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의식 안쪽에 단단하게 붙어 그의 삶과 문학을 지배해온 질기고 억센 몇 개의 큰 흉터가 내게 발견되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자신이 살아낸 이제까지의 삶의 흔적들을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이다. 표정에는 층이 있지만, 흔적들은 질서를 알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몸을 섞고 있다. - P-1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내 물음은 이렇게 생긴 사람과 저렇게 생긴 사람, 또 여기 있는 사람과 저기 있는 사람 가운데 누가 내 아버지냐는 뜻이 아니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아니었다. 나는 진정으로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를 몰랐다. 열대 지방의 아이들이 얼음의 존재를 모르듯이, 네안데르탈인이 컴퓨터의 존재를 알 까닭이 없듯이, 그렇게 나는 아버지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 P-1

...아버지가 일찍이 자신의 존재를 내게서 거두어갔던 것처럼, 이제 어머니도 내게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삶은 오리무중이었고, 모든 것이 심드렁했다.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신비롭거나 감격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 P-1

...그 야릇한 눈길들 속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적어도 그 순간, 거기 모인 사람들에 의해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구별되고 있다는 인식이 그것이었다. 그는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와 달랐다. 적어도 그들의 표정은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너는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네가 아니다…… 살아가면서 그가 종종 경험하곤 했던, 세계로부터 이탈되어 나가는 듯한 걷잡을 길 없는 소외감이 그때 처음으로 그를 찾아왔다.
..그는 온몸을 빠르게 관통하는 전율에 사로잡혀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계를 상대로 맞서 있는 한 왜소한 개체의 외로움이 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타고 몸속의 기가 모조리, 순식간에 빠져나가버렸다. 그는 맥없이 자리에 쓰러졌다.... - P-1

..현실이 평범하지 않으면, 의식도 평범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평범하지 않은 현실을 의식의 겉면에 그대로 노출해 보이는 평범함을 극도로 증오했다. - P-1

..그는 거의 항상 가난했다. 어머니가 주고 간 돈은 언제나 턱없이 모자랐다. 그는 그 때문에도 밖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예나 지금이나 움직이면 돈이 든다. 가난한 사람의 집은 그래서 거의 대부분 비지 않는다.... - P-1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참혹한 가난과 외로움을 극복해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비난하는 대신(비난하는 것은 참여한다는 뜻이다) 혐오하거나 기피했다. 말하자면 초월하려고 했다. - P-1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이라는 것을 나는 갖지 못했다. 그런 기반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어느 것도 허공에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요컨대 낭만주의자는 낭만주의라는 일정한 묘상苗床에서 키워져 모종된 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묘상의 모종은 적어도 두 가지의 기관을 몸에 품고 있어야 한다. 하나는 아름다움을 취하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움을 수용하는 기능이다. 내가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반의 부재를 말하는 것은 그 두 가지의 감각을 몸에 익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

...모든 과거는 기억된 과거일 뿐이며, 모든 기억은 검열된, 또는 취사선택된 기억일 뿐이다. 시간은 독하고, 나의 자아는 너무 많은 층으로 둘러싸인 거대한―작은 우주다. 층마다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은 그 층에서만 진실이다. 그 모든 층을 관통하는 작살과 같은 하나의 진실은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가장 깊거나 가장 높은 층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진실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깊은 층이나 가장 높은 층에 그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그곳까지 이르러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곳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 P-1

...생각이 많은 것은 무언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려는 욕망이 많은 생각을 만든다. 하지만 생각은 생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결핍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세상과의 불화는 더욱 증폭된다. 그 증폭된 불화감은 또 더 복잡한 생각의 밑천이 된다. 끝도 없는 악순환. 생각이 많은 사람은 세상을 쉽게 믿지 않고, 세상은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돌림의 대상이 된(되었다고 느끼는) 생각이 많은 사람은, 복수하듯 세상을 따돌릴 채비를 한다. 거기서 다른 사람에 비해 자기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돌출한다. - P-1

..그날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하늘은 시종 가느다란 비를 뿌리고 있었다. 국어 담당 선생은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보다는 가는 비를 는개라고 분류했다. 그 분류에 따르자면 아마 는개비였을 것이다.... - P-1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책의 저자가 조이스라고 할 때,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서 내가 발언한다는 뜻이다.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실은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 해버린 것이다. - P-1

...이름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름은 어떤 사물에 대한 가장 제한적인 정의이다.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편의적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쓰는 것이 인식의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은 가장 허술한 방법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이지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 P-1

..—하지만 모든 인식은 파편이야. 중요한 것은 그것이 참된 파편이냐 아니냐이지. 그리고 모든 참된 파편들은 참된 인식인 거야. 파편을 쥐지 않고는 실체에 다가갈 수 없어. 내가 꼭 쥐고 있는 나의 파편이 소중한 거야. - P-1

..어머니가 다녀갔다. 돼지고기볶음과 한 달 치 돈봉투가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그것들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돼지고기가 놓인 상 앞에서 울었다. 밥이, 밥을 먹어야 하는 인간이, 밥을 먹기 위해 비순수로 무장해야 하는 현실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삶은 얼마나 쓸쓸한가. 얼마나 참혹하게 슬픈가. 그런 식의 어처구니없는 감상들이 ‘문학적’으로 솟구쳤다. 나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 P-1

..인연의 그물에 갇혀 사는 사람을 미개인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의 사는 방식은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부자유하고 몰가치적이며 무원칙하다. 에고와 에고의 연장에 불과한 가족이 미개인의 세계이다. 문명인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우선 인연으로부터의 자유여야 한다. - P-1

..그의 게걸스러운 책 읽기의 습관은 세상에 대해 수줍음과 적의를 동시에 키워가던 유년 시절에 형성된 것이었다. 기름진 풀밭을 발견한 양들은 한곳에 붙어서서 께적거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쪽에서 한입, 저쪽에서 한입, 하는 식으로 풀밭을 뛰어다니기부터 한다. 그 모습은 거기 있는 모든 풀들을 조금씩이라도 맛보고 말겠다 작정하고 설치는 것과 같다. 그 이치이다.... - P-1

...눈앞에 산이 있으면 그 뒤에 있는 산들은 보이지 않는다. 낮은 산도 높은 산을 가릴 수 있다. 산의 높이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눈과의 거리가 미치는 영향만큼은 아니다. 높이에 우선하는 것은 거리이다. 그에게는 하나의 산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뒤에 있는 산들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 P-1

...종교에 몰두한 자는 전부를 본다. 전부를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는 눈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를 해부하는 자는 부분을 본다. 부분을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 눈이 가면 끝내 전부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봉자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해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 P-1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가게 되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리게 되는. 그리하여 도무지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상식 밖에서는 상식에게 호소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 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절망이다. - P-1

..니그렌이라는 스웨덴의 루터교회 감독은 『아가페와 에로스』라는 희귀하고 소중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의 앞부분에서 그는 사랑을 아가페와 에로스로 분류하고, 그것의 차이를 선명하게 도식화하였다.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에로스는 그 대상 속에서 가치를 먼저 인식한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는 먼저 사랑한다. 그래서 그 대상 속에 가치를 창조한다." - P-1

..내 속으로 드디어 분명하고 되돌릴 수 없는 특별한 성찰이 찾아왔다. 결국은 이곳에서도 나는 적이고 이방인이다. 가능한 유일한 대극은 형식과 개혁, 또는 신과 인간이 아니라, 지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이다. 그대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이다. 형식과 개혁, 신과 인간의 문제는 지상에 있는 그대들의 과제일 뿐이다. 지상의 세계에는 그런 갈등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갈등들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하나의 세계에 속해 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대들의 세계에 끼어들고자 했다.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참으로 가당찮은 욕망이었음을 이제 나는 깨닫는다. - P-1

...그는 어둠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자신의 몸이 어둠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그 신비스러운 합일의 경지가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상태였다. 그에게는 그런 신비를 체험한 경험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둠 속에 오랫동안 몸과 의식을 잠근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보면 사물들이 나름대로의 형상을 빚어 스스로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런 뜻에서 어둠도 빛이다.... - P-1

..이제 그는 아버지의 엄연한 존재를 시인했고, 그리하여 아버지로 하여금 그에 대해 책임을 지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신화를 쓰고자 했다.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 아버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고통당하기 시작한다.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런 것처럼. - P-1

(해설)
..그러면 이제부터 그 ‘밑그림’의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살펴본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가 유년기에 겪어내는 중요한 삶의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험", 즉 소설 이전의 밑그림을 ‘가족 소설Roman familial’이라고 명명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는 과정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맺는 삼각관계 속에서 전형적 위기를 만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상력에 호소하여 어떤 "초보적 이야기"를 지어낸다. 마르트 로베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근원적 이야기가 곧 소설의 기원이라고 본다. 여러 예술 장르들 가운데서 ‘소설’은 "단번에 이야기로 만들어진 환상", 즉 "미래의 이야기들의 무궁무진한 저장고"인 동시에 소설이 기꺼이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규약인 이 ‘이야기의 밑그림’을 모방한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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