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삶은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인 듯했다. 현실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막연히 상상했던 어른의 삶과 일치했기 때문이고, 비현실적이었던 이유는 우리가 결코 그들처럼 되지 않을 듯했기 때문이다.

17p.
..그게 또 다른 문제였다. 관심사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반드시 책이나 전시회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듯했다. 우린 종종 그런 현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해도 순수한 창작의 즐거움과 창의성을 위해 작업했던 수십 년 전의 예술가들을 부러워했다.

22p.
..레나는 이 도시에서 내 유일한 현지인 친구였다. 마누와 나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약간 부끄러웠다. 그 사실이 우리에 대한 평가라도 된다는 듯. 활기찬 광장에 있을 때면 즐거운 세상이 우리를 비켜 가는 느낌이 들었다.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전부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다. 두세 명씩 모여 있는 그들은 우리보다 더 정당한 자격으로 그곳에 있는 듯했다.

38p.
...이 모든 활동은 사회를 구성하는 무언의 기반이었다. 우리는 그 사회의 규칙을 너무도 잘 익힌 나머지 규칙으로 여기지 않고 삶의 자연스러운 궤도로 받아들였다. 때때로 교수님은 우리가 삶을 꾸려가며 만들어낸 루틴을 인류학자가 관찰한다고 상상해보라고 했다. 루틴은 임의적일 수도 있고 필수적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게임의 규칙이었다. 조화와 지속성을 보장하는 듯한 착각을 주는 규칙.

69p.
..박물관에서 거대한 돌기둥 컬렉션을 보았는데 돌기둥에는 사람의 몸에 동물의 팔다리가 달린 아이들을 안고 있는 주술사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내 삶에서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경험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78~79p.
..이 집은 우리에게 첫 아이와도 같아요.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가 부른 배를 양손으로 감쌌다. 둘은 도심을 벗어나 농가로 이사할 계획이었고, 시간을 들여 그 집을 개조할 거라고 했다. 난 왠지 저들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농가며 개조며 이젠 그만 도시를 떠날 거라고. 그 이유까지도 줄줄이 댈 수 있었다. 우리 아이는 자연에서 자라야 한다, 마음껏 뛰놀 공간이 있어야 한다, 세상과 조화를 이루고 나무와 꽃과 과일 이름을 아는 아이들과 함께 자라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도시에서의 생활이 여유가 없고, 사람들과 단절되었으며,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할 것이다. 진짜 이웃과 직접 기른 채소를 먹는,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내가 그걸 너무 잘 안다는 사실에 오히려 숨이 막혔다. 그런 내 예상은 비현실적인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현실적이었다. 마치 결국 우리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고, 똑같은 말로 그 삶을 묘사한다는 듯이. 조금만 집중하면 우리의 삶, 우리가 닮아갈 부류의 사람들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것이 가져올 미래를 그려보는 데는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한 요소가 있었다. 결국 선택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제를 너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85~86p.
..자신을 뜯어고치는 중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반복된 자기 합리화에서는 우월감이 느껴졌다. 마치 정신세계가 리모델링해야 하는 집이라도 되고 그 구성 요소가 방, 벽, 기둥처럼 명확히 구분되며, 그 안의 누수와 균열을 고칠 수 있다는 듯이. 또한 그들을 진정으로 아는 것은 늘 한계가 있는 듯했다. 정신적 안정을 끊임없이 관리하는 그들은 누군가와 진정으로 가까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술집에 우리 셋만 남았을 때 마누와 라비, 나는 결국 ‘인색함‘이 우리가 찾던 정의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누는 그런 인색함은 너무 깊은 자아 성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고, 라비는 지나치게 엄격한 개인 관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외국인들 모임에 나가보면 꼭 일찌감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만 가야 한다고 초를 치는 애들이 있어. 라비는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러닝을 해야 한다거나 이튿날 머리가 몽롱하면 안 된다면서. 라비는 이렇게 집단적 동지애가 부족해진 이유 역시 심리 치료의 결과라고 확신했다. 라비의 말에 따르면 심리 치료는 이기주의를 가르치는 교육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관계에서 경계를 설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특별한 가치를 끊임없이 인정하는 훈련을 무자비하게 받은 결과였는데 이 모두가 광적인 개인주의의 산물이었다. 난 라비에게 넌 사람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걸 싫어할 뿐이라고 농담했다.
..그런 게 아냐. 라비가 진지하게 말했다. 난 사람들이 자신을 너무 중요시하는 게 싫을 뿐이야. 이튿날 출근해야 하는 건 다 마찬가지잖아.

108p.
..어느 정도 사과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인간관계가 유지되기는 힘들 것이다.

135p.
..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받은 충격을 입 밖으로 내기도 곤란했다. 원래 조부모는 늙기 마련이고 아프기 마련이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남들이 일상을 멈추거나 불편을 감수해가며 공감해주길 바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최상급의 비극이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친절을 불러오는 비극. 그런가 하면 삶 자체에 내재된 비극도 있었다. 삶은 상실과 파괴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155p.
..내가 젊다는 사실을 깨우친 건 충격이었다. 최근 들어 더는 내가 젊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젊음은 다른 시절, 그러니까 애쓰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미래가 저절로 굴러 온다고 믿었던 시절의 전유물인 듯했다.

172p.
..살면서 환골탈태한 사람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레나가 전에 말한 적 있었다. 전보다 더 아름다워지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부자가 된 사람들.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불안감 때문이야. 레나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불안감을 종종 겸손으로 오해하지. 반면 정말로 자기 삶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겸손은 사실 일종의 교만이야. 자신의 삶과 더 큰 세상에서 그 삶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확신이지.

181p.
..난 아이에게 하듯 어르고 달래고 다독이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함께 시를 읽으며 쌓아온 우리의 우정은 위기에 처했다. 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예의를 지켜야 했고 위기 앞에서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190p.
..촬영하는 몇 달 내내 나는 살아가는 방식도, 공원을 즐기는 방식도 참 다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양한 삶의 형태, 낯설고도 독특한 방식을 가능한 한 많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장면 간의 연결을 매끄럽게 다듬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처럼 편집하면서 차츰 깨닫게 되었다. 겉보기엔 다양해 보여도 결국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덧없이 흐르는 하루의 시간을 뚫고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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