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p. «겐 노인» ...산기슭에는 마을이 있고 마을 안에는 무덤이 있다. 무덤은 이때 깨어나고 사람은 이때 잠들어 꿈의 세계에서 고인과 만나 울고 웃는다....
19p. «겐 노인» ...이렇게 그의 마음은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황폐해져, 사람들이 아침 해를 쬐고 밥짓는 연기가 오르고 부모자식이 있고 부부가 있으며 형제가 있고 친구가 있으며 눈물이 있는 세계에 그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그는 언제부터인가 인적 없는 묘지에 그 쓸쓸한 거처를 옮기고 그 마음도 땅속에 묻어 버렸던 것이다.
20p. «겐 노인» ...속세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보는 눈으로 그를 본다면 잘못이다. 그는 아예 파도의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이니까…….
43p. «무사시노» ...억지로 흩어놓은 듯한 구름 사이로 총명한 사람의 눈처럼 맑게 갠 파란 하늘이 엿보였다....
57p. «무사시노» ...다리 밑에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주 부드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물이 양쪽 벽에 세차게 부딪혀 나는 소리가 아니고, 또 얕은 개울 같은 소리도 아니다. 진흙으로 벽을 바른 듯한 깊은 도랑에 풍부한 수량이 흐르므로, 물과 물이 얽히고설켜 서로 비벼대니 자연히 소리가 나는 것이다. 얼마나 정겨운 소리인가!
63p. «무사시노» ...왜 이와 같은 곳이 우리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나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다. 즉 이런 교외의 광경은 왠지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라는 것의 축소판을 보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시골 사람에게도 도시 사람에게도 감흥을 일으킬 법한 이야기, 작은 이야기, 게다가 아주 슬픈 이야기, 혹은 포복할 정도의 이야기가 두세 개쯤 그곳의 처마 밑에 숨어 있는 듯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그 특색을 말하자면, 대도시 생활의 흔적과 시골 생활의 여파가 여기에서 서로 만나 완만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보라, 저기에 외눈박이 개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 개의 이름이 알려진 곳까지가 곧 이 교외의 영역이다.
84~85p.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오늘 같은 밤 나 홀로 밤늦게 등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인생의 고독을 느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애상을 불러일으키지. 그때 내 이기심의 뿔은 뚝 부러져 왠지 사람이 그리워지네. 옛날 일과 친구가 생각나지. 그때 강하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네. 아니, 그때 그 광경 속에 서 있던 그 사람들이네. 아(我)와 타(他)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모두 다 이승의 어느 하늘 어느 땅 한구석에서 태어나 머나먼 행로를 헤매다가 서로 손잡고 영원한 하늘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93p. «쇠고기와 감자» .."그러나 비프스테이크에 감자는 부속물이야." 구레나룻 신사가 우쭐대며 말했다. .."그렇고말고! 이상은 즉 현실의 부속물이지! 감자도 전혀 없으면 곤란해. 그러나 감자뿐이라면 정말 곤란하지!"
117p. «쇠고기와 감자»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흔히 하는 말이지만, 역시 이 질문을 발하고자 욕망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종교의 원천이 흘러나옵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이외는 모두 유희입니다. 허위입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무익합니다. 무익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무익합니다……. 아아, 지쳤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마디 합니다만, 나는 인간을 두 종류로 구별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놀라는 사람과 태연한 사람……."
141p. «그림의 슬픔» ..어둠에도 기쁨이 있다. 빛에도 슬픔이 있다. 밀짚모자의 챙을 기울여 저쪽의 언덕, 이쪽의 숲을 바라보면 환하게 비치는 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풍경……,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153p. «가마쿠라 부인»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오름에 따라 당시 우리 둘의 사랑이 깨끗하고 깊고 높으며 슬픈 것을 생각하고, 두 사람 모두 아직 세상의 악에 오염되지 않고 오로지 이상의 세계를 우러러보며, 어느 때는 노래하고, 어느 때는 밤하늘 달빛 밑에서 서로 껴안고 울었던 일등을 떠올렸다.
174p. «비범한 범인» ..그처럼 허영심이 적은 남자는 드물 것이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여 그것으로 만족하고 안심하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는 결코 자기와 타인을 비교하지 않는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운명에 만족하고 그리고 운명을 개척하며 나아간다.
192p. «운명론자» .."자살이 아닙니다. 자멸입니다. 운명은 나의 자살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운명의 귀신이 가장 잘 쓰는 도구의 하나는 ‘미혹(迷惑)‘입니다. ‘미혹‘은 슬픔을 고통으로 바꿉니다. 고뇌를 다시 배가시킵니다. 자살은 결심입니다. 시종 미혹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어찌 자살할 결심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므로 ‘미혹‘이라는 둔하고 무거운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시 자멸이라는 어리석은 방법밖에 없습니다."
197p. «운명론자» ..어둠에 익숙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잘 보는 것처럼, 부자연스런 처지에 놓인 소년이 어느새 어두운 부자연의 심연에 숨어 있는 흑점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15p. «운명론자» .."과감히 이혼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것은 새로운 사실을 만들 뿐입니다. 이미 있는 사실은 그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할 수 없지 않나요?" .."그러니 운명입니다. 이혼한다고 해서 친어머니가 아버지의 원수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혼한다고 해서 여동생을 아내로 사랑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과거의 사실을 지울 수 없는 한, 사람은 도저히 운명의 힘에서 탈피할 수가 없겠지요."
220p. «정직자» ..나 같은 남자는 이 세상에 꽤 많겠지만, 모두 자신이 처한 환경, 예를 들면 옛날 사농공상의 어느 계급에 속한 이들은 각기 나름대로 그럴듯한 연극을 합니다. 단지 이런 사람은(나도 그 한사람이지만), 자신의 환경 밖으로는 거의 탈출할 수 없습니다. 그 탈출할 수 없다는 것에 무게가 붙어서 그 연극을 더욱 잘 해내는 것입니다.
243p. «여난» ..소리를 파는 자들은 곡이 끝나면 늘상 웃으며 반드시 겸손의 말 한두 마디를 내뱉지만 그는 묵묵히 앉아서 지금 막 자신이 부른 음이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가는 뒤를 쫓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288p. «봄 새» ..하늘빛, 햇빛, 오래된 성터, 그리고 소년, 마치 한 폭의 그림입니다. 소년은 천사입니다. 이때 내 눈에는 로쿠조가 전혀 백치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치와 천사, 이 얼마나 가련한 대조인가요. 나는 이때 백치이지만 그 역시 자연의 자식이 아닌가 하고 절절히 느꼈습니다.
297p. «궁사» ..몸도 마음도 멍한 듯한 절망적 무아(無我)가 안개처럼 무겁게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자욱이 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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