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 ..그렇다. 정착민과 유목민을 나누는 것은 가짜 양자택일이다. 왜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여정이며, 머묾도 그 여정을 구성하는 정서·사회·지리·정치적 기착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결코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삶은 불안하고, 발을 딛고 선 땅은 흔들린다"는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 위를 걷는 존재다.... - P-1
12p. ..페렉은 "산다는 것, 그것은 최대한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따금 충돌은 가혹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현실의 벽 또는 보이지 않는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울타리는 나를 보호하지 않고 가둬 버린다. 틈새를 찾아 파고들어 가고, 길을 내서 잠입해 들어가며, 현대 시인들의 말처럼 "자리 잡기étre dans la place" 위해 뒷문으로 들어가야 할 때도 있다. 주체의 자기 전개는 자리를 옮기는 과정을 수반한다. 자리를 옮기는 일은 곧 자기를 뛰어넘는 일이다. 이는 인종 간 장벽, 유리 천장, 울타리의 논리 등 보이지 않는 구조물과 신호 체계들로 인해 방해받기도 한다. 매끄럽게 진입하고 싶지만 닫힌 문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러한 공간은 칸칸이 막힌 채 밀봉되어 있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자유로이 옮겨 다닐 수 없다. 그리하여 칸막이와 벽을 부수고 침입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보다 신중한 방식을 원한다면, 문을 개방하는 주문을 배우고, 규칙을 해독해 내고, 그곳을 지배하는 언어의 세계에 입문해야만 한다. - P-1
15p. ...우리는 우리가 머무는 장소에 이미 익숙하다. 그곳에 자신을 맞추었고 순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착한 삶, 정체된 삶에 길들여 있다. 실존은 그곳에 얼어붙었고, 우리는 그것을 안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실존은 움직임 없는 것이 되며, 우리는 그 항구성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 P-1
16p. ..정서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나 가족 관계는 움직이는 별자리와 같다. 그리하여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벌어지고, 관계가 구성되거나 재구성되고, 서로 의존하거나 거리를 두는 등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따라 상호적인 자리 게임은 끊임없이 갱신된다. 비어 있는 어떤 자리들은 기억의 장소가 된다. 간절히 원하는 어떤 자리가 있다면, 우리는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자리의 문제는 되갚음, 보상, 화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리의 공백이 고통의 원천이 되는 관계, 타인이나 자기 자신, 또는 구멍 난 역사와의 관계에서 말이다. 우리가 언제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백에 기록하기도 한다. 본문과 나란히 가장자리에 기록된 것은 의미의 개인적인 재전유, 성찰, 권위로부터 거리 두기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가장자리에 기록하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로, 언젠가 여백에서만 자신을 주장하던 그 목소리가 텍스트의 심장부를 구성하는 날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 P-1
17p. ...우리는 눈까지 감고 따스한 빛을 즐기기만 할 뿐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내가 이 순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괄호 안에 집어넣은 삽입구와 같은 데 비해, 도마뱀은 자기와의 순수한 일치 속에서 완벽하게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중이다. 빈둥대는 것이 도마뱀의 일이므로Le lézard lézarde.... - P-1
21p. ...라틴어 residere는 산이 무너져 내리고, 파도가 잔잔해지고, 불길이 잦아들고,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묘사할 때도 쓰인다. 그러므로 거주한다는 것은 보다 차분하게 누그러진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운동하는 삶의 격렬함과 충동, 강렬함을 잃어버린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팽이와 같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아주 조금만 이동하는 움직임을 만들어야 할까? 우리는 이처럼 소용돌이치는 에너지의 불안정한 균형 속에서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열망과 운동의 생명력을 결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 P-1
34p. ..그 정도로 자리가 미리 규정되어 있을 때, 내 실존의 그림이 가장 세세한 윤곽까지 미리 그려져 있을 때, 나를 가시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부재밖에 없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저항하고 자신의 힘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리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지워 버리거나 사라지는 것이 최후의 방편인 것이다. - P-1
76p. ...내가 다른 자리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어쩌다 속하게 된 지금의 자리에서 내가 죽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부서진 배처럼 좌초되고 실패를 선고받는다. 편안하지 않다는 느낌, 진정성이 없다는 느낌, 마음 깊은 곳의 불편함은 나로 하여금 다른 지평을 찾게 한다. 내가 노동자, 농민, 장인, 하인이거나 그들의 자식일 뿐이라는 게 부끄러운 이유는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이어받은 열등감 때문이며, 그들이 얻지 못한 성공을 내가 거머쥐기를 바라는 그들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나일 뿐임을 부끄러워하며 내 "한계"를 의식하게 된다.... - P-1
86p. ...에르노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엑스트라"로서 그곳에 진입한다. 마치 우리의 진짜 삶은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일어나는 일들에 진정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부르디외 역시 "우리의 환경에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어떤 문화적 사실 앞에서 겪었던 당황함과 무질서"에 대해 설명한다. 이 환경에 속한 척, 이 장면을 사는 척하지만, 내적으로는 거리감을 느끼고 무관심한 것조차 가능하다. 마치 그곳에 충분히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순간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진정으로 살아 내지도 못하며, 현실에 정면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연루되지도 못하는 것처럼. - P-1
89p. ..실제로 우리는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는 것을 강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정된 자리가 없다는 것, 하나의 사회적 공간에서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 하나의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처함으로써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 역시 하나의 특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온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간격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승인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모든 형식의 인간 연구에 필요한 비판적 거리를 만들어 준다. 이것이 바로 역사학자 로맹 베르트랑이 매우 분명하게 주장했던 바이다. "안에" 존재하기보다는 "사이에" 존재하기, 안주하지 않고 항상 자리를 바꾸기. 나아가 이런 본성적 "불안"은 어쩌면 인문학의 소명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1
91p. ...이런 식으로 인생에서 놓쳐 버린 것, 실존적 실패, 나쁜 선택, 잘못된 길들은 좌절의 순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패주 속에서 나를 구성해 내는 역설적 경험을 가져다주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조품 같은 삶을 산다는 느낌이야말로 새로운 필요에 대한 감각, 실존과 맺는 다른 관계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 P-1
98p. ..불협화음은 사회적 범주와 분류가 뒤섞일 때 나타난다. 내가 올바른 톤으로 올바르게 말하지 않을 때, 관계 속에서 무언가가 "삐걱"일 때, 대화 중에 낯선 음악이 흘러나올 때처럼 말이다. 이러한 불협화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사회적 궤적이 누설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불협화음은 적응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려 준다. 어쩌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고 사회적 촌극을 연기하는 것은 너무 값비싼 대가다. 그것은 자리 옮김이 한계에 달하는 지점, 새 자리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지점을 나타낸다. 힘들게 얻은 이 자리를 지탱할 수 없는 순간은 나의 목소리와 말하는 방식에서 들리기도 하고, 몸이 떨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으로 드러나기도한다. - P-1
118p. ..그런데 나는 내적인 삶, 나의 몸 안에서 정말 제자리에 있는 것일까? 나는 어디에서 마침내 "내 집"에 있게 되는가? 『모퉁이 푯말』에서 앙리 미쇼는 우리 안의 "자리들"에 대해 질문한다. 내가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머리인가, 다리인가, 뱃속인가? 나는 어떤 흥분이나 노스탤지어, 피로, 권태의 상태로 존재하는가? 어쩌면 "안의 공간"이 있어서 거기서 내가 거주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저의 감각"으로, 감정적 토대로서 나의 존재의 습관을 구성하며,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내 영혼의 형태, 실루엣이라고 할수 있을 내면의 감각을 구성한다.... - P-1
119p. ..내가 쓰지 않는 근육이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장기가 있는 것처럼, 안의 공간에는 내가 차지하지 않은 백색 지대, 미개척의 영역이 있다. 어떠한 감정적 경험은 나 자신에게 끝내 낯선 것으로 남기도 한다. 분노나 고양, 자부심이나 야망의 모습이 추상으로 남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말을 거는 저 사람이 거주하는 보이지 않는 장소에 대해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타인은 나에게 이 거리만큼 떨어진 채 "얼굴을 마주한 수수께끼"로 남도록 선고받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 P-1
124p. .."매일 아침 같은 현존, 같은 상처가 나를 기다린다. 내 눈앞에 버티는 거울이 비추는 이미지를 나는 피할 수가 없다. 초췌한 얼굴, 구부정한 어깨, 근시인 눈, 머리카락은 남아 있지 않고, 정말이지 아름다운 데라고는 없다. 이 흉한 껍데기,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새장 속에 갇힌 채 나는 나를 끌고 다니며 나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 격자를 통해 말하고, 바라보고, 바라봄을 당해야 한다. 나는 이 피부 속에 고여 있다." - P-1
135p. .."부모 두 사람, 가계 두 개를 가졌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 반복과 단절 사이에서 새로운 모티프가 그려지고 새로운 조합이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드가 다시 분배되는 것이다. 게임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각자에게는 버릇없음의 몫이 있다. 항해의 균형을 잡기 위한 약간의 밸러스트. 사물에 관한 다른 시선. 가족 신화의 변형. 소금 한 알을 추가하기. 한 걸음 물러서기. 관점 바꾸기." - P-1
141p. ..그러나 가계의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 하나에 자신을 접목한 것처럼 자신을 혈통 안에서 인식하고 그 대리인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누델만은 이처럼 "다른 삶, 다른 정서"를 떠안는 방식에서 자기중심성이 반영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마치 과거의 실존을 반복하듯 조상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특질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조상들의 삶은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것은 위안인가, 변명인가? 그러한 연결은 소속에 대한 욕망, 고독과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로 인해 억지로 만들어지고 과장된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가족의 과거라는 지원 없이 자신이 될 위험을 감수하는 것, 자꾸만 과거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기만을 피하는 것은 주체의 진정성과 자율성을 위한 조건이다. 나아가 그것은 주체가 숨을 쉴 수 있는 조건이다. 계보학의 논리는 먼지 쌓인 낡은 종이뭉치처럼 우리를 질식시킨다. "조상의 정체성을 떠맡는" 것, 그것은 "자신의 기억을 가족 내러티브로 축소"하는 것이다. 나의 자리는 내가 위치한 가계의 가지 하나로 완벽히 환원되지 않는다. - P-1
152p. ..알파벳 E 없이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부재 투성이의 구멍난 삶이라 해도 그것을 살아 내는 것 역시 가능하다. 모국어에서 가장 필요한 글자 E 없이 책 한 권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없이도 인생을 전부 살아낼 수 있다. 그 부재가 우리의 문법을 바꾸고 어휘에 그늘을 드리운다 해도 우리는 계속해서 실존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소중한 이들을 잃었을 때 그들 없이 살기 위해서는 E 없이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것과 같은 광기와 기발함이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 삶은 그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 P-1
157~158p. ...갓난아기가 자신을 안아 주는 부모의 팔 덕분에 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 존재가 구체화되고 실존이 밀도와 현존을 얻게 되는 것도 타인의 손길,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다. 그러한 팔이 없을 때,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애정과 관심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지지대를 선사하는 낯선 이가 나타나 우리로 하여금 부유하는 실존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머리에 얹은 손, 짧은 한 마디 말은 내면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된다. - P-1
172p. ..누군가는 바닷속으로 삼켜지고, 사막에 버려지고, 수용소에 끌려간다. 그러나 그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군중 한가운데서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이 남자들과 여자들, 아이들이 겪어낸 개인적 재앙의 규모가 어떠하든, 그들이 겪은 공포에 조금도 영향받지 않은 채 제자리를 지키는 무관심한 세상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이리라. 세계는 끄떡없는 안정성으로 그들의 고통을 모욕한다. 이처럼 동요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세상보다는 그들의 내적 혼란과 조응하는 폐허가 차라리 나을 것이다. 실제로 안데르스는 1953년 6월 19일 다음과 같은 기묘한 기록을 남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오늘날 나를 혼란스럽고 두렵게 하는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은 것, 파괴되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는 것들이다." - P-1
173~174p. ..이름 모를 이는 말한다. 어떤 자리가 우리에게 꼭 맞다면, 우리는 거기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거라고. .."올바른 아내를 선택하는 남자는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잃게 된다. 직업을 "찾은" 사람은 그 안에 자신을 가둘 뿐이다. 자신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건반으로만 연주하는 사람은 제 손가락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 P-1
183p. ...호텔에서 지내면 매일 아침 빈손으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느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 거의 모든 애착에서 초연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텔에는 역사가 없으므로 여행 가방도 없이 도착한 사람들은 각자 익명성과 가벼움 속에서 자기만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 P-1
184~185p. ..또한 우리가 꿈꾸는 제자리가 독점적 소유물이나 고정된 공간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루소가 말했듯 위험은 자신의 영토에 담을 치는 데 있다. 자리의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이며, 그것은 소유의 문제와는 별개다. 우리의 공간은 내부에 있다. 우리는 공간을 내부로 옮기는 존재들이다. 이 공간은 가소성을 지닌 채 살아 있으며, 그렇기에 다른 장소들을 향한 꿈으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지 못할 때 축소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중립적인 지대, 공터,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공간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자리를 창조할 수 있다. - P-1
198~199p. ..살기 위해, 자유롭다고 믿기 위해, 우리에게는 여러 공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나를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나로 존재하는 일의 피로감과 오랜 습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다른 장소, 지나가는 과도기적 장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장소에도 속하지 않고 닻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자리를 소망하지 않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기만의 장소가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결핍이 아니라 자유로서 경험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단 하나의 자리만 할당받는 것은 최악의 형벌이 아닐까? 몽테뉴에 따르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자리는 바로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변모시키는 새로운 자리에서 나로 존재하는 일의 수고로움을 기쁘게 내려놓고 안도하지 않는가? 우리의 존재는 정착, 정주, 소유가 아니라 도약하는 충동, 운동에 있다. - P-1
200p. ..그러나 나는 내 안에 타인을 위한 자리, 그들의 경험과 사고방식과 감정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베르그송이 "마음의 예의"라고 부른 것의 심원한 의미이며, 이는 상대에게 모든 자리를 내어 주는 재량이자 겸허함이다. 이처럼 타인의 자리에서 그의 관점을 취해 보는 것은 단순한 관대함의 제스처를 넘어선다. 우리는 멀리 있는 바깥의 존재이길 그치고 가깝게 감지할 수 있게 된 타인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배가시키고 수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곧 나의 삶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타인의 자리에 서서 그를 더 잘 이해하고, 지지하고, 돌볼 수 있게 된다. 내가 그 자리에서 보았기 때문에, 혹은 보다 정확히 내가 그 자리를 내면화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일인칭으로 실험해 본 모든 자리에 그의 자리가 덧붙여지기 때문에, 그것은 나를 침범하거나 어지럽히기보다는 풍요롭게 한다. 산 사람이건 죽은 사람이건, 현실의 사람이건 허구의 사람이건, 타인의 삶이 우리 안에서 제자리를 차지하면, 이러한 동일시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보다 깊이를 갖는다. - P-1
202p. ...어떤 새들은 나무 주위를 선회하며 커다란 원을 그리다 비로소 그곳에 착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어떤 장소에 스며들어 갈 수 있는 틈이 있는지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문으로만 들어가지 않는다. 늘 환영받는 존재인 것도 아니다. 그 공간을 둘러보고, 거기있는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 보고,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 그곳을 제 것으로 만들어 보자. 이 장소가 내 소유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통해 존재의 잠재력을 발휘해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따라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무언가 말해 주는 장소는 나를 이곳으로까지 이끈 가시적이거나 은밀한 지리적·사회적·감정적 여정을 담는 곳, 정체성 형성 과정의 흔적을 보존하는 자리일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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