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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내 트위터 프로필에는 오랫동안 ‘NOWHERE’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위치를 표시하는 말이었다. ‘NOW HERE’로도 ‘NO WHERE’로도 읽을 수 있는 그 단어는 당시 내 성향을 잘 반영해주고 있었다. 나는 여기 있는 동시에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너는’과 ‘어디’로 이루어진 질문에 삐딱선을 딴 건지도 몰랐다. 어디에 있냐니 그렇게 심오한 걸 호락호락 가르쳐줄 성 싶으냐. 툴툴거렸던 게 생각난다. 나도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간단한 질문도 숙제가 됐다. 자신을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 한 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 지금 어디냐는 말은 무책임하다고 느껴질 만큼 막 던진 말처럼 다가왔다.
지금은 여기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여기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럼 나는 내가 어디에 있다고 대답해야 하나?
사실 답은 간단했다. 다수의 답을 따라 (아마도 질문자의 의도에 적합했을) 행정구역을 말하면 됐다. 동네 이름이라든가 도시명, 나라명 같은 걸 프로필의 위치를 묻는 칸에 써두면 튀지도 않고 적절한 인간처럼 보였다.
나만이 느끼는 부족함만 견디면 되는 일이었다. 인생을 결정하는 주관식 시험 문제에 반드시 썼어야 할 중요한 문장 몇 개를 깜빡하고 제출한 듯, 퇴고하고 또 퇴고했어도 반드시 살아남는 오타를 맞닥뜨린 듯. 몸을 뒤틀며 속 안의 것을 다 게워내고 싶은 그 환장할 것 같은 답답함만 참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엔 나 같은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대다수가 간단하다고 여기는 문제 앞에서 한없이 복잡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게 된 사정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사샤 스타니시치도 그 중 하나라도 볼 수 있었다. 그의 소설 《출신》은 자전적이기에 훨씬 더 실감나게 그의 사정을 엿볼 수 있었다.
2
사샤 스타니시치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독일 국적을 획득하기 위하여 외국인청에 자필이력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뭘 써넣어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피아에서 일한 할머니 얘기를 써야할지, 마음씨 착한 공산단원인 친할아버지 얘기를 써야할지. “유년기때 즐겁게 놀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고는 이력을 말할 수(13p)” 없으니까 그걸 써야하나?
“여기 내가 가진 것이 많이 있다.” (23p)
그는 말했지만, 그의 이력서는 좀처럼 채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샤는 단순명쾌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 사샤에게 “자네, 어디 출신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소속감을 갖게 하는 감성팔이 질문이군!(46p)”하고 생각할 것이었다. 웨얼 알 유 프롬에 아임 프롬 뭐시기로 대답하는 건 하우 알 유에 아임 프롬 땡큐, 앤듀?로 답하는 것만큼이나 관습적이었다. 그런 관습은 예외적 상황에 인색한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 상황은 예외를 경험하지 않으면 동감하기 어려운 온도를 가졌다. 관습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대다수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사는 게 현실이었다. 이에 대해 사샤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나는 유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많은 유고 사람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유고 사람이 아닌 학우들에게 내가 유고에서 어떤 종족에 속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고 사람들 대부분은 출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일이 별거 아니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 차별은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206p
유고 사람이 아니라면 겪을 리 없는 어려움.
별거 아닌 게 아닌, 결코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닌 차별.
모든 건 “출신 때문에” 왔다. 사샤의 이력서가 완성되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3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샤는 유고(슬라비아)사람이었다.
유럽 동남쪽 발칸반도 서부에 있었다던 그 나라는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 때문에 사샤가 이력서를 못 채웠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간단명료한 이유였다면 그가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연방공화국이었다. 1991년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시작으로 유고슬라비아는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 문제는 사샤가 그 역사의 흐름을 타고 성장한 아이였다는 것이었다.
1992년, 열네 살의 사샤는 어머니와 함께 국경을 넘어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고향에서 발발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진짜 전쟁을 피해서 잠시(166p)” 떠난 거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은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강제적으로 쫓겨난 고향 밖에서, 사샤는 자신의 고향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봤다. 다민족으로 하나이던 국가가 서로를 폭력적으로 공격하며 갈라지는 모습은 그에게 충격 이상으로 다가왔을 것이 분명했다. 세르비아계 어머니와 크로아티아계 아버지를 둔 유고슬라비아인 사샤는 전쟁이라는 잔혹한 칼날이 부모로부터 자신까지 길게 베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사샤는 ‘출신’이라는 말의 이상한 기능을 목격했다. “영토 야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종적, 종교적, 혹은 도덕적 우월감(132p)”을 주장하기 위하여 “개인 증명서나 다름없는 민족 혈통(132p)”, 즉 출신이 사용되는 것이었다.
부유한 연방국을 시작으로 각 연방국들은 출신을 기준으로 모였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나온 주장은 모두 거짓이다.(132p)”라는 식의 증오에 가까운 민족적 반감을 내세우며 거짓과 폭력의 목소리로 마침내 민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1991년, 민족 소속감은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출신과 관련하여 모두가 똑같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어디 출신이든 잘못된 출신은 없었다. 그러나 출신을 둘러싸고 마침내 민족 간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133p
이쯤 되면 출신이 어디냐는 질문에 다소 삐딱하게(?) 보이던 사샤의 태도도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안 좋은 경험이 떠올라서라기보다는 너무도 많은 의미가 한꺼번에 다가와서 그럴 것 같았다. 사샤에게 출신이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찢어버린 것이었다. 고향을 잃고 난민이 된 사샤를 영원한 동네의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조상들이 그에게 짐처럼 지우려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그에겐 외국인청에 제출해야 하는 이력서 앞에서 받아야 하는 고통과 다르지 않았다.
출신, 대체 뭘까?
야심으로도 교육으로도 재능으로도 바로 잡을 수 없는(163p), 그럼에도 한 인간을 나아가 민족과 나라까지도 평가하고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그것은. 사는 동안 아무 때고 갈고리 같은 꼬리를 달고 찾아오는 그것은.
올 때마다 그것은 어떤 의도를 품었을까.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자네, 어디 출신인가?”
사샤 스타니시치의 《출신》은 그걸 반복해 묻는 소설이었다. 사샤라는 한 인물의 고민을 통해 출신이란 무엇인지, 그 답을 독자가 능동적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여정이었다.
4
소설의 구성에 대해 몇 마디 덧붙여야겠다. “산만함은 곧 내 문체(50p)”라는 저자의 말처럼 소설은 두서없이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87세인 동시에 11세인 그의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쩐지 납득이 되는 흐름이기도 했다.
사샤는 할머니인 “크리스티나가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86p)”고 고백했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할머니의 “기억 속 빈자리를 채우(140)”려 한 것이었다. 그 바탕엔 기억 속의 만남을 실행에 옮기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깔려있었다. 일생을 이방인으로 세상을 떠돌며 살던 그가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여행길”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소설의 마지막 파트가 특히 인상적인데, 어릴 적 사샤가 발견했다던 “《당신 자신의 모험을 선택해보라(choose you own adventure)》”라는 책처럼 이 책도 독자가 “이야기의 흐름을 결정하고 바꿀 수 있(17p)”었다.
나는 지극히 나다운 현실적인 선택으로 소설을 진행시켜나갔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 시시했다. 그러다 뒷표지에 쓰인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장례식”이라는 문구를 읽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소설을 읽는 동안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여기서 나는 출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이력은 결국 누군가가 취사한 것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닌가. 내가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주지 않는 한,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영영 살아있는 이력으로 남는 것이 아닌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출신이 창조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44p)”다는 사샤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결코 단순하지 않는 문제에 단순한 답을 쓰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 한번쯤은 심오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