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p.
..사물들, 사람들의 얼굴, 행동, 감정, 세상의 질서를 명명하는 데 쓰인 수천 개의 단어들이 갑자기 무효화될 것이라는 것은 심장을 뛰게 하고 성기를 젖게 만든다.

93~94p.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줄에 있는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기억이 적합할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지난여름의 기억 외에 다른 기억은 없는 게 아닐까. 그녀 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육체, 남자의 몸, 상(像)이 거의 없는 그 기억. 그녀는 미래를 위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 1) 날씬해지고 금발 머리가 되는 것, 2) 자유롭고 독립적인,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밀렌느 드몽죠와 시몬 드 보부아르를 보며 꿈꾸기.

95p.
...미래는 연장해야할 경험들의 합(合)일뿐이었다. 24개월의 군 복무, 일, 결혼, 아이들. 사람들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계승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했고, 우리는 정해진 이 미래 앞에서 막연히 오랫동안 젊음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연설과 제도는 우리들의 욕망보다 뒤처졌고, 사회가 말로 표현하는 것과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격차는 당연했으며,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조차 아니었다. 단지 ‘네 멋대로 해라‘를 보면서 각자가 마음속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을 뿐.

104p.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들이 소스를 찍어 먹는 방식과 설탕을 녹이기 위해 찻잔을 흔들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며 말하는 방식을 주목하게 됐고, 단번에 외부적인 시선으로 가정을 바라보며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닫힌 세계라고 지각하게 됐다....

124p.
..시대마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행동과 말, 책이나 지하철 포스터만큼이나 웃기는 이야기들이 권장하는 사고에서 빗겨나간 곳에, 이 사회가 자신도 모르게 침묵하는 모든 것들이 있다. 사회는 명명할 수 없는 것들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독한 불편함을 안겨 준다. 어느 날 갑자기 혹은 조금씩 깨진 침묵과 무언가에 대해 터져 나온 말들은 결국 인정받게 되지만, 반면 그 아래로 또 다른 침묵이 형성된다.

141p.
..동유럽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보도블록이 깨진 잿빛 거리, 커다란 종이에 둘둘 말려 있는 상표 없는 알뜰한 상품들을 파는 정부가 운영하는 상점 앞에서, 아파트 천장에 매달린 장식 없는 전구 앞에서, 그들은 우아함이 없는, 전쟁 후 줄곧 열악했던 느린 세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은 감정이었지만, 결코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수를 놓은 블라우스와 증류주를 가져왔고, 언제까지나 이 세상에 미개발된 나라가 있어서 그들을 이렇게 과거로 데려가줄 수 있기를 바랐다.

178p.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책 한 권이 저절로 써지는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197~198p.
...사랑을 나눈 후, 그녀는 그에게 묵직한 몸을 포갠 채, 자동차들의 소음 속에 반쯤 잠이 들며 이렇게 낮잠을 잤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 어릴 적 이브토의 일요일, 책을 읽다가 어머니의 등에 기대어 잠든 낮잠, 영국에서 오페어로 머물 때 전기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고 잤던 낮잠, 팜플로니나의 메종나브 호텔에서의 낮잠. 그녀는 매번 이 달콤한 무감각 상태에서 빠져나와 일어나 숙제를 하고, 거리로 나오고,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존재해야 했다. 이 순간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두 개의 축이 교차하는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 순간에 그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을 지탱하는 수평선, 또 다른 하나는 몇 개의 이미지가 동반된, 밤을 향해 빠져드는 수직선이다.

213p.
...소비의 경험이 없는 그들은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물질적인 재산에 대한 자제도 분별도 없는 이 집단적인 굶주림의 광경은 우리를 언짢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떠올리며 꾸며낸, 순수하고 추상적인 자유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공산주의의 멍에를 쓴>> 민족에 대해 습관처럼 느꼈던 비탄은, 그들이 자유를 쓰는 사용법에 대한 비난 섞인 관찰로 바뀌었다. 우리는 행복과 <<자유로운 세상>>을 가졌다는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해 소시지와 책을 위해 줄을 섰던, 모든 것을 박탈당했던 그들을 더 좋아했다.

225p.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은 <<나>>와 <<그녀>> 사이의 선택이다. <<나>> 안에는 너무도 확고부동한 것들, 편협하고 숨 막히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 안에는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책의 모습과 그 책이 남겨야 하는 것은 얼굴 위로 흐르는 빛과 그림자이며, 12살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그 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최근에 ‘삶과 운명‘을 읽으며 그녀가 간직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방법이 아니라면 깨달음, 적어도 마르셀 프루스트의 차에 적신 마들렌처럼 우연이 가져다주는 어떤 신호를 기대하고 있다.

255~256p.
...그녀는 하나씩 차례로 떠다니는 인생의 여러 순간 속의 자신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의식과 그녀의 육체를 사로잡는 낯선 본성의 시간이며, 그녀였던 모든 존재의 형태들이 순식간에 되돌아오는 듯한, 현재와 과거가 뒤섞임 없이 겹쳐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미 가끔씩 느껴 본 적이 있었던 감각으로 — 마약으로 이런 감각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마약을 한 적은 없다. 무엇보다 온전한 정신상태의 쾌락이 최고라고 여긴다 — 이제는 일종의 확장과 지연 속에서 그것을 포착한다. 그녀는 이 감각에 이름을 부여한다.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palimpseste),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새로 쓰기 위하여 긁어서 지운 수사본>>이므로 완벽히 들어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거의 과학적인, 어쩌면 지식으로 쓸 수 있는 — 무엇에 대한 지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 도구를 본다. 1940년부터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설움에 죄책감마저 더해져 점점 더 그녀를 붙잡는다. 분명 프루스트의 영향이겠지만,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으므로, 그녀는 이 감각이 시작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278p.
..뒤섞인 개념 속에서 자신만을 위한 문장,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외치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301p.
..그것은 연속적이고 절대적이며, 삶의 마지막 장면까지 점차 현재를 집어삼키는 반과거 속으로 서서히 미끄러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일시적으로 중단된 흐름, 그러나 그녀의 존재의 실질적인 형체와 사회적인 위치를 포착할 사진과 영화 속 장면들이 군데군데 들어갈 것이다 — 기억의 정지이자 동시에 그녀의 삶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삶의 요소들의 본성, 외부적인 것들(사회적인 경력, 직업) 혹은 내부적인 것들(생각과 동경,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 저마다 하나뿐인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이다. 글 속에서의 <<그녀>>는 거울 속, 사진 속의 끊임없는 타인에 해당될 것이다.
..그녀가 일종의 비개인적인 자서전으로 보는 이 글에는 어떤 <<나>>도 없다 —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사람들>>과 <<우리>>가 있다 — 마치 이번에는 그녀가 지난날의 서사를 얘기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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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p.
...각각의 당인산 뼈대를 따라 달콤하게, 시큼하게. 그것이 내 본질적 자아의 레시피다. 나는 몽상 속에서도 존과 트루디를 하나로 섞는다—부모가 별거중인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 나는 그들을, 이 기본 쌍을 재결합시켜 내 환경이 게놈에 합치되기를 갈망한다.

30p.
...내 예측이 틀리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그는 이중으로 실패할 것 같다. 어머니는 나약한 그를 계속 경멸할 것이고 그는 필요 이상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그의 방문은 끝나지 않고조금씩 희미해져간다. 그는 공명하는 슬픔의 장을, 상상 속 모습을, 여전히 그의 의자를 차지한 채 실의에 잠긴 홀로그램을 서재에 남긴다.

54p.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67~68p.
..오래전 나는 고통이 의식을 낳았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다. 단순한 생명체는 심각한 손상을 피하기 위해 주관적 순환고리, 즉 감각 경험이라는 채찍과 회초리를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 머릿속에는 그저 경고의 빨간불만 있는 게 아니라—누가 거기서 그걸 보겠는가?—고통스러운 찌름과 쑤심, 욱신거림도 있다. 역경은 우리에게 의식을 강요했고, 우리가 불에 너무 가까이 갈 때, 무리하게 사랑할 때 그 의식이란 것이 작동해 우리를 깨문다. 그렇게 경험된 감각들은 자아 창조의 시작점이다....

104p.
...므시외 바르트가 말하기를, 권태는 희열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인간은 기쁨의 해안에서 권태를 바라본다. 바로 그렇다. 현대 태아의 상태. 생각해보라. 태아가 하는 일이라곤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뿐이고, 성장도 의식적인 행위라고 하긴 어렵다. 순수한 존재의 기쁨, 별다르지 않은 나날의 지루함, 연장된 희열은 곧 실존적 권태다. 여기 갇힌 시간이 감옥살이가 되어선 안 된다. 나는 여기서 고독의 특권과 사치를 누려야 한다.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말하지만 나는 영원히 이어지는 오르가슴을 떠올린다—그 절정의 영역에 권태가 기다리고 있다.

193p.
...생물학은 운명이고, 운명은 숫자로 표시되며, 이 경우 이진법이다. 절망적일 정도로 단순했다. 모든 출생의 핵심에 있는 이상한 필수 요건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이것이냐—저것이냐. 그외에는 없다. 눈부신 출생의 순간 아무도 사람이다!라고 외치지 않는다. 딸이다, 아들이다, 라고 외친다....

260p.
...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이 뒤에서 탯줄이 풀린다. 나는 앞으로, 밖으로 나아간다. 냉혹한 자연의 힘이 나를 찌부러뜨리려 한다. 내가 지나는 곳은 삼촌의 일부가 반대쪽에서 너무도 자주 드나들었던 그 구간이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그의 날에 질이었던 것이 지금은 자랑스러운 산도, 나의 파나마운하고 나는 그보다 훨씬 크다. 아주 오래된 정보라는 화물을 싣고 위엄 있게 천천히 나아가는 위풍당당한 유전자의 배다. 뜨내기 남근과는 비교가 안 된다. 한동안 나는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온몸이 쑤신다. 하지만 지금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내 어머니다. 모든 어머니처럼 머리 크고 시끄러운 아기를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비명을 지르는 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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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p.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보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또한 ‘호두를 많이 먹는다‘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라고 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는 단어는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와 ‘엄마를 좋아한다‘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 번째 문장은 입 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40p.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사과랑 과자, 초콜릿, 동전 등을 길가 풀숲에 던져버렸다.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것은 버릴 도리가 없었다.

365p.
.."그런데 루카스 넌, 아그네스의 동생을 사랑해. 난 세 사람이 부엌에 들어올 때 저들이 바로 진짜 한 가족이구나 하는 걸 느꼈어. 부모가 금발이고 잘생겼으면, 아이도 당연히 금발이고 잘생겨야 하니까. 그런데 난, 난 가족이 없어. 난 엄마도 아빠도 없어, 난 금발도 아니고, 못생기고, 불구야."

370p.
.."마티아스에게는 잘된 일이다. 그는 영원히 초등학교 일 학년생이고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380p.
.."우리는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했거든요. 완전히 분리되기로 했던겁니다. 국경만으로는 부족해서, 침묵까지 지켰던 거지요."

394p.
.."제가 관심 있는 것은요, 당신이 쓰시는 글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이야기인지 하는 점이에요."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쓰려고 하지만, 어떤 때는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는 나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고 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545p.
..나는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머릿속으로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내가 몇 년 전부터 해온 버릇이었다. 내가 그에게 하는 말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똑같은 말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다는 것, 그는 운이 좋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의 처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나는 그가 더 좋은 처지에 있고, 나는 너무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559p.
..창작/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

560p.
...쓰는 행위를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이다. 쓰면 쓸수록 병은 더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이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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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p.
..유행은 버리고 싶고, 체형은 지키고 싶다. 좋은 소재의 기본 디자인을 사고, 세탁과 수선을 하며 옷을 잘 관리하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은 분명 여러 종류다. 옷장 속에 나와 함께 나이 든 질 좋은 코트와 머플러가 내겐 그 증거다. 그래서 옷이 망가져서가 아닌, 체형의 변화가 같은 옷을 입을 수 없게 할 거란 생각을 한다. 지금도 조금씩 달라지는 몸에 확연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몸 자체에 신경을 쓴다. 허리를 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골반이 비틀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꼬지 않고, 요가를 하고 자주 걸어 다닌다. 예전보다 몸 자체에 신경 쓰며 살아도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지는 전혀 알 수 없다.

106p.
...진짜 휴식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몸과 마음에 뭉치고 쌓인 것을 풀어내야 생기는 것임을 예전에는 몰랐다.

158p.
...긍정의 메시지를 모을수록 부정은 약해진다. 보통 칭찬은 휘발성이 강하고 악담이나 상처는 오래 남는다. 감정이 가진 힘의 세기가 다르다. 칭찬을 모아둔다. 내가 자신감을 잃고 비틀거릴 때 꺼내볼 수 있도록....

241~242p.
...어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를 생략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되었는지 곱씹어본다. 누가 되었든 상대를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인사하는 문화가 아니어서일까. 윗사람이 아렛사람의 인사를 받는 문화에서 살아서인가 싶었다. 서비스 구매자일 때는 인사를 받기만 해도 문제없는 거라는 인식. 갑자기 부끄럽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더는 인사를 생략하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인사는 당신이 거기 있음을 내가 알고 있다는 표시이고 당신이 오늘 괜찮은지 궁금하고 괜찮다면 내 용건을 이제부터 말하고 싶다는 아주 기본적인 의사소통법인데 그걸 모른척했다. 나는 타인에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실상 타인이 낯설어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인사를 먼저 하게 된 뒤로 나는 낯선 사람이 껄끄럽지 않다.

250p.
..표정에서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 좋다. 뭔가에 사로잡혀서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사람, 우직하게 어떤 일에 매달려 있는 열정적인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힘든 일을 털어놓을 때도 결국 긍정적인 말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자기 연민은 살짝 스쳐갈 정도로만, 남을 비난하는데 소중한 시간과 체력을 절대 낭비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냉소적인 사람을 만나면 도망가고 싶은 것과는 반대다. 그러고 보면 유독 담백한 사람에게 끌린다. 과장 없이 말하고, 자신의 의견은 있되 상대에게 바라는 건 없다. 무엇 하나라도 더 얻어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는다. 사사로운 욕심 없는 사람은 쉬이 만날 수 없다.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없으니 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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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p.
...경계인은 감정을 적절하게 분출하도록 해주는 응고 체계가 결여돼 있다. 일종의 감정 혈우병을 앓는 셈이다. 이들의 연약한 ‘피부‘를 찌르면 감정적 출혈이 멈추지 않아 영원히 고통받는다.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일은 낯선 경험이다.

66p.
..‘대상항상성‘이 부족한 경우도 많다. 대상항상성이란 상대를 다양한 면을 지닌 인격체로 이해하면서도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을 일관적인 기준으로 연관해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경계성에 갇힌 사람들은 광범위하게 지속되는 상호 소통이 아닌 가장 최근에 만난 모습을 토대로 상대방을 기억한다. 따라서 타인에 대해 예측 가능하고 지속적인 관점을 가질 수 없다. 마치 특정인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대하듯 반응한다.

81p.
..드물지만 자기 처벌이 좀 더 간접적인 경우도 있다. 경계인은 반복되는 ‘표면적인 사고quasi accidents‘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본인이 직접 잦은 싸움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 탓에 폭력을 휘둘렀다고 여겨서 싸움에 직접적으로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150p.
..이는 경계인이 규칙적인 생활 방식에 적응하다 보니 이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과도한 음주나 자살 위협과 같은 극적인 제스처를 주기적으로 표출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서 경계인도 에너지나 기력이 줄어들어 빠르게 변하는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부는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 대부분의 경계인은 치료 유무와 관계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진다. 실제로 대부분은 더 이상 아홉 가지 경계성 성격장애 측정 기준 중 다섯 가지를 충족하지 못하므로 ‘치료된‘ 상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경계인과 인생을 함께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행동을 더 잘 용인하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반응도 예측할 수 있게 되므로 경계인을 대하기가 더 쉬워지고 그들도 건강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울 수 있다.

191p.
..마조히즘은 경계인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주된 특질이다. 의존성과 고통이 결합돼 비슷한 고통인 ‘사랑의 상처‘를 끌어낸다. 경계성 환자가 어린아이라면 어머니나 주요 보호자와 성숙한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면서 고통과 혼란을 경험한다. 나중에는 배우자, 친구, 스승, 고용주, 성직자, 의사 등 다른 파트너와 이 혼란을 이어나간다. 비난과 학대는 경계인에게 가치 없는 자기 이미지를 강화해줄 뿐이다.

204p.
..사라진 아버지 증후군은 병적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혼이나 사별로 고통받는 가족 안에서 종종 어머니는 이상적인 부모가 돼 보상하려는 심리를 보이므로 자녀의 모든 삶에 관여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녀가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할 기회가 줄어든다.
..그런데 비록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노력하지만 여러 사례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녀가 된다. 아이는 아버지의 부재를 겪으면서 어머니와 공생하려는 집중력이 높아진다. 따라서 아이는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이상적인 관점에 따라 자라고 영원히 어머니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환상을 가진다. 부모가 자녀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자녀의 성장과 개인화를 방해하고 개입하게 되므로 BPD의 씨앗을 뿌리는것과 마찬가지다.

230p.
..경계성 환자는 발전해나가면서 더 편안하고 믿을 만한 의존성에 정착한다. 그렇지만 치료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항상 관계 속에서 다시 혼란을 느낀다. 과거의 기능 방식에 대해 크게 슬퍼하며 앞으로 발전해나가야 하는 필요에 분개한다. 즉 호수에서 수영하다가 이미 절반을 넘게 건너와 되돌아가는 것보다 끝까지 가서 쉬는 편이 낫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과 같은 기분을 느낀다.

288p.
..이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브레이크‘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사람의 정신적 브레이크는 기분이나 행동의 정점에서 조금씩 내려와 하강의 ‘중간 지점‘에 멈추게 해준다. 하지만 경계성 환자는 자신의 브레이크가 듣지 않을거라고 두려워하며 멈출 수 없다고 믿기에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점진적인 변화는 자동 반사라는 변화를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경계성 환자는 어린아이가 ‘눈 깜박이기‘나 ‘웃기기‘ 같은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사 작용은 몇 년에 걸쳐 생성되는 것으로 의식적이고 동기가 부여된 노력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다.

299p.
..경계인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나와 타인에 대해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태도다.
..경계인은 완벽하게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자신을 A+ 아니면 F로 평가한다. 또한 F로부터 배우기보다는 이를 주홍글씨로 새기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들은 자신이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 행동의 유형을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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