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p.
..리바가 나타나면 나는 안심과 짜증을 동시에 느꼈는데, 자살을 감행하려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으면 아마도 그런 감정이 들 것이다. 내가 자살을 하려 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그건 자살과 정반대였다. 나의 동면은 자기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 생명을 구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85~86p.
..트레버가 나를 학교에 내려주고 간 뒤 변호사에게 전화해 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일이 없을 거란 확신이 들기 전엔 안 팔래요." 나는 말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주택 시장이나 집값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애편지를 간직하듯 그 집을 붙잡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부터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실은 내가 겪은 상실을, 그 집 자체의 텅 빈 상태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이들과 얽혀 있느니 혼자가 낫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98~99p.
...그녀가 처방전 양식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신력으로 육체를 이겨라, 사람들이 그러죠. 하지만 대체 육체가 뭐죠? 현미경 아래에 놓고 보면 그저 조그만 물질 조각이에요. 원자 입자죠. 아원자 입자예요. 그렇게 점점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트랄랄라.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똑같이 무無예요. 당신이나 저나 무로서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벽을 뚫고 지나갈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그들이 말하지 않는 건 벽을 뚫고 지나가면 아마 죽을 거라는 사실이죠. 잊지 말아요."

110p.
...그 무엇도 진짜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잠들고 깨어나는 일이 한데 합쳐져, 구름 속을 지나는 잿빛의 단조로운 비행기 여행 같았다.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하지도 않았다. 말할 게 별로 없었다. 그렇게 해서 잠이 효과를 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점점 사라졌다. 계속 이대로 가면 나는 완전히 사라졌다가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나겠구나, 생각했다. 그것이 내 소망이었다. 내 꿈이었다.

146p.
...내가 버리고 있는 이 모든음식을 리바가 본다면 헉 소리를 내며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 안 먹고 버리든 다 먹고 토해내든 다를 바 없는 낭비임을 모른다는 듯이.

146p.
..쓰레기를 복도로 가지고 나가 낙하장치에 던져넣었다. 그 건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쓰레기 낙하장치였다.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 내가 세상에 참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쓰레기가 다른 사람들의 쓰레기와 섞였다. 나와 닿았던 물건이 다른 사람과 닿았던 물건과 닿았다. 나는 기여하고 있었다. 연결되어 있었다.

241p.
..어머니는 내가 잠들지 못하면 중요한 것을 헤아리라고, 양은 절대로 세지 말라고 했다. 별을 세라. 메르세데스벤츠의 종류를 열거해라.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이름을 대라. 앞으로 몇 년을 살지 헤아려라. 이대로 잠을 못 잔다면 창밖으로 뛰어내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343p.
..듣고 있자니 핑 시가 머리에 떠올랐다. 작고 검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그 사람, 한쪽 눈을 감고 실눈을 뜬 채 물감 묻은 손에 든 붓을 앞으로 내밀어 내 몸의 비율을 측정하는 그 사람이 머릿속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파충류 같은 소심한 존재로, 그와 비슷한 사람들, 주변 세상에 손을 담그고 이빨을 박는 대신에 돈과 대화에서 오락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 위해 이 행성에 배치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얄팍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더 나쁜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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