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무언가를 체험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난 녹색의 밤에 하얗게 빛나는 모래벌판 끝 지평선을 본다. 여기서부터 30킬로미터는 됨 직하다. 어째서 거기 탐피코 방향에서 내세가 시작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 탐피코를 알고 있다. 순전히 상상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순전히 불안으로 인해 환상적으로 되는 것, 곧 신비주의를 난 거부한다. - P-1
...내 생각에, 헤르베르트는 내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데 동료로서 상처를 받은 것 같았지만, 뭘 믿기엔 너무 더웠다. 아니면 헤르베르트처럼 아무거나 믿으면 될 노릇이었다. - P-1
..그녀는 흐느끼면서 두 주먹으로 나를 때리고, 난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녀가 그걸 좋아하니깐. - P-1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엔진은 밤이고 낮이고 돌아간다. 엔진 소리를 듣고 느끼며 쉼 없이 나아가지만 움직이는 건 해와 달뿐이다.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환영일지 모른다. 우리 배가 아래위로 피칭하면 파도가 갈라진다. 끝없는 수평선. 사람들은 원반 가운데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이고 물결만 미끄러질 뿐이다. 시속 몇 노트로 주행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상당히 빠른 속도일 텐데,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 나이만 먹어 갈 뿐! - P-1
..혼자라서 내가 슬플 거라는 그 애의 추측은 내 기분을 망쳤다. 난 혼자서 여행하는 데 익숙하다. 제대로 된 모든 남자가 그렇듯 난 일과 더불어 살아간다. 반대로, 난 다른 것을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혼자 사는 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남자가 살아가는 유일한 상태 아닐까. 말할 필요도 없이 혼자 깨어나는 걸 난 즐긴다. 그걸 이해하는 여자가 있겠는가? 잘 잤느냐는 질문부터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난 생각에서 이미 앞서 나가고 앞일을 생각하는 데 익숙해 뒤돌아보지 않고 계획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녁에 하는 다정한 애무는 뭐 괜찮지만 아침 애무는 견딜 수 없고, 한 여자와 사나흘 이상 보내는 건 솔직히 말해 나로서는 늘 위선의 시작이다. 아침에 감정이라니, 그걸 참아 낼 남자는 없다. 차라리 설거지가 낫겠다! - P-1
...신이 전염병 같은 일을 만든 거고 우리는 신에게서 전염병을 빼앗았다. 이제 우리는 신에게서 번식도 뺏어야 한다.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 반대로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결정권을 가진 인간의 품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염병을 전쟁으로 대체할 것이다.... - P-1
...자베트는 내가 진열품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걸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단지 서른 살이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한하고 순진한 신뢰를 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도 존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존경을 기대하다니, 난 마음이 울적했다. 내 경험에 대해 말할라치면 자베트는 귀 기울여 들었지만 노인네 말 듣듯이 했다. 말을 끊는 법도 없고 예의를 지키지만, 믿지도 않았고 열광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내가 벌써 얘기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이야기하는 도중에 선수를 치며 말을 끊는 정도였다. 그러면 난 부끄러웠다.... - P-1
..난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느껴야만 한다고 말할 때면 견딜 수가 없다. 그러면 말하는 대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나 자신이 장님처럼 느껴진다. - P-1
..난 그 애가 움직일 수 없게 양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강아지 머리를 잡듯이. 그 애가 목덜미에 힘을 주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었다. 내 손은 나사 바이스처럼 단단했다. 그 애가 눈을 감았다. 나는 키스하지 않았다. 그냥 머리를 붙잡고만 있었다. 마치 꽃병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가볍고 부서지기 쉬운, 그러다가 점점 무거워지는 꽃병. - P-1
..난 자살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다고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바뀌느냐 말이다. 이 시간, 내가 원한 건 아예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거였다! - P-1
...그녀는 여자가 남자에게 이해받으려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그녀 말로는) 여자를 비밀스러운 존재로 원하는데, 자신의 몰이해에 열광하고 흥분하기 위해서란다. 한나에 따르면, 남자는 오직 자기 말만 듣기 때문에 남자한테 이해받기를 원하는 여자의 삶이란 망가질 수밖에 없다. 한나에 따르면 그렇다. 남자는 자신을 세상의 주인으로 여기는데, 여자는 단지 남자의 거울일 뿐이라는 거다. 주인은 굳이 하인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 P-1
...나의 오류는 우리 기술자들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거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넌 삶을 형상이 아니라 단순한 덧셈으로 다룬다"는 거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관계도 설정하지 못하고, 그 결과 시간에 대한 관계도 없다. 삶이란 시간 속의 형상이라는 거다. 자기가 아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없다고 한나도 인정한다. 삶은 기술로 정복할 수 있는 질료가 아니라고 한다. 자베트와 관련한 나의 오류란 반복이다. 다시 말해,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듯이, 그리하여 자연에 역행해서 내가 행동했다는 거다. 계속 더하기하면서, 말하자면 우리 자식과 결혼하면서 우리 나이를 지양할 수는 없는 거라고. - P-1
..이날은 뭘 해야 할지, 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상한 날이었다. 나 자신조차 몰라봤고 그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오후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파랗고 힘겨운 날이지만 아름답고 무한했다. 그러다가 결국 저녁에 다시 프라도 담에 앉아 눈을 감는다. 내가 아바나에 있노라, 프라도 담에 앉아 있노라, 떠올려 보려 하지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끔찍하다. - P-1
..사후(死後) 조치: 보고서나 편지, 작은 노트와 같은 내 삶의 모든 증거는 폐기할 것. 하나도 맞지 않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빛 속에 있는 것. 어딘가에서 (최근에 만난 코린트의 노인처럼!) 나귀를 모는 거야말로 우리의 일이지! 금잔화, 아스팔트, 바다 위를 비추는 빛 속에서 우리 자신이 스러질 것임을 알면서도 그 빛을 견뎌 내는 것, (노래할 때의 우리 아이처럼) 즐거움을 견뎌 내는 것. 시간을, 혹은 순간 속 영원함을 견뎌 내는 것. 영원함이란 존재했던 것들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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