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가 내게 발견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살아낸 이제까지의 삶의 흔적들을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이다. 표정에는 층이 있지만, 흔적들은 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 P-1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내 물음은 이렇게 생긴 사람과 저렇게 생긴 사람, 또 여기 있는 사람과 저기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내 아버지냐는 뜻이 아니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아니었다. 나는 진정으로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다. 열대 지방의 아이들이 얼음의 존재를 모르듯이, 네안데르탈인이 컴퓨터의 존재를 알 까닭이 없듯이, 그렇게 나는 아버지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 P-1

...아버지가 일찍이 자신의 존재를 내게서 거두어갔던 것처럼, 이제 어머니도 내게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삶은 오리무중이었고,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신비롭거나 감격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P-1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 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 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하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렸다. 그는 맥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 P-1

..현실이 평범하지 않으면, 의식도 평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지 않은 현실을 의식의 겉면에 그대로 노출해 보이는 평범함을 극도로 증오했다. - P-1

..그는 거의 항상 가난했다. 어머니가 주고 간 돈은 언제나 턱없이 모자랐다. 그는 그 때문에도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예나 지금이나 움직이면 돈이 든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그래서 거의 대부분 비지 않는다.... - P-1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참혹한 가난과 외로움을 극복해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비난하는 대신(비난하는 것은 참여한다는 뜻이다) 혐오하거나 기피했다. 말하자면 초월하려고 했다. - P-1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이라는 것을 나는 갖지 못했다. 그런 기반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어느 것도 허공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요컨대 낭만주의자는 낭만주의라는 일정한 묘상苗床에서 키워져 모종된 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묘상의 모종은 적어도 두 가지의 기관을 몸에 품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취하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을 수용하는 기능이다. 내가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의 부재를 말하는 것은 그 두 가지의 감각을 몸에 익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

...모든 과거는 기억된 과거일 뿐이며, 모든 기억은 검열된, 또는 취사선택된 기억일 뿐이다. 시간은 독하고, 나의 자아는 너무 많은 층으로 둘러싸인 거대한―작은 우주다. 층마다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은 그 층에서만 진실이다. 그 모든 층을 관통하는 작살과 같은 하나의 진실은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깊거나 가장 높은 층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깊은 층이나 가장 높은 층에 그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그곳까지 이르러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 P-1

...생각이 많은 것은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욕망이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생각은 생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핍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과의 불화는 더욱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또 더 복잡한 생각의 밑천이 된다. 끝도 없는 악순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되었다고 느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 - P-1

..그날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늘은 시종 가느다란 비를 뿌리고 있었다. 국어 담당 선생은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보다는 가는 비를 는개라고 분류했다. 그 분류에 따르자면 아마 는개비였을 것이다.... - P-1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책의 저자가 조이스라고 할 때,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서 내가 발언한다는 뜻이다.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실은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 해버린 것이다. - P-1

...이름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정의이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편의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가장 허술한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P-1

..—하지만 모든 인식은 파편이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참된 파편이냐 아니냐이지. 그리고 모든 참된 파편들은 참된 인식인 거야. 파편을 쥐지 않고는 실체에 다가갈 수 없어. 내가 꼭 쥐고 있는 나의 파편이 소중한 거야. - P-1

..어머니가 다녀갔다. 돼지고기볶음과 한 달 치 돈봉투가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그것들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돼지고기가 놓인 상 앞에서 울었다. 밥이, 밥을 먹어야 하는 인간이, 밥을 먹기 위해 비순수로 무장해야 하는 현실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삶은 얼마나 쓸쓸한가. 얼마나 참혹하게 슬픈가. 그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감상들이 ‘문학적’으로 솟구쳤다.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 P-1

..인연의 그물에 갇혀 사는 사람을 미개인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의 사는 방식은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부자유하고 몰가치적이며 무원칙하다. 에고와 에고의 연장에 불과한 가족이 미개인의 세계이다. 문명인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우선 인연으로부터의 자유여야 한다. - P-1

..그의 게걸스러운 책 읽기의 습관은 세상에 대해 수줍음과 적의를 동시에 키워가던 유년 시절에 형성된 것이었다. 기름진 풀밭을 발견한 양들은 한곳에 붙어서서 께적거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쪽에서 한입, 저쪽에서 한입, 하는 식으로 풀밭을 뛰어다니기부터 한다. 그 모습은 거기 있는 모든 풀들을 조금씩이라도 맛보고 말겠다 작정하고 설치는 것과 같다. 그 이치이다.... - P-1

...눈앞에 산이 있으면 그 뒤에 있는 산들은 보이지 않는다. 낮은 산도 높은 산을 가릴 수 있다. 산의 높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눈과의 거리가 미치는 영향만큼은 아니다. 높이에 우선하는 것은 거리이다. 그에게는 하나의 산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뒤에 있는 산들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 P-1

...종교에 몰두한 자는 전부를 본다. 전부를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는 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해부하는 자는 부분을 본다. 부분을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 눈이 가면 끝내 전부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봉자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해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 P-1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가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리게 되는. 그리하여 도무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상식 밖에서는 상식에게 호소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 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절망이다. - P-1

..니그렌이라는 스웨덴의 루터교회 감독은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희귀하고 소중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앞부분에서 그는 사랑을 아가페와 에로스로 분류하고, 그것의 차이를 선명하게 도식화하였다.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래서 그 대상 속에 가치를 창조한다." - P-1

..내 속으로 드디어 분명하고 되돌릴 수 없는 특별한 성찰이 찾아왔다. 결국은 이곳에서도 나는 적이고 이방인이다. 가능한 유일한 대극은 형식과 개혁, 또는 신과 인간이 아니라, 지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이다. 그대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이다. 형식과 개혁, 신과 인간의 문제는 지상에 있는 그대들의 과제일 뿐이다. 지상의 세계에는 그런 갈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갈등들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하나의 세계에 속해 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대들의 세계에 끼어들고자 했다.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참으로 가당찮은 욕망이었음을 이제 나는 깨닫는다. - P-1

...그는 어둠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자신의 몸이 어둠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그 신비스러운 합일의 경지가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상태였다. 그에게는 그런 신비를 체험한 경험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둠 속에 오랫동안 몸과 의식을 잠근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보면 사물들이 나름대로의 형상을 빚어 스스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런 뜻에서 어둠도 빛이다.... - P-1

..이제 그는 아버지의 엄연한 존재를 시인했고, 그리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쓰고자 했다.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 아버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고통당하기 시작한다.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런 것처럼. - P-1

(해설)
..그러면 이제부터 그 ‘밑그림’의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살펴본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유년기에 겪어내는 중요한 삶의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험", 즉 소설 이전의 밑그림을 ‘가족 소설Roman familial’이라고 명명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는 과정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맺는 삼각관계 속에서 전형적 위기를 만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상력에 호소하여 어떤 "초보적 이야기"를 지어낸다. 마르트 로베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근원적 이야기가 곧 소설의 기원이라고 본다. 여러 예술 장르들 가운데서 ‘소설’은 "단번에 이야기로 만들어진 환상", 즉 "미래의 이야기들의 무궁무진한 저장고"인 동시에 소설이 기꺼이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규약인 이 ‘이야기의 밑그림’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5p.
...언뜻 한 인간에게 상황에 따라 다른 준거가 있는 듯 보이겠지만, 그 틀을 지탱하는 바탕엔 그의 견고한 기준이 있다. 차별을 불편해하는 언니의 살아 있는 감각이다. 상대를 이루는 ‘존재의 성질‘을 어디에 하나로 묶지 않으려는 자세. 상대를 고유함 그 자체로 새로이 받아들이는 느린 마음이다.
..역사란 모든 개인이 살아온 시간의 합이다. 오늘을 사는 나와 당신이 그 역사의 뉘앙스를 이루고 있겠지. 고유하게. - P-1

51p.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을 때 사람은 쉬이 우울감에 빠진다. 특히 자기 생각과 감정, 상태를 현지어로 설명하기 힘든 경우엔 더 그렇다. 입을 열 때마다 상대가 미간을 좁히며 집중해야 소통이 가능하면, 폐 끼치기 싫은 마음과 함께 초라해진 마음이 찾아온다. 집 현관은 심호흡하고 건너가야 하는 일상의 국경이다.... - P-1

72p.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든 중요한 사람의 이름은 제대로 불리는 것을 경험한다.... - P-1

101p.
..결혼과 이민은 매우 닮았다. 다만 이 닮은꼴을 충족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가부장제에서 비켜난 결혼이거나 부부만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없어야 한다. 둘 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한다. 남의 편에 둘러싸인 관계 속에서 투항을 요구받는데 그동안 살아온 20~30년 경험은 애초에 잊자고 회유한다. 이민은 출신 국가의 경제력이 친정 부모의 능력처럼 작동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하러 오면 "돈 벌러 왔다"라는 소리를 듣고, 부자 나라에서 오면 글로벌 가족이라고 불린다. ‘다문화 가정‘은 ‘무시‘를 허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둘 다 지위 하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결승점이 아닌 출발점이다. - P-1

110p.
...‘그‘가 장벽을 넘었다. 장벽과 그에 압도당하는 동요를 구별하는 차원에 이른 것이다. 장벽에 사로잡힐 때, 이는 짜증으로 부풀어 오른다. 하지만 실상은 일상의 과속방지턱일 수 있다. 우리가 관계 맺는 사람마다 장벽 하나쯤은 안기는 것이 인생이니까. 그걸 넘는 주체는 오직 우리다.... - P-1

126p.
...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적어도 청소년기를 보낸 30대와 40대로 이들에게는 아시아 사람이라는 개념이 없다. 아시아인 개념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경찰이고 교사이며 이웃인 곳에서, 즉 한국을 제1국으로 삼는 사람이 지역을 아시아와 지구로 확장할 때 갖는 동류의식 같다. 이렇게 보니 ‘한국 사회에서 황인종인 한국인이 왜 백인을 우대하고 동일시할까?‘ 했던 의문이 조금은 풀렸다. 나이지리아 흑인도 백인과 동일시한다. 1등 시민이 1등 지구인(백인 우월주의 사고일지라도)과 동일시하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 P-1

137p.
...삶에서 나온 그들의 당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입양과 친부모에 관해 자연스레 거론해서 아이가 생부모를 찾고 싶을 때 부모를 배신하는 것 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활 반경 안에 ‘생물학적 거울‘을 꼭 갖도록 조성하는 일이었다. 아이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이 곁에 있는 것 말이다.... - P-1

140p.
.."우리 지금 미국 집에 왔어."
..아이는 곧바로 오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아이가 사랑이 충만한 외할머니 품에서 마음에 묶여 있던 감정 매듭을 많이 푼 것 같아 감사했다. 에바도 지금 가장 안전한 곳에서 스스로 온갖 매듭을 푸는 것이 아닐까? 여느 아이가 겪는 성장통과 어쩔 수 없이 묶인 여러 고비 그리고 사회가 묶어놓은 불편한 시선의 자취들까지…. 나는 벨이 35개월 된 에바를 낳았다고 믿는다. - P-1

185p.
..한편에서 "내국인에게 돌아갈 자리도 부족하다. 외국인 이주민에게까지 혜택을 넓힐 수는 없다"라고 주장한다면, 부족한 파이를 키우도록 정책을 이끌어야 할 것이다. 경제 규모가 커진 만큼 복지의 파이도 커져야 마땅하지만, 시장의 셈은 정비례를 모르고 권력은 반비례 정치로 몸을 사리며 표심 따라 부유한다. 오히려 국가 공동체를 갈등으로 분리 통치하는 시도가 병법처럼 통치술로 자리한 지 오래다. 그리하여 재난이 닥쳤을 때 호명되는 이름의 다수는 여전히 서민이다.... - P-1

217p.
..취약함을 보살피는 일상의 태도가 쌓이고 쌓여 정성을 기울인 사람까지 살리는 일이 일어날 때, 서구 전통에서는 이를 ‘은총‘이라 부르고 극동 문화에서는 ‘복 받았다‘라고 부른다.... - P-1

258p.
.."참 곱다. 예전에는 그렇게 다녀도 여름이라 초록이려니 했는데 지금은 마음에 콕 박히네. 아주 아름답다."
..먹먹해졌다. 삼킨 말이 있을 것 같았다. 혹, ‘또 볼 수 있을까?‘란 말은 아닐지. 인간 수명을 거의 누렸다는 생각에 이제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온 마음을 채운다는 말이지 싶었다. 어머니의 마음이 자리한 지점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를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사형 선고뿐이야. 그것만이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이거든. 마틸드는 이런 생각을 했다. - P-1

..좋은 가문은 많은 자질을 가져다주지. 그런 자질이 없으면 기분이 거슬릴 거야. 예를 들어 쥘리앵 같은 사람이 그렇지. 그러나 좋은 가문이란 사형 선고를 불러올 만한 영혼의 특성을 퇴색하게 한단 말이야. 마틸드는 이런 생각을 했다. - P-1

.."딱한 일입니다!" 쥘리앵이 말했다. "죄를 저지르더라도 즐겁게 저질러야죠. 그것만이 범죄의 미점(美點)이니까요. 또한 그런 이유로만 범죄를 약간 정당화할 수도 있겠죠." - P-1

...쥘리앵은 이 오만한 아가씨에게 단 한 번이라도 무방비 상태로 모욕을 당하는 날에는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차피 사이가 벌어질 것이라면, 내가 개인적 위엄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곧장 뒤따라올 모욕의 표시에 반발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내 자존심의 정당한 권리를 방어하면서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P-1

...귀족 계급의 살롱이란, 거기서 나온 후에 자랑하기에는 적당한 곳이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예절 그 자체가 대단해 보이는 것도 처음 며칠뿐이다. 쥘리앵은 실제로 그것을 경험했다. 처음의 매혹이 지나면 놀라움이 찾아온다. 예절이란 것도 거친 태도가 불러일으키는 분노가 없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하고 쥘리앵은 생각했다.... - P-1

..위대한 행동치고 시초에 극단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었던가? 범인(凡人)의 눈에 그런 행동이 가능해 보이는 것은 행동이 완료된 후일 뿐이다. 그렇다, 앞으로는 그런 기적이 따르는 사랑이 내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5~16p. «파노라마섬 기담»
..히로스케는 예술이란 보기에 따라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부여하려는 욕구의 발로인 셈입니다. 가령 음악가는 천연의 바람 소리나 파도소리,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 소리를 창조하려 애씁니다. 화가는 모델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개성에 따라 바꾸고 미화하며, 시인 역시 단순히 사실을 보도하거나 기록하는 사람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이른바 예술가들은 간접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번거로운 수단만으로 만족합니다. 어째서 그들은 대자연에 착안하지 않을까요. 어째서 직접 대자연을 악기로, 물감으로, 문자로 구사하지 않을까요.... - P-1

36p. «파노라마섬 기담»
..그보다 히로스케는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난 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이제 호적에서도 말소되었고, 이 넓은 세상에 일가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없는 한 명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후좌우에 앉은 승객들도, 창밖으로 보이는 길가의 풍경도, 한 그루의 나무도, 한 채의 집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별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갓 태어난 듯 매우 산뜻한 기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이며 이제부터는 외톨박이처럼 홀로 그 감당하기 벅찬 대사업을 완수해야 한다는 형언할 수 없는 고독감에 끝내는 눈물까지 나려 했습니다. - P-1

86p. «파노라마섬 기담»
...잠시 뒤 히로스케가 재촉하는 바람에 지요코가 당나귀에 올라타서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어린 여인 바로 위에 피어 있던 눈에 띄게 커다란 동백꽃 한 송이가 마치 액체가 방울져 떨어지듯이 똑 떨어지더니 어린 여인의 보동보동한 어깻죽지를 타고 미끄러져 늪에 고인 물에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너무 조용해서 늪에 고인 물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파문은 한 줄도 일지 않았습니다.... - P-1

142~143p. «인간 의자»
..의자 안의 사랑(!)이 얼마나 신비롭고 도취적인 매력을 가졌는지 실제로 의자 안에 들어와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촉각과 청각, 그리고 약간의 후각만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암흑 세계의 사랑입니다. 결코 이 세상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나라의 애욕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정말 상상조차 못하겠습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