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신의 생김새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야무지고 튼튼한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도 사랑했다. 그는 얼굴도 마치 사지四肢 가운데 하나인 양 그저 단단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다. 그렇긴 하다. 도시로 온 후에도 그는 머리를 아랫쪽으로 향하고 한 나절이나 물구나무를 설 수 있었다. 이렇게 거꾸로 서서 그는 자신이 마치 아래 위 할 것 없이 꼿꼿한 한 그루 나무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만약 노새나 말처럼 낙타들이 온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것에 주의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낙타란 녀석은 끔찍이도 온순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멍해졌을 때는 낙타가 여전히 그의 뒤에 있는지도 의심이 들었다. 마치 거대한 얼음 덩어리를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그 커다란 짐승이 어두운 갈림길 저편으로 들어가 얼음처럼 녹아 사라진다 해도 그는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았다.

...노인네는 세 마리 낙타가 정말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 낙타를 사서 수중에 넣어봐야 별 잇속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 좋아하는 이가 책만 보면 사고 싶은 생각이 나고, 말 기르는 이가 말을 보면 괜히 아쉬워하는 것처럼 이전에 세 다발이나 되는 낙타를 길러본 이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샹즈가 헐값에 팔겠다고 하지 않는가. 시세가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아는 전문가가 싼 물건을 보게 되면 그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는지를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 류쓰예가 샹즈를 우대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샹즈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능히 옛 습관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령 그가 군대로 들어가 병사가 된다고 해도, 호랑이 가죽虎皮(군복)을 입는 즉시 시치미 뚝 떼고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노인은 평생 하늘도 땅도 두려워해본 일이 없었지만 늙어가면서 딸자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이 스스로 겸연쩍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나마 법도 하늘도 없는 무뢰한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겠지. 이런 감정이 있는 한 죽을 때라도 천벌은 면할지 몰라. 좋아....

..사실 차오 선생은 그렇게 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때로 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다른 일들도 하면서 살아가는, 중간 정도에 속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사회주의자로 자처하고 있으나 동시에 유미주의자이기도 하고 특히 윌리엄 모리스(1834~1896, 영국의 시인이자 미술가)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그다지 심오한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신조를 하나하나 실제 생활 속 작은 일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그는 스스로가 뛰어난 재주를 지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일과 가정을 꾸려가면서, 비록 사회에 큰 보탬이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언행일치을 하여 위선자 소리는 듣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작은 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 마치 소소한 집안일을 잘 처리하면 사회는 어찌 되어도 별 상관이 없다는 듯했다. 이 때문에 때론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또한 때로 스스로 만족하며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의 집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찾아오는 이들에게 맑은 물과 먹을 것을 제공할 수 있을 뿐, 더 큰 의미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같았다.
..샹즈는 때마침 그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사막에서 그처럼 오랜 시간을 헤매던 그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차오 선생 같은 이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를 성현으로 여겼다. 이는 그의 경험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현실에서 이런 인물조차 만나기가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차오 선생을 모시고 나갈 때, 선생의 옷차림은 참으로 단아했고 성격 또한 활발하고 대범했다. 샹즈는 자신 역시 깨끗하고 말쑥하며 기골이 장대하여 오직 그만이 차오 선생의 인력거를 끌 수 있을 것 같은 자부심으로 유달리 신나게 달려댔다. 집안도 곳곳마다 깨끗하고 항상 조용했기 때문에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시골에 있을 때 그는 노인들이 겨울철 따사로운 햇살이나 가을 달빛 아래에서 대나무 담뱃대를 물고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아직 나이가 어렸을 때라 노인들을 흉내낼 순 없었지만 그들이 그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노인들이 그렇게 앉아 분명히 어떤 느낌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그는 비록 시내에 살고 있지만 조용한 차오 선생 댁에 머물고 있으니 시골 생각이 절로 났다. 진짜로 담뱃대를 물고 과연 어떤 재미가 있는지 맛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만큼.

..실이 끊어진 연처럼 돈을 떼먹히는 일이 없으려면 눈썰미와 수완이 있어야 하고, 조심성과 더불어 악랄함도 필요하다. 그녀는 은행 경리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보다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자본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 ‘주의主義(입장이나 주장)’는 같았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여서, 아주 촘촘하고 커다란 체로 위에서 아래로 조금씩 돈을 체질하는 듯 내려갈수록 돈이 점점 적어진다. 이와 동시에 ‘주의’도 아랫쪽으로 체질하게 되는데, 다만 이것은 위나 아래나 똑같다. 왜냐하면 ‘주의’는 돈과 달라 체 구멍이 작은 것을 꺼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놈은 형체가 없어 아무리 구멍이 작아도 멋대로 빠져나온다....

...그들이 인력거꾼을 대하는 태도는 샹즈가 늙고 병든 인력거꾼들을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함께 지옥에 떨어져있을지라도 계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 각자 나름의 길을 걸어갔다. 희망이나 노력이 모든 개인의 눈을 가려 사람들마다 맨손으로 자수성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어둠 속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더듬어갔다. 샹즈는 다른 이들은 아예 생각지도, 관여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돈과 앞날의 성공만을 생각했다.

..개별적으로 해결하자니 샹즈는 그렇게 총명하지 못했고, 전체적으로 청산하자니 그만한 담력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방법도 없이 하루 종일 속만 썩이고 있었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해를 입은 후에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이 사태를 수습할 생각뿐이었다. 싸움에서 뒷다리를 잃은 귀뚜라미는 나머지 가느다란 앞다리로 기어가려고 애쓰게 마련이다. 샹즈는 자기 나름의 생각이 없이 그저 하루하루 일이 생기는 대로 겪어가면서 기어가는 데까지 기어갈 뿐 근본적으로 뛰어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난뱅이의 운명을 그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대추씨처럼 양끝이 뾰족한 운명. 어릴 땐 굶어죽지 않으면 천만다행한 일이고, 늙어서 배고파 죽지 않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인생의 중간, 젊고 힘도 좋을 때야 먹고 사는 것이나 악착같은 노동도 두렵지가 않다. 그래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지 않은가. 즐겨야 할 때 즐기지 않는 사람이야 말로 바보 중의 상바보다....

..앉을 곳이 없으니 그냥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디로 가지? 이 은백의 세계에는 그가 앉을 만한 곳도, 갈 곳도 없다. 막막하기만 한 하얀 세상, 배가 주린 아기 새. 갈 곳 없는 사람만 슬픔이란 게 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샹즈는 아무 말도 없었다. 화도 내지 않았다. 마음이란 게 없어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냥 되는 대로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마시고, 일이 있으면 일하고, 계속 손발을 놀리다보면 하루가 갈 것이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방아를 돌리는 나귀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사람이란 게 원래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먹이를 잡아먹다가 자기가 그물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면 참하게 조롱에 갇혀 다른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으며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언제든지 팔려갈 신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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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p.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삶은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듯했다. 현실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막연히 상상했던 어른의 삶과 일치했기 때문이고, 비현실적이었던 이유는 우리가 결코 그들처럼 되지 않을 듯했기 때문이다.

17p.
..그게 또 다른 문제였다. 관심사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반드시 책이나 전시회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듯했다. 우린 종종 그런 현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해도 순수한 창작의 즐거움과 창의성을 위해 작업했던 수십 년 전의 예술가들을 부러워했다.

22p.
..레나는 이 도시에서 내 유일한 현지인 친구였다. 마누와 나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약간 부끄러웠다. 그 사실이 우리에 대한 평가라도 된다는 듯. 활기찬 광장에 있을 때면 즐거운 세상이 우리를 비켜 가는 느낌이 들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전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두세 명씩 모여 있는 그들은 우리보다 더 정당한 자격으로 그곳에 있는 듯했다.

38p.
...이 모든 활동은 사회를 구성하는 무언의 기반이었다. 우리는 그 사회의 규칙을 너무도 잘 익힌 나머지 규칙으로 여기지 않고 삶의 자연스러운 궤도로 받아들였다. 때때로 교수님은 우리가 삶을 꾸려가며 만들어낸 루틴을 인류학자가 관찰한다고 상상해보라고 했다. 루틴은 임의적일 수도 있고 필수적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게임의 규칙이었다. 조화와 지속성을 보장하는 듯한 착각을 주는 규칙.

69p.
..박물관에서 거대한 돌기둥 컬렉션을 보았는데 돌기둥에는 사람의 몸에 동물의 팔다리가 달린 아이들을 안고 있는 주술사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내 삶에서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경험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78~79p.
..이 집은 우리에게 첫 아이와도 같아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가 부른 배를 양손으로 감쌌다. 둘은 도심을 벗어나 농가로 이사할 계획이었고, 시간을 들여 그 집을 개조할 거라고 했다. 난 왠지 저들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농가며 개조며 이젠 그만 도시를 떠날 거라고. 그 이유까지도 줄줄이 댈 수 있었다. 우리 아이는 자연에서 자라야 한다, 마음껏 뛰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나무와 꽃과 과일 이름을 아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여유가 없고, 사람들과 단절되었으며,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할 것이다. 진짜 이웃과 직접 기른 채소를 먹는,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내가 그걸 너무 잘 안다는 사실에 오히려 숨이 막혔다. 그런 내 예상은 비현실적인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마치 결국 우리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고, 똑같은 말로 그 삶을 묘사한다는 듯이. 조금만 집중하면 우리의 삶, 우리가 닮아갈 부류의 사람들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이 가져올 미래를 그려보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요소가 있었다. 결국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너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85~86p.
..자신을 뜯어고치는 중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반복된 자기 합리화에서는 우월감이 느껴졌다. 마치 정신세계가 리모델링해야 하는 집이라도 되고 그 구성 요소가 방, 벽, 기둥처럼 명확히 구분되며, 그 안의 누수와 균열을 고칠 수 있다는 듯이. 또한 그들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늘 한계가 있는 듯했다. 정신적 안정을 끊임없이 관리하는 그들은 누군가와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술집에 우리 셋만 남았을 때 마누와 라비, 나는 결국 ‘인색함‘이 우리가 찾던 정의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누는 그런 인색함은 너무 깊은 자아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고, 라비는 지나치게 엄격한 개인 관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인들 모임에 나가보면 꼭 일찌감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만 가야 한다고 초를 치는 애들이 있어. 라비는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러닝을 해야 한다거나 이튿날 머리가 몽롱하면 안 된다면서. 라비는 이렇게 집단적 동지애가 부족해진 이유 역시 심리 치료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라비의 말에 따르면 심리 치료는 이기주의를 가르치는 교육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관계에서 경계를 설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특별한 가치를 끊임없이 인정하는 훈련을 무자비하게 받은 결과였는데 이 모두가 광적인 개인주의의 산물이었다. 난 라비에게 넌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걸 싫어할 뿐이라고 농담했다.
..그런 게 아냐. 라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중요시하는 게 싫을 뿐이야. 이튿날 출근해야 하는 건 다 마찬가지잖아.

108p.
..어느 정도 사과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인간관계가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다.

135p.
..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충격을 입 밖으로 내기도 곤란했다. 원래 조부모는 늙기 마련이고 아프기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남들이 일상을 멈추거나 불편을 감수해가며 공감해주길 바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최상급의 비극이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친절을 불러오는 비극. 그런가 하면 삶 자체에 내재된 비극도 있었다. 삶은 상실과 파괴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155p.
..내가 젊다는 사실을 깨우친 건 충격이었다. 최근 들어 더는 내가 젊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음은 다른 시절, 그러니까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미래가 저절로 굴러 온다고 믿었던 시절의 전유물인 듯했다.

172p.
..살면서 환골탈태한 사람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레나가 전에 말한 적 있었다. 전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부자가 된 사람들.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불안감 때문이야. 레나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불안감을 종종 겸손으로 오해하지. 반면 정말로 자기 삶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겸손은 사실 일종의 교만이야. 자신의 삶과 더 큰 세상에서 그 삶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확신이지.

181p.
..난 아이에게 하듯 어르고 달래고 다독이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함께 시를 읽으며 쌓아온 우리의 우정은 위기에 처했다. 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예의를 지켜야 했고 위기 앞에서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190p.
..촬영하는 몇 달 내내 나는 살아가는 방식도, 공원을 즐기는 방식도 참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양한 삶의 형태, 낯설고도 독특한 방식을 가능한 한 많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장면 간의 연결을 매끄럽게 다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처럼 편집하면서 차츰 깨닫게 되었다. 겉보기엔 다양해 보여도 결국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덧없이 흐르는 하루의 시간을 뚫고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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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p.
..휴가를 마치고 난 첫 메모에는 어머니가 된 감상이나 아이에 대한 마음 같은 것은 없고, 조사 결과만 담담하게 적어 놓았다. 구리하라는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이래야 한다. 감정을 섞으면 기록에 잡음이 낀다. 어머니의 성실한 면모를 봐서 기뻤다.

151p.
..하지만 정상을 지나자 그 인상이 싹 바뀌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라고 해야 할까. 밝고 개방적이었던 오르막길과 달리 내리막길은 어둑하고 칙칙한 답답함이 감돌았다. 아마도 바다 때문이리라.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물 덩어리는 공포스러울 만큼 푸르고 무표정하게 고여 있었다.
..이 일대가 바다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런 기분이었다.

153p.
..구리하라는 숨을 삼켰다.
..삼각 지붕 사당, 호수, 해안가의 민가…… 고지도에 그려진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버려진 지 너무 오래된 탓일까. 죄다 성한 곳 없이 노후화됐고, 건물 지붕은 보기 싫게 떨어져 나갔다.
..‘주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마을의 주검이 산과 숲과 바다에 갇힌 채 수십 년이나 방치된 듯한 인상이었다.

193p.
..아무리 주위에서 꺼리고 가족이 거리를 두더라도, 구리하라는 자신의 성격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논리는 부조리한 폭언과 폭력으로부터 사람을 지켜 준다. 논리로 똘똘 뭉친 구리하라의 마음은 누구보다 다정할 터였다.

323p.
.."올바른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야비쓰 회장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도 올바른 일이고요. 둘 다 옳다면 자기에게 유리한 정의를 고릅시다. 세상이란 그런 겁니다."

430p.
..물론 놀이는 아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계획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그 비일상적인 활동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을까.
..외할머니는 즐거웠던 추억을 품에 안고 세상을 떠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진실은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이 가장 가슴에 와닿는 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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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p. «겐 노인»
...산기슭에는 마을이 있고 마을 안에는 무덤이 있다. 무덤은 이때 깨어나고 사람은 이때 잠들어 꿈의 세계에서 고인과 만나 울고 웃는다....

19p. «겐 노인»
...이렇게 그의 마음은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황폐해져, 사람들이 아침 해를 쬐고 밥짓는 연기가 오르고 부모자식이 있고 부부가 있으며 형제가 있고 친구가 있으며 눈물이 있는 세계에 그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언제부터인가 인적 없는 묘지에 그 쓸쓸한 거처를 옮기고 그 마음도 땅속에 묻어 버렸던 것이다.

20p. «겐 노인»
...속세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보는 눈으로 그를 본다면 잘못이다. 그는 아예 파도의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이니까…….

43p. «무사시노»
...억지로 흩어놓은 듯한 구름 사이로 총명한 사람의 눈처럼 맑게 갠 파란 하늘이 엿보였다....

57p. «무사시노»
...다리 밑에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주 부드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물이 양쪽 벽에 세차게 부딪혀 나는 소리가 아니고, 또 얕은 개울 같은 소리도 아니다. 진흙으로 벽을 바른 듯한 깊은 도랑에 풍부한 수량이 흐르므로, 물과 물이 얽히고설켜 서로 비벼대니 자연히 소리가 나는 것이다. 얼마나 정겨운 소리인가!

63p. «무사시노»
...왜 이와 같은 곳이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나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즉 이런 교외의 광경은 왠지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라는 것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시골 사람에게도 도시 사람에게도 감흥을 일으킬 법한 이야기, 작은 이야기, 게다가 아주 슬픈 이야기, 혹은 포복할 정도의 이야기가 두세 개쯤 그곳의 처마 밑에 숨어 있는 듯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그 특색을 말하자면, 대도시 생활의 흔적과 시골 생활의 여파가 여기에서 서로 만나 완만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보라, 저기에 외눈박이 개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 개의 이름이 알려진 곳까지가 곧 이 교외의 영역이다.

84~85p.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 같은 밤 나 홀로 밤늦게 등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인생의 고독을 느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애상을 불러일으키지. 그때 내 이기심의 뿔은 뚝 부러져 왠지 사람이 그리워지네. 옛날 일과 친구가 생각나지. 그때 강하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네. 아니, 그때 그 광경 속에 서 있던 그 사람들이네. 아(我)와 타(他)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모두 다 이승의 어느 하늘 어느 땅 한구석에서 태어나 머나먼 행로를 헤매다가 서로 손잡고 영원한 하늘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93p. «쇠고기와 감자»
.."그러나 비프스테이크에 감자는 부속물이야." 구레나룻 신사가 우쭐대며 말했다.
.."그렇고말고! 이상은 즉 현실의 부속물이지! 감자도 전혀 없으면 곤란해. 그러나 감자뿐이라면 정말 곤란하지!"

117p. «쇠고기와 감자»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흔히 하는 말이지만, 역시 이 질문을 발하고자 욕망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종교의 원천이 흘러나옵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이외는 모두 유희입니다. 허위입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무익합니다. 무익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무익합니다……. 아아, 지쳤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마디 합니다만, 나는 인간을 두 종류로 구별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놀라는 사람과 태연한 사람……."

141p. «그림의 슬픔»
..어둠에도 기쁨이 있다. 빛에도 슬픔이 있다. 밀짚모자의 챙을 기울여 저쪽의 언덕, 이쪽의 숲을 바라보면 환하게 비치는 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풍경……,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153p. «가마쿠라 부인»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름에 따라 당시 우리 둘의 사랑이 깨끗하고 깊고 높으며 슬픈 것을 생각하고, 두 사람 모두 아직 세상의 악에 오염되지 않고 오로지 이상의 세계를 우러러보며, 어느 때는 노래하고, 어느 때는 밤하늘 달빛 밑에서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등을 떠올렸다.

174p. «비범한 범인»
..그처럼 허영심이 적은 남자는 드물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여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심하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는 결코 자기와 타인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운명에 만족하고 그리고 운명을 개척하며 나아간다.

192p. «운명론자»
.."자살이 아닙니다. 자멸입니다. 운명은 나의 자살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운명의 귀신이 가장 잘 쓰는 도구의 하나는 ‘미혹(迷惑)‘입니다. ‘미혹‘은 슬픔을 고통으로 바꿉니다. 고뇌를 다시 배가시킵니다. 자살은 결심입니다. 시종 미혹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어찌 자살할 결심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므로 ‘미혹‘이라는 둔하고 무거운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시 자멸이라는 어리석은 방법밖에 없습니다."

197p. «운명론자»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잘 보는 것처럼, 부자연스런 처지에 놓인 소년이 어느새 어두운 부자연의 심연에 숨어 있는 흑점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15p. «운명론자»
.."과감히 이혼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만들 뿐입니다. 이미 있는 사실은 그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할 수 없지 않나요?"
.."그러니 운명입니다. 이혼한다고 해서 친어머니가 아버지의 원수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혼한다고 해서 여동생을 아내로 사랑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과거의 사실을 지울 수 없는 한, 사람은 도저히 운명의 힘에서 탈피할 수가 없겠지요."

220p. «정직자»
..나 같은 남자는 이 세상에 꽤 많겠지만, 모두 자신이 처한 환경, 예를 들면 옛날 사농공상의 어느 계급에 속한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그럴듯한 연극을 합니다. 단지 이런 사람은(나도 그 한사람이지만), 자신의 환경 밖으로는 거의 탈출할 수 없습니다. 그 탈출할 수 없다는 것에 무게가 붙어서 그 연극을 더욱 잘 해내는 것입니다.

243p. «여난»
..소리를 파는 자들은 곡이 끝나면 늘상 웃으며 반드시 겸손의 말 한두 마디를 내뱉지만 그는 묵묵히 앉아서 지금 막 자신이 부른 음이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가는 뒤를 쫓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288p. «봄 새»
..하늘빛, 햇빛, 오래된 성터, 그리고 소년, 마치 한 폭의 그림입니다. 소년은 천사입니다. 이때 내 눈에는 로쿠조가 전혀 백치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치와 천사, 이 얼마나 가련한 대조인가요. 나는 이때 백치이지만 그 역시 자연의 자식이 아닌가 하고 절절히 느꼈습니다.

297p. «궁사»
..몸도 마음도 멍한 듯한 절망적 무아(無我)가 안개처럼 무겁게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자욱이 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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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p.
..달콤한 소망이 이루어지고
사랑의 선물이 오갔다.
짜르그라드에서 만든 양탄자 위로
시샘하는 옷들이 흘러내렸다.

68~69p.
..깊은 어둠 속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은 자는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물론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다.
만약 슬픔에 잠긴 여인이
웬일인지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보통 때와 다르게 행동하고
분별력을 잃고, 거울 보는 것조차 잊는다면
그녀의 슬픔은 정말이지 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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