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0p.
..참 이상한 일이야. 스위트룸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을 때 백작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구나 가족과 헤어지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역에서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를 배웅한다. 사촌을 방문하고 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한다. 결혼을 하고 외국 여행을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가까운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서 그가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고, 머잖아 그로부터 소식을 듣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작별을 고하는 법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물건과 작별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배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친구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극성스럽게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꽤 많은 비용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 물건들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긴다. 표면의 먼지를 떨고 광을 내며, 가까이에서 너무 거칠게 노는 아이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런 물건들에 계속해서 추억이 쌓여 점점 더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 우리는, 이 장식장은 우리가 어렸을 때 안으로 들어가 숨던 장식장이야,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우린 이 은색 촛대들을 탁자 위에 나란히 놓아두었지, 이게 바로 그녀가 한때 눈물을 닦던 그 손수건이야, 같은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정성껏 간수해온 이런 물건들이 친구나 동반자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물건은 물건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의 가위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남아 있는 가문의 가보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나서 그것들을 자신의 아픈 마음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31p.
..왜 그는 그런 특별한 여행을 갈망했을까?
..증기선과 열차의 침대가 아주 작았기 때문이다!
..탁자가 흔적도 없이 접혀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던가. 침대 바닥으로 변하는 서랍과 딱 책 한 페이지를 비출 정도로만 빛을 내는, 벽에 고정된 전등을 보는 것은 얼마나 놀랍던가. 이같은 디자인의 효율성은 어린 그의 마음에는 음악이었다. 그것은 목적의 정확성과 모험의 가능성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곳이 바로 ‘해저 2만 리‘를 여행할 때 니모 선장이 사용한 숙소였을 테니까 말이다. 진취적인 기상이 조금이라도 있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노틸러스호에서 보내는 하룻밤과 궁전에서 보내는 100일 밤을 기꺼이 맞바꾸지 않겠는가?

65p.
..그래, 백작은 생각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거야.
..사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 은하수도 돈다. 더 큰 바퀴 속의 작은 바퀴인 셈이다. 천체는 돌면서 시계의 작은 망치가 내는 종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 천체의 종소리가 울리면 아마 거울은 불현듯 자신의 보다 더 진정한 목적에 맞게 일할 것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93~94p.
..그것은 기선을 타고 항해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승객은 배의 우현 앞쪽에서 클레이 사격을 즐긴 다음, 저녁 식사를 위해 옷을 차려입고, 선장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바카라 게임에서 잘난 체하는 프랑스 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새로 사귄 지인의 팔에 이끌려 별빛이 쏟아지는 갑판 위를 산책한다. 그는 내내 바다 여행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고 자찬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실은 그는 선상 생활의 극히 ‘일부‘만을 경험했을 뿐이다. 생명력이 충만한, 그 항해를 가능케 해주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말이다.
..니나는 상갑판에서 바라본 전망에 만족하지 않았다. 밑으로 내려갔다. 뒤로도 갔다. 여기에 가고 저기에 갔다. 니나가 호텔에 있는 동안 벽은 안으로 좁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역과 복잡성이 모두 확대되면서 밖으로 팽창했다. 니나가 이곳에 온 지 첫 주가 지났을 때 호텔은 두 구역의 삶을 포괄할 정도로 팽창했다. 첫 달이 지났을 때는 모스크바의 절반을 아우를 정도로 팽창했다. 만약 니나가 이 호텔에서 충분히 오래 지낸다면 호텔은 러시아 전체가 될 것이다.

105p.
..작업이 끝났을 때 백작은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놀라울 정도의 행복감을 느꼈다. 백작의 침실과 즉흥적으로 꾸민 이 서재는 구조가 똑같았지만, 그럼에도 두 방은 백작의 기분에 전혀 다른 영향을 미쳤다. 이 차이는 어느 정도 두 방이 마련된 방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옆방—침대, 농, 책상이 있는 방—은 실제적 필요성의 영역에 남아 있는 반면, 이 서재—책, ‘대사‘, 옐레나의 초상화가 있는 방—는 정신에 더 필수적인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두 방이 차이가 나는 더 큰 요인은 아마도 방이 생겨난 연원 때문일 것이다. 통제와 관리와 타인의 의도 아래 존재하는 방이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인다고 한다면, 비밀리에 존재하는 방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상상하는 만큼 넓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130p.
..어렸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빛‘은 청소년기에는 보통 가벼운 경멸의 대상이고 성인 시절에는 신중한 배려의 대상이기 십상인데, 아무튼 그 빛은 영원히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141~142p.
..사실, 자신의 시대와 심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고유한 문화로 유명한 도시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 도시의 권위를 드높이는 습관, 양식, 사상 등에 전혀 녹아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줄곧 시대의 경향도, 또래들의 열망도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그러한 사람은 로맨스나 직업적 성공의 기회는 잊어버려야 한다. 로맨스나 직업적 성공은 시대에 발맞추어 사는 사람들이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이 그것 대신 택할 수 있는 것은 노새처럼 시끄럽게 울어대거나, 또는 못 보고 지나친 서점에서 발견한 못 보고 넘어간 책에서 가능한 한 많은 위안을 찾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같은 방을 쓰는 친구가 새벽 2시에 비틀거리며 방에 돌아와서, 그 도시의 살롱에서 있었던 최신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리둥절한 상태로 말없이 듣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이것이 살아오는 동안 대부분의 시기에 겪었던 미시카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딱 알맞은 때에 딱 알맞은 장소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태가 전개될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는 너무 생경해 보이던 양식과 태도가 갑자기 깡그리 무시되고,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의 정서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양식과 태도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을 낯선 바다에 표류하던 고독한 뱃사람이 어느 날 밤 잠에서 깨어 하늘을 보니 그곳에 익숙한 별자리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과도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일—이처럼 별들이 특별히 재배치되는 일—이 일어날 때 자신의 시대와 너무 오랫동안 어울리지 못했던 그 사람은 상황이 지극히 명료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갑자기 지나간 모든 것들이 이런 일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과정이었다는 게 뚜렷이 보이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전망이 더없이 명확한 운율과 이유를 띠게 된다.
..하루에 두 번만 울리는 시계가 열두 번을 쳐서 자정을 알렸을 때 미시카조차도 와인을 한 잔 더 마시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대공을 위해서 건배했고, 옐레나와 백작 부인을 위해서 건배했고, 러시아와 티히차스를 위해서 건배했고, 시를 위해서, 서성거리며 걷는 것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인생의 모든 가치 있는 면을 위해서 건배했다.

267p.
..일찍이 18세기에 차르는 적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시베리아로 보내는 형벌을 택했다. 왜?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이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한 것처럼 어떤 사람을 러시아 밖으로 추방하는 것은 형벌로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로 보내면 추방당한 자가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해서 집을 짓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추방당한 자가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국 대신 자기 나라로 추방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국 추방은—시베리아로 보내든 ‘6대도시 금지‘형에 처하든 간에—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부식되어 흐릿해지거나 시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손이 미치는 곳 바로 너머의 것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는 종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훌륭하고 장려한 것들을 자유로이 즐길 수 있는 그 어떤 모스크바 사람보다도 더 애틋하게 그러한 훌륭한 것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게 끝이다.

295p.
..우려라고? 아마 미시카는 평생 카테리나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가 참을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고서 넵스키 대로를 걷는 일은—당국이 넵스키 대로에 그 어떤 이름을 새로 붙인다 하더라도—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 상실감은 우리가 마땅히 예상하고 대비하고 생의 마지막 날까지 소중히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하루살이 같은 사랑을 하루살이 신세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애끓는 슬픔뿐이니까.

308p.
..하지만 예술이란 가장 부자연스러운 국가의 앞잡이다. 그것은 무엇을 하라는 지시에 지치는 것보다 반복되는 일에 훨씬 더 빨리 지치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될 뿐만 아니라 짜증날 정도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직조된 대화가 명명백백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경우에도 약간의 냉소나 눈썹을 치키는 행동 하나만으로 전체 효과를 망쳐버릴 수 있다. 사실,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따라서 관리 당국자들이 별다른 이유가 아닌 건전성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예술 작품들을 수시로 점검하고자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314~315p.
..프리메이슨과 마찬가지로 ‘초라한 자 연맹‘은 긴밀한 형제애를 지닌 조직으로서, 회원들은 겉으로 표시 내지 않고 돌아다니지만 한눈에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초라한 자 연맹 회원들은 우아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몰락했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움, 영향력, 명성, 그리고 남한테 받기보다는 베푸는 특권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쉽사리 감동하지 않는다. 성마르게 누구를 시기하거나 공격하지도 않는다. 혹시라도 자기 이름이 언급되었는지 확인하려고 신문을 샅샅이 훑는 법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동료들 사이에서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들이 나누는 인사에는 경계심이 깃든 찬사, 연민이 담긴 야심, 그리고 속으로는 웃는 겸양이 배어 있다.

356p.
.."아, 그런데 칼 네 개도 가능할까요?" 백작이 약을 올렸다.
..안드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칼이 든 서랍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서랍 안으로 손을 뻗기 전에 에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리의 마술사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소년 같은 표정의 에밀은 군중 틈에서 수줍게 빠져 나와 자신의 식칼을 내밀었다. 15년 가까이 다른 누구의 손이 닿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칼이었다. 안드레이는 의식을 치르는 듯한 마음가짐으로 허리를 굽혀 식칼을 받아 들었다. 그가 네 개의 칼을 돌리기 시작하자 에밀은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칼이 공간 속을 가볍게 미끄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 이 순간, 이 시간, 이 우주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509p.
.."아마도 그건 천상의 균형 문제일 거야." 그가 말했다. "일종의 우주적 평형이지. 아마 시간 경험의 총합은 일정할 거야.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이 특별한 6월 어느 날의 생생한 인상을 더 많이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린 우리 몫을 포기해야만 해."
.."아이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우린 잊어야 하는 거로군요." 바실리가 요약했다.

520p.
..스케치북을 손에 받아 들자마자, 백작은 그냥 ‘스케치‘라고 말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 단어는 젊은이가 화가로서 가진 재능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피아차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자에 앉은 손님들은 인상파의 짧고 화사한 선으로 그려졌는데, 한창 대화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더해주었다. 탁자 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이는 웨이터들은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젊은이가 사람들을 그릴 때 사용한 암시적인 스타일은 방 자체를 묘사할 때 사용한 정밀한 기법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기둥들, 분수, 아치들이 완벽한 원근법에 의해 완벽한 비율로 재현되고 있었으며, 장식물들도 모두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540p.
.."알았다. 그래, 마리나가 당연히 알고 있다는 그 이유란 게 뭐니?"
.."마리나 아줌마는 아빠가 아빠의 단추들을 각각의 상자에 담아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래요."
.."내 단추들을 각각의 상자에 담아둔다고?"
.."이런 식이죠. 이 상자에는 파란 단추들만 담고, 저 상자에는 검은 단추들만 담고, 또 다른 상자에는 빨간 단추들만 담는 거죠. 아빠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여기서도 맺고 저기서도 맺는데, 그 관계들이 서로 구분되도록 하고 싶어 한대요."

715p.
..사람이 한때 소중하게 여겼던 장소를 수십 년 동안 찾지 않았을 경우, 현명한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절대 그곳에 다시 가지 말라고 충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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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84p.
..섬이 좋은 이유는, 그 섬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에 와 있는 것이다. 그는 갑자기 이 섬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267p.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살인사건을 만드는 것이 나의 야심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예술가도 예술 자체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반박할 수 없는 인식에의 본능이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내가 얼마나 현명했었는지를 누군가가 알아주기 바라는 가엾은 인간적인 소망의 발로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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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p.
..리바가 나타나면 나는 안심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는데, 자살을 감행하려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으면 아마도 그런 감정이 들 것이다. 내가 자살을 하려 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그건 자살과 정반대였다. 나의 동면은 자기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생명을 구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85~86p.
..트레버가 나를 학교에 내려주고 간 뒤 변호사에게 전화해 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일이 없을 거란 확신이 들기 전엔 안 팔래요." 나는 말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주택 시장이나 집값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애편지를 간직하듯 그 집을 붙잡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부터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실은 내가 겪은 상실을, 그 집 자체의 텅 빈 상태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이들과 얽혀 있느니 혼자가 낫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98~99p.
...그녀가 처방전 양식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신력으로 육체를 이겨라, 사람들이 그러죠. 하지만 대체 육체가 뭐죠? 현미경 아래에 놓고 보면 그저 조그만 물질 조각이에요. 원자 입자죠. 아원자 입자예요. 그렇게 점점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트랄랄라.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똑같이 무無예요. 당신이나 저나 무로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벽을 뚫고 지나갈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그들이 말하지 않는 건 벽을 뚫고 지나가면 아마 죽을 거라는 사실이죠. 잊지 말아요."

110p.
...그 무엇도 진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잠들고 깨어나는 일이 한데 합쳐져, 구름 속을 지나는 잿빛의 단조로운 비행기 여행 같았다.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하지도 않았다. 말할 게 별로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잠이 효과를 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점점 사라졌다. 계속 이대로 가면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겠구나, 생각했다. 그것이 내 소망이었다. 내 꿈이었다.

146p.
...내가 버리고 있는 이 모든음식을 리바가 본다면 헉 소리를 내며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 안 먹고 버리든 다 먹고 토해내든 다를 바 없는 낭비임을 모른다는 듯이.

146p.
..쓰레기를 복도로 가지고 나가 낙하장치에 던져넣었다. 그 건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쓰레기 낙하장치였다.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 내가 세상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쓰레기가 다른 사람들의 쓰레기와 섞였다. 나와 닿았던 물건이 다른 사람과 닿았던 물건과 닿았다. 나는 기여하고 있었다. 연결되어 있었다.

241p.
..어머니는 내가 잠들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헤아리라고, 양은 절대로 세지 말라고 했다. 별을 세라. 메르세데스벤츠의 종류를 열거해라.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이름을 대라. 앞으로 몇 년을 살지 헤아려라. 이대로 잠을 못 잔다면 창밖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343p.
..듣고 있자니 핑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작고 검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 사람, 한쪽 눈을 감고 실눈을 뜬 채 물감 묻은 손에 든 붓을 앞으로 내밀어 내 몸의 비율을 측정하는 그 사람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파충류 같은 소심한 존재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 주변 세상에 손을 담그고 이빨을 박는 대신에 돈과 대화에서 오락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 위해 이 행성에 배치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얄팍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더 나쁜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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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p.
..독일에는 중세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여러 군데 있다. 뷔딩엔Buedingen, 이드슈타인ldstein, 겔렌하우젠Gelnhausen 등이다. 역에 내리면 중세의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작은 도시들이다.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숙박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유럽의 관문인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가까우니 꼭 한 번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이 도시들은 거리 자체가 역사 기념물이다. 이곳에는 마녀의 성, 마녀재판에 쓰였던 도구들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대부분 힘없는 여인들이 이런 마녀의 성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다 한을 품고 떠나갔다. 특히 겔렌하우젠 마녀의 성에 있는 고문 기구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새삼 느낄 수 있다.

47p.
..‘우물에 독약 넣은 이‘라는 별칭은 14세기 중반 페스트가 전 유럽을 강타했을 때 붙여졌다. 유럽인은 그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에 유대인이 몰래 독약을 넣어서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로 인해 1349년 2월 2일부터 24일까지 독일 튀링에 주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이 맞아죽었다.

63p.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한동안 남자 사이의 사랑을 동성애로 간주하지 않았다. 두 남자가 쌍을 이루어 살면 ‘선택 형제‘라고 불렀고, 교회의 축성까지 받을 수 있었다. 역사학자 프랑크 마이어에 의하면 동방교회에서는 이들이 죽으면 함께 묻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197p.
..이 특별했던 십자군은 유사한 신분의 어린이들이 모였던 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들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높은 이상을 꿈꾸면서 방랑길에 올랐다. 물론 이들이 니콜라우스와 스테판의 계시에 속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군집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냈다. 하나는 자발적인 행렬을 통해 새로운 대도시에 도달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젊은이들이 일으킨 거리 운동의 효시라는 점이다.

199p.
..오늘날 젊은이들의 모임을 어린이 십자군과 비교했을 때 둘 사이의 중요한 공통점은 무기가 없는 ‘맨손‘이라는 사실이다. 십자군 어른은 무기를 지녔지만 어린이 십자군은 몸에 무기를 지니지 않았다. 폭력 없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종교적인 행군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어린이 십자군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의미로 재조명되고 있다. 영화가 제작되었고 베를린의 한 갤러리에서는 ‘어린이 십자군‘에 관련한 전시회도 열었다. 브레히트(1898~1956)는 1939년에 어린이 십자군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이런 긍정적인 해석마저 없다면 그때 교활한 사기극에 속아서 군집을 이루고 행렬했다가 실망하고 다시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어린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하지 않은가.

214p.
..그녀의 인생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허무하다. 정치에는 문외한이었던 여인이 권력의 맛을 알고 난 뒤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 결국 아들에게 버림받아 쓸쓸한 말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오른다. ‘여기다 싶을 때가 곧 거기를 떠날 때다. 이것이다 싶으면 곧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중용中庸과 상통하는 의미이다. 마리 드 메디시스 역시 적절하게 권력을 맛보고 물러났더라면 초라한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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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84p.
..무료 배식을 하는 공원에 가서 니토 씨를 붙잡고 내 생각들을 얘기하고 싶지만 그녀와 만나고픈 마음은 없다. 생각이 건전한 사람과 대화하는 건 무섭다. 어쩌구 소의 사람들이 무서워 신청하러 가지 못하는 사치 씨의 기분도 전혀 모르는 건 아니다. 꾸중이나 잔소리를 듣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니토 씨 같은 사람이나 어쩌구 소의 사람과 얽히지 않고 즉석만남 카페에서 알게된 사람만 상대하다보면 이곳 생활이 우리의 ‘보통‘이 된다.

297p.
..내가 앉아 있는 동안 둘이서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뭐라도 돕는 게 좋겠지만 움직여봐야 방해만 될 것 같다. 둘은 몇 년이나 함께한 부부처럼 보인다. 부엌에서 대화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그들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
..과거를 질질 끌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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