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주인공 메러디스는 신생아와 자신을 차례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저기서 여기로 올 수 있는 걸까요?” 본 지 오래라서 정확한 대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는 상통한다. 내가 영재일지도 모른다는 부모표 콩깍지효과로 온갖 기대를 받았을 돌 사진을 보며 얘는 진짜 내가 될 줄 몰랐을 텐데하는 마음과 같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될 거라는 김애란식 단언(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297)은 아니어도 못잖은 좌절감이 끼쳐오는 일 말이다.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다르다, 이 일을 하고 난 후의 나는 높은 확률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다, 같은 생각을 행위의 동기로 삼으며 가상이든 현실이든 마주치는 모든 인물들의 변화를 주시해왔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고 인간은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걸 보면 나도 내가 아주 틀려먹었다는 좌절감에서 조금이나마 비껴 설 수 있었다. 사소해도 좋고 잠시뿐이어도 나쁘지 않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차피 같았다. 가능성. 나는 여러모로 망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가능성. 밑창까지 떨어진 건 처음인 양 다시 올라가보기 위함이라는 가능성.

 

가능성은 실패자란 낙인을 미룰 수 있는 틈이었고, 그 틈으로 전력질주할 때 상황이 바뀌고 삶이 달라졌다. 메마르고 척박한 검은 마음들 속에서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와중에도 계속해 꿈을 꿔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간의 성장은 예정된 바가 없고 완결되지도 않는다는 걸 배워서.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는 걸 알아버려서.

 

서론이 길었지만 요는 내가 성장이야기를 몹시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성장이야기라고 쓰여 있는 것도 좋아하고 안 쓰여 있는데 내가 알아채는 건 훨씬 더 좋아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리 프리들런드의 늑대의 역사사춘기 소녀무시무시한 이야기라는 키워드에 꽂혀 보게 된 소설이었다. “속할 곳을 찾기 위해 어디까지 가겠니?”라는 표지 문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부푼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기대했던 스릴러나 공포분위기 같은 건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체 사춘기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바랐던 건지, 그제야 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요즘 스릴러를 너무 읽었더니 머리가 장르를 잘 못 찾고 있었다. 이야기에 빠져드는데도 한참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열다섯 소녀 린다는 미네소타주 깊은 숲속에서 살고 있었다. 한때 이상을 가지고 공동체를 일구었다가 실패한 부모님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어느 여름날, 호수 건너편으로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네 살짜리 폴과 그의 엄마 패트라. 린다는 그 집의 베이비시터로 고용되고 두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사춘기의 또 한 길목을 통과했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죽음과 좋아하고 따르던 선생님의 성스캔들, 이곳의 여자아이들은 자라서 다들 카렌이 되어버린다는 뻔한 미래와 수상한 종교, 가난, 외로움 등으로 구성된 사춘기 속에서 린다는 한 마리의 늑대처럼 자신의 정착지를 찾아 헤맸다. 의미 불명의 애정을 시도하고 기대하면서, 폭로와 충돌을 기대하는 뒤틀린 마음을 품기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거나 구축해갔다.

 

그녀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고 이해 안 가는 대목도 많았다. 두서없는 소설의 진행이 그런 혼란을 더 부추기는 경향도 있었는데, 두꺼운 안개 속에서 이따금 아름다운 걸 목격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장면만큼 사춘기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보이는 건 읽고 안 보이는 건 지나치며 읽으면 그만이었다. 한번 살아봤던 사춘기의 불안정한 감정들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하나 둘 떠오르는 진실들은 하나 같이 놀라웠다. 책은 그 자체로 사춘기의 응집체가 되어 책장을 덮었을 땐 한 시절을 간신히 통과한 기억 속 후련함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상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은 어려웠다. 지금도 소설의 안개를 미처 다 뚫고 나오지 못한 것처럼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사춘기 시절을 몸 여기저기에 묻힌 채 말끔한 어른이 되지 못한 린다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나와 린다를 두고 긴 고민에 빠졌지만 한가지 답은 분명했다. 성장 소설은 역시 옳다는 것. 벌써 이만큼이나 글을 썼다.

 

 

재판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확인이 든 것은 언제입니까? 대답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처음 만나자마자요. - P58

세월이 지나서도 그네 타는 아이를 보면 그렇게 이슬비가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나갈 때의 흥분, 중간쯤 갔다가 되돌아오는 그네, 그 가망 없음. 다음번에는, 다음번 앞으로 나아갈 때는 뒤로 다시 끌려오지 않을 거라는 헛된 믿음. 다시, 또 다시 거듭해서 시작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 P91

진실은 그 낡은 장작 난로는 마약 같았고 아이였던 나에게는 지극히 평범해서, 보지도 않고도 난로에 이끌렸고, 이유조차 궁금해하지 않고 난로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나는 아홉 살이었다. - P246

한 발짝만 더 디디면 절벽에서 떨어져. 불쌍한 어린 소녀야. 신발도 없고 배는 고프고. 누가 너를 돌봐 주었니? - P384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로 우리의 망원경을 우주로 향했고, 너무나 많은 화학물질 덩어리들이 되비치는 것을 보았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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