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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 시녀 이야기 세트 - 전2권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평점 :
나는 억압이 싫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부자유의 상태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자유를 잃은 나는 아마 100%의 확률로 망가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들이 굉장한 행운 같고 항상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고마운 걸 일상처럼 잊고 사는 여느 사람들같이 나도 그렇게 크고 특별하고 당연한 일에 대해선 무심하게 산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는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강한 펀치의 소유자였다. 나는 이 경각심에 대해 오래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녀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래픽 노블로 접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시각적 효과를 제외한다고 해서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보는 세계에 대한 충격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이 세계의 여성들은 ‘여성’과 ‘비여성’으로 구분된다. ‘비여성’들은 ‘콜로니’로 옮겨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죽도록 노동을 한다. ‘여성’은 기능에 따라 구분되는데, 알아보기 쉽도록 정해진 색상의 옷만 착용한다. 푸른색은 ‘아내’, 초록색은 ‘하녀’란 식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빨간색을 입고 있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19p)”. ‘시녀’다.
‘시녀’는 오로지 출산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을 소유한 남자와 그의 ‘아내’의 아이를 낳는다. 출산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다른 남자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또 출산을 노력한다. 출산을 아주 못하게 되어 ‘비여성’으로 분류되고 ‘콜로니’로 옮겨질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한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싶겠지만 그 말 같지도 않은 일이 계속해 일어난다.
이 일을 증언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오브프레드다. 오브프레드, ‘프레드의 (것)’이라는 뜻. 여성은 소속된 남자에 따라 수시로 이름이 바뀐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를 ‘길리어드’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는 전쟁과 환경오염, 각종 성질환과 출산율 급감 등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증언들》에서는 보다 더 확장된 시각에서 길리어드를 보여준다. 시녀에 한정되어 있던 렌즈가 시녀를 육성하는 ‘아주머니’와 사령관의 ‘딸’, 국경 밖의 소녀로 늘어나면서 나라 안팎은 물론 길리어드의 핵심부를 시대를 초월해 조망한다. 말하자면 길리어드의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독자의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다던 이 책은 《시녀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의문스러웠던 점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며, 기괴한 세계를 붕괴시키는 과정으로 독자의 애정과 바람과 기대 모두를 충족시킨다. ‘독자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내지는 ‘고구마 다섯 개 먹은 후 마시는 사이다’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그만큼 만족감이 높은 후속작이라는 뜻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인물들 간의 관계는 폭죽 같고 길리어드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주먹을 불끈 쥐지 않고는 볼 수 없다. 국경 안과 밖에서, 아니 심지어는 같은 길리어드 내에서도 상충하는 가치관으로 서로 다르게 굳어져버린 여성들의 대화를 듣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뜻을 모으고 하나로 움직이기로 했을 때 주먹 쥐어있던 손이 저절로 깍지를 낀 것도 당연했다.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가눌 수 없게 된다. 가자, 정상正常의 땅으로. 자유로, 인간적으로.
정상, 자유, 인간적. 시녀이야기 시리즈는 이런 말들이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정상의 세계는 그토록 쉽게 건설되었으며 지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군림함과 동시에 그 명분을 피지배인에게 돌린다. 이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며, 과거의 너희가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기 위함이고, 신의 뜻과 결코 다름이 없고.
여성을 끔찍하게 묘사한 포르노가 판을 치고 강간이 성행한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 길리어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내 뒤통수에선 강렬한 통증과 함께 불꽃이 번쩍 튀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우리는 망가뜨리는 명분이 될 수 있다. 그건 내 목에 내 손으로 올가미를 채울 수 있으며 그 밧줄은 이미 손에 들린 건지도 모른다는 뜻과 같았다.
따라서 나는 애트우드를 환상이라고 읽지 않는다. 예언이라고도 읽지 않는다. 현실로 읽는다. 어영부영 해결하지 못하고 날을 넘기고 있는 문제들을 잡아채라는 메시지로 읽는다. 애트우드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