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p.
...분명 인간을 마지막까지 일으켜 세우는 것은 용기도 희망도 꿈도 아니라 허세다.

114p.
"...이렇게 선의 100퍼센트가 아닌 면도 좋아요. 선의는 기름과도 같아서 사용법이나 양 조절을 잘못하면 오히려 상대를 힘들게 하니까요."

246p.
...어둠에 잠긴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아파트의 창문 여기저기에 조명이 켜졌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빛, 살아 있는 빛에 왠지 가슴이 미어졌다.

298p.
..멀어지는 등이 보이는 듯한 문장이었다.

319p.
..하루히코. 나는 그때 너를 데리고 네가 가자고 가리킨 아름답고 자유로운 곳으로 걸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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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p.
..‘I have little more to say. I merely repeat, remember always your duty of enmity towards Man and all his ways. Whatever goes upon two legs is an enemy. Whatever goes upon four legs, or has wings, is a friend. And remember also that in fighting against Man, we must not come to resemble him. Even when you have conquered him, do not adopt his vices. No animal must ever live in a house, or sleep in a bed, or wear clothes, or drink alcohol, or smoke tobacco, or touch money, or engage in trade. All the habits of Man are evil. And, above all, no animal must ever tyrannize over his own kind. Weak or strong, clever or simple, we are all brothers. No animal must ever kill any other animal. All animals are equal.

9p.
...And then, after a few preliminary tries, the whole farm burst out into ‘Beasts of England‘ in tremendous unison. The cows lowed it, the dogs whined it, the sheep bleated it, the horses whinnied it, the ducks quacked it....

23p.
...Old Benjamin, the donkey, seemed quite unchanged since the Rebellion. He did his work in the same slow obstinate way as he had done it in Jones‘s time, never shirking, and never volunteering for extra work either. About the Rebellion and its results he would express no opinion. When asked whether he was not happier now that Jones was gone, he would say only ‘Donkeys live a long time. None of you has ever seen a dead donkey,‘ and the others had to be content with this cryptic answer.

41p.
...Benjamin was the only animal who did not side with either faction. He refused to believe either that food would become more plentiful or that the windmill would save work. Windmill or no windmill, he said, life would go on as it had always gone on – that is, badly.

112~113p.
...After much choking, during which his various chins turned purple, he managed to get it out: ‘If you have your lower animals to contend with,‘ he said, ‘we have our lower classes!‘ This bon mot set the table in a roar; and Mr Pilkington once again congratulated the pigs on the low rations, the long working hours, and the general absence of pampering which he had observed on Animal Farm.

114p.
...What was it that had altered in the faces of the pigs? Clover‘s old dim eyes flitted from one face to another. Some of them had five chins, some had four, some had three. But what was it that seemed to be melting and chan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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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p.
..해리엇은 밖으로 나갔다. 날이 덥고, 햇살이 하얗게 내리쬐고, 사방이 고요했다. 치과에서 이를 때운 다음 안쪽 어금니에서 자두처럼 검게 피어오르는 통증을 느끼며 유리문을 밀고 주차장으로 나갈 때 같은 기분이었다....

21p.
...아이다는 아직 자기 의자에 앉아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다가 저렇게 또렷하게 느껴진 적은, 저렇게 자리를 지키면서 놀라울 만큼 가만히 앉아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52p.
..시멘트 포대 더미의 그늘은 놀라울 만큼 짙고 시원했다. 등에 닿는 시멘트 자체가 시원했다. 해리엇은 생각했다. 나는 이날을, 지금 이 기분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언덕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농기계가 단조로운 소리를 냈다. 그 위로 말똥가리 세 마리가 검은 종이 연처럼 날아갔다. 아이다를 잃은 날의 기억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나는 저 검은 날개들, 그림자 하나 없는 목초지와 유리 건판 같은 공기로 남을 것이다.

161p.
..죽음은 행복의 해안이라고들 했다. 해변에 갔을 때 찍은 사진 속 해리엇네 가족은 모두 젊었고, 그들 가운데 로빈이 서 있었다. 배와 하얀 손수건, 햇살 속으로 날아오르는 바닷새들. 그것은 모두가 구원받는 꿈이었다.

165p.
..해리엇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불 아래의 시트가 아직 바스락거렸다. 아이다가 직접 빨아서 매끄럽게 편 시트였다. 이 집에 남은 아이다의 마지막 흔적이었기에 해리엇은—침대로 기어 들어가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베개에 얼굴을 묻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고 싶었지만—마지막 남은 천국의 작은 조각을 차마 흩뜨릴 수 없었다. 밤이 되어 검은 창유리에 침대가 환하고 또렷하게 반사되면 잘 접힌 주름이 결혼식 케이크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해리엇에게 그것은 그저 바라보면서 갈망할 뿐 먹을 수 없는 성찬이었다. 침대에 들어가서 자고 나면 이제 아이다가 정리해준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희망조차 사라질 테니 말이다.

172p.
...배? 배와 관련된 것도 많았다. 리비가 생강을 넣어 만들던 배 잼. 리비가 부르던 배나무 노래. 20세기 초에 리비가 주립 여자 대학을 다닐 때 그렸던 배가 들어간 정물화. 리비의 이름은 꺼내지도 않고 물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도 몇 시간 동안 리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리비가 모든 대화를 사로잡았다. 모든 지역과 색깔, 모든 채소와 나무, 모든 숟가락과 문손잡이와 사탕 그릇, 전부 리비의 기억으로 물들고 희석되었다. 해리엇은 이런 식으로 리비를 계속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리비가 사람이 아니라 기묘하게 어디에나 존재하는 기체로 변해서 열쇠 구멍과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듯한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179p.
..."비결은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세." 이제 해리엇이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듯이, 드넓고 기묘한 고통의 세계에서 그것은 정말 배울 가치가 있는 비결이었다.

217p.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저번에 토머스 제퍼슨이 존 애덤스에게 쓴 글을 읽었단다. 나이가 들고 보니 평생 살면서 걱정하던 일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지. ‘일어나지도 않은 나쁜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아무튼 그 비슷한 말이었어...."

269p.
...대니는 자기 손을 아주 잘 알았다. 살면서 힘들고 안 좋은 순간이 올 때마다 대니는 책을 보는 것처럼 자기 손을 꼼꼼히 관찰했다. 손은 과거로 가는 표였다. 구타, 임종, 장례식, 실패. 놀이터에서 당한 모욕과 법정에서의 선고, 도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지금보다 더 현실 같은 기억들.

293p.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리엇은 공기가 없는 곳으로 더욱 깊이 가라앉았고, 폐가 고통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해리엇은 길 없는 사막 높이 뜬 작고 하얀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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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p.
...따라서 여동생들은 죽은 오빠와 아주 가까웠다. 자신들의 성격과 주변 사람들의 성격은 애매하고 늘 바뀌는 반면, 오빠 로빈의 성격은 강하고 밝고 변함없이 늘 똑같이 반짝거렸다. 여동생들은 그러한 차이가 로빈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로빈의 드물고 천사같이 빛나는 성격 때문에 생겼다고 믿으며 자랐다.

55p.
..해리엇에게 이 네덜란드 타일 다섯 개는 잃어버린 문명의 유물이었고 비스킷을 물고 죽은 개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타일의 수채화처럼 섬세한 푸른빛은 부를 나타내는 청색, 추억과 유럽과 천국의 청색이었다. 해리엇이 이 타일을 보면서 상상해낸 트리뷸레이션은 꿈결 같은 광채와 인광으로 반짝였다.

152p.
...힐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리엇이 절대 같이 해주지 않아서 슬펐다. 힐리는 키 큰 풀들 사이로 난 그 좁은 길을 해리엇과 함께, 어른들처럼 손을 잡고 담배를 피우면서, 맨다리를 다 베이고 진흙에 더럽히면서 걷고 싶었다. 가랑비가 내리고 갈대밭 가장자리에서 희고 미세한 거품이 올라오는 그곳에서.

189p.
...녹슨 양철 지붕에 난 구멍을 관통해 어둠 속에서 서로 교차하는 길쭉한 칼 같은 빛줄기들은 자욱한 티끌 먼지 때문에 빛이 아니라 고체 같아서, 손으로 쓸면 노란 가루가 묻어날 것만 같았다....

197p.
...해리엇은 아이가 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책에서든 실제 삶에서든) ‘성장‘에는 급속하고 불가해한 쇠퇴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웬 지루한 연인 때문에 난데없이 모험을 포기하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대부분 소 떼처럼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280p.
..라샤론이 깡마른 골반에 매달린 아기를 끌어 올리고 오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오덤의 포옹에서 소유욕이 느껴지고 포옹을 받는 라샤론의 태도가 공허했기 때문에—주인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불쌍하고 늙은 개 같았다—힐리는 역겨우면서도 약간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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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그는 방 두 개를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로 꾸며놓았는데, 다른 기본 항목들을 절약하고 취한 선택임이 틀림없었다. 특히 그가 신중하게 고른 것은 두껍고 푹신한 팔걸이 의자와 커튼, 양탄자였다. 그는 이런 가구들로 실내를 장식한 이유를 "권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현대적인 스타일로 꾸민 방에서는 권태가 불편함, 육체적 고통이 돼버린다면서.

11~12p.
...내 생각에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은 존재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인류는 일종의 생물학적 개념이라서, 인간이라는 동물종 이상이 될 수 없고, 다른 동물종과 마찬가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자유‘와 ‘평등‘의 의식儀式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숭배는, 동물이 신처럼 숭배되고 신이 동물의 머리를 지녔던 고대 숭배 신앙의 재현 같았다.

12p.
..그리하여 신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르고 동물의 집합체를 믿을 수도 없었던 나는, 주변부에 속한 인간들이 그렇듯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거리를 데카당스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데카당스란 무의식의 완전한 상실이고, 무의식이야말로 삶의 기반이다. 만일 심장이 의식을 갖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진작 멈췄을 것이다.

14p.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건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 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19p.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동냥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 주머니 단추를 풀기 귀찮아서 그러듯이. 결국 내가 원한 것들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26p.
..누군가의 고백이 가치 있거나 쓸모가 있을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모두에게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혀 새로울 게 없고, 오직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 내가 느낀 것을 글로 쓰는 이유는 느낌의 열기를 가라앉힐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고백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28p.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우리가 받는 인상이고, 우리의 전부는 남들이 받는 인상, 즉 우리의 멜로드라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배우인 동시에 관객이고, 시청의 승인을 받은 우리 자신의 신이다.

35p.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까지, 가짜로라도 스핑크스가 되어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사실 가짜 스핑크스에 불과하며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 동의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부조리야말로 신성한 것이다.

36~37p.
..어떤 이들은 세상을 지배하고, 어떤 이들은 그 세상이다. 어느 미국인 백만장자, 카이사르 또는 나폴레옹이나 레닌, 작은 마을의 사회주의 지도자 사이에는 질적 차이는 없고 양적 차이만 있다. 그들 아래에는 우리같이 눈에 띄지 않는 이들, 즉 경솔한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학교 선생 존 밀턴과 방랑자 단테 알리기에리, 어제 나에게 우편물을 가져다준 배달원이나 잡담을 들려준 이발사, 바로 오늘 포도주 반병을 남긴 나를 보고 쾌차를 빌어주는 동지애를 발휘한 식당 종업원이 있다.

40p.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뒤에 오는 이들에게 우리라는 존재의 모든 것은, 우리가 강렬하게 상상할 것들, 즉 상상을 구체화하여 현실로 이루어낼 것들이다. 역사는 빛바랜 파노라마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해석들의 흐름과 믿을 수 없는 증인들의 혼란스러운 합의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소설가이고 우리가 본 것을 말하는데, 보는 것은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복잡한 일이다.

41p.
..그날은 모호한 휴일, 법적 휴일이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그런 휴일이었다. 노동과 휴식이 섞인 날,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일찍 일어났지만 존재할 준비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방안에서 왔다갔다하는 동안 아무 연관 없고 가망 없는 꿈들을 떠올렸다. 잊어버린 행동들,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불가능했던 야망들, 만약 이루어졌다면 확고하고 지속적이었을 대화 같은 것들이었다....

46p.
..나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침묵을 흘려보낸다. 아무 형태 없는 세상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48p.
..우리 모두는 외부 환경의 노예다. 태양이 환한 날은 좁은 골목길의 카페에 앉아서도 넓은 들판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하늘이 흐린 날은 야외에 있어도 문 없는 집 같은 우리 자신 속으로 몸을 웅크린다. 아직 낮의 사물들 안에 있을지라도, 밤의 왕림은 이제 쉬어야 한다는 내밀한 의식을 천천히 펴지는 부챗살처럼 펼친다.

50p.
..……인류를 위해 일하거나,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문명이 지속되도록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뿌리깊고 진저리나는 경멸을 느낀다……
..……그 경멸은 지루함으로 가득찬 감정이다. 그들은 각자에게 유일한 현실은 자신의 영혼뿐이고, 현실 세계와 타인 따위는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정신이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끔찍한 악몽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53p.
..모든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 중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여겨지므로 날마다 열망하는 것이고, 슬픈 순간마다 체념하는 것이다.

54p.
...나는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동작에 불과했다.

55p.
...위대한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그들 역시 ‘현실‘이라는 ‘악마‘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받았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우리네 삶이다. 자신에 대한 오해가 우리의 생각이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처럼 한순간 빛이 켜지면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은 내밀한 모나드의 개념을, 영혼이 말하는 마법의 언어를 슬쩍 엿보는 일이다. 하지만 그 갑작스러운 빛은 모든 것을 태우고,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심지어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발가벗겨버린다.

59p.
..언제나 똑같고 변화 없는 내 삶을 지속하는 무기력, 결코 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덮고 있는 표면에 붙은 먼지나 티끌처럼 남아 있는 이 무기력을 나는 일종의 위생관념의 결여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아줘야 한다. 먹고 자는 일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리해야 하고, 그것을 우리는 위생이라고 부른다.

63p.
...즐거움도 슬픔도 없이 명료한 이해만 갖고 빛나는 태양과 머나먼 별들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67p.
..고립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나를 만들었다....

73~74p.
..인간이기에 필요한 것을 원하고, 인간이기에 필요하지는 않아도 원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똑같이 갈망한다면,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마치 일용할 양식이 없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한다면 그건 병이다. 하늘의 달을 따서 손에 넣을 방법이 있기라도 한 듯 달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낭만주의의 병폐다.

77p.
..나는 패배에 대한 나의 자각을 승리의 깃발인 양 들고 간다.

78p.
..퇴위하는 왕처럼 나는 읽는다. 왕관과 망토는 떠나는 왕이 땅에 내려놓는 순간에 가장 존엄해지는 법이니, 나의 모든 권태와 몽상의 트로피를 모자이크 타일 바닥에 내려놓고, 본다는 행위의 고귀함만을 들고 계단을 오른다.

86p.
..고상한 꿈을 꾸는 가엾은 동료들을 내가 얼마나 질투하면서도 경멸하는지! 그보다는 꿈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자기 자신밖에 없고, 꿈에 대해 쓴다면 시가 되겠지만 자신 외에는 쓴 시를 보여줄 사람도 없는 더욱 불쌍한 자들이 나와 가깝다. 그들은 보여줄 책이 없고 자신의 영혼만이 유일한 문학인 이들, 살아갈 능력을 검증하는 비밀스러운 선험적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결국 질식해 죽어가는 이들이다.

88p.
..단지 즐기고 있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이들을 증오하고, 우리가 그들처럼 행복해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행복한 이들을 경멸하는 걸 잊지 말자. 그런 가짜 경멸과 허약한 증오야말로 거칠고 흙이 묻어 더럽기는 해도, 우리 ‘권태‘의 오만하고 유일한 조각상, 야릇한 미소가 비밀스럽고 모호한 인상을 자아내는 어두운 조각상을 세울 수 있는 주춧돌인 것이다.
..자신의 삶을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이는 축복받은 자다.

88p.
..나는 진부한 인간성을 보면 생리적인 구토감을 느끼는데 사실 모든 인간성은 다 진부하다. 어떨 때는 토할 것 같은 느낌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부러 토하는 경우처럼 의도적으로 메스꺼운 정도를 높이기도 한다.

89p.
.."그 자식은 얼마나 취했는지 계단도 못 보더라고." 나는 고개를 든다. 이 청년은 적어도 상황을 묘사한다. 이들이 묘사하려 할 때는 그나마 참아줄 만한데, 묘사하는 동안 그들은 스스로를 잊기 때문이다....

93p.
..그것이 인생이고, 흔히 문명이라고 알려진 특정한 삶의 방식이 다 그러하다. 문명이란 어떤 대상에게 실제로는 상관도 없는 이름을 부여하고 나서 어떤 결과를 꿈꾸는 것이다. 가짜 이름과 진짜 꿈이 만나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 대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공업자처럼 현실을 조립한다. 원재료는 동일하지만 우리의 예술은 대상에게 전혀 다른 형식을 부여한다. 소나무로 만든 탁자는 소나무이지만 탁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탁자에 앉는 것이지 소나무에 앉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성적 본능이지만 우리는 성적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추측하는 다른 어떤 감정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이 추측으로 인해 실제로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

96p.
..모든 환상과 환상에 속한 모든 것—환상을 잃어버림, 환상을 갖는 일의 부질없음, 결국은 잃어버리기 위해 환상을 가져야 하기에 미리 느끼는 피곤함, 환상을 가졌던 것에 대한 후회, 그렇게 끝날 걸 알면서도 환상을 가졌던 자신의 지성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한 피로.
..삶의 무의식에 대한 자각은 지성에 부여된 가장 오래된 세금이다. 영혼의 섬광, 이해의 흐름, 불가사의와 철학 등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지성이다. 이들은 신체의 반사작용과 비슷해서 간과 신장이 분비물을 내듯 저절로 반응한다.

98p
..내가 느낀 감정은 누군가의 잠든 모습을 볼 때와 똑같았다. 잠든 사람은 누구라도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자는 동안에는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삶을 의식할 수 없기에, 최악의 범죄자나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도 잠이 들었을 때만은 자연의 마법에 의해 성자가 된다. 내 생각에 잠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과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은 죄질의 차이가 없다.

100~101p.
...나는 그들을 싫어하기에 좋아한다. 그들을 느끼는 게 괴롭기 때문에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좋다. 그림으로 감상하기에 훌륭한 풍경은 대체로 편안한 잠자리가 되지 못한다.

101p.
..아미엘은 우리가 보는 풍경은 우리 영혼의 상태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문장은 나약한 몽상가의 부서지기 쉬운 행복일 뿐이다. 풍경은 풍경이 되는 순간 더이상 영혼의 상태가 될 수 없다. 객관화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시는 시를 쓰려고 생각했던 상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일종의 꿈꾸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꿈꾼다고 말하는 대신에 본다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둘을 구분하기 때문이다.

102p.
...나를 보호해주는 모든 신들이시여, 지금과 같은 내 모습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외부 세계의 현실에 대한 이 선명하고 환한 시선이, 나의 무가치함에 대한 본능적인 자각이, 보잘것없는 존재로서의 편안함이, 그리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상상할 수 있는 위안이 나와 함께하도록 지켜주소서.

103p.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높이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근육에 담고 있지만, 의식으로는 산을 오르기를 거부하는 자다. 그는 자신의 시선 덕분에 모든 산을 소유하고, 자신의 위치 덕분에 모든 계곡을 가진 자다. 정상을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태양은 정상에서 아주 밝은 빛을 견뎌야 하는 이보다 골짜기에 있는 이에게 더욱 금빛으로 빛난다....

112p.
..내가 몹시도 혐오하는 삶이지만, 삶의 사소한 행동들조차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도 노력인데, 내게는 노력하는 인간의 영혼이 없다.

113p.
..내 인생으로 나를 두들겨패는 것이 내 인생인 것 같다.

116p.
...본다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다. 분석한다는 것은 외부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스치지도 않고 지나간다. 내 주위에는 공기뿐이다. 나는 어찌나 철저히 혼자인지 나와 내 옷 사이의 거리마저 느낄 수 있다....

117p.
..우리 앞에 행동거지가 남자 같은 아가씨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 아가씨는 꼭 남자 같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곧 표현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좀더 강한 다른 평범한 사람은 "저 아가씨는 남자네"라고 말할 것이다. 또 표현의 의무를 의식하고 있지만 생각의 관능적 쾌락인 간결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저 총각‘이라고 말할 것이다. 나라면 ‘저 총각‘이라는 표현을 쓰되 ‘저‘를 여성형 관형사로 써서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수와 성性을 통일하는 문법 규칙을 파괴할 것이다. 나는 바르게 말할 것이다. 무미건조함과 규칙과 일상을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해, 사진을 찍듯 절대적으로 말할것이다. 나는 말하지 않고 표현할 것이다.

119p.
..스스로를 비판하는 기질을 타고난 탓에 내 단점과 부족한 점만을 보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몇 개의 글귀, 짧은 구절, 인용구밖에 쓰지 못하는 나는, 내가 쓴 얼마 안 되는 글로 인해 역시 불완전하다. 만일 완결된 작품이라면 혹여 질이 떨어지더라도 어쨌든 하나의 작품이므로 훨씬 나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아예 글을 쓰지 않는 영혼의 온전한 침묵이 더 나을 테고.

119p.
..아마도 인생의 모든 것은 뭔가가 퇴보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존재란 언제나 근사치—전날 밤이나 주변부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123~124p.
..아무 소용없다고 여기는 행동을 고수하기, 아무 효과 없다고 여기는 규율을 지키기, 그리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철학적, 형이상학적인 사고방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그것이 바로 우월한 인간이 지닌 유일하게 가치 있는 태도다.

124p.
...관조적인 삶이란 게 실제로 가능하려면 실생활의 객관적인 사건들을,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의 산발적인 전제들로 여겨야 한다....

125p.
...그런 밤이면 잠도 오지 않고, 달도 별도 뜨지 않고,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 것 같다. 무한은 내면화되어 터질 지경이고, 낮은 낯선 양복의 검은 안감이 되고 만다.

127p.
...더 훌륭하고 행복한 이들은 모든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누군가 그들을 위해 쓰기 전에 자신의 소설을 먼저 쓴다. 마키아벨리처럼 궁중 예복을 갖춰 입고서 아무도 모르게.

127p.
..몽상가 외에는 다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다. 삶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 귀기울인 적도 없었다. 내가 있는 곳에 없는 것과 내가 결코 될수 없는 것에 늘 속해 있었다. 내 것이 아니기만 하면 아무리 하찮은 것에도 나를 매혹시키는 시詩가 있었다. 아무것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136p.
..정말 현명한 사람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사실들보다는 자기에게 가까운 현실이라는 갑옷을 걸친다. 그리고 사실들이 갑옷을 통과할 때 자신의 현실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에게 이르게 한다.

139p.
..산다는 것은 물질의 형이상학적 실수 같고, 무기력이 저지르는 실수 같다. 나는 하루가 어떤 날인지, 나의 관심을 돌릴 만한 무엇이 그 안에 있는지 보려 들지 않는다. 여기 내가 쓰는 글 속에 기록됨으로써, 나 자신도 나를 원하지 않는 이 공허함의 찻잔을 채울 수 있는 무엇이 있는지 보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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