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고(最古)의 지도인 바빌로니아 세계지도는 중심에 원이 뚫려 있었다. 학자들에 의해 컴퍼스로 지도에 원을 그리다가 생긴 구멍이라는 게 밝혀졌다. 오기는 돌에 새겨진 세계의 기하학적인 형상보다 그 구멍에 매혹되어 대영박물관의 어두운 전시실에 오래 머물렀다. 그 좁고 검은 구멍은 이제는 찾을 수 없는 한 시대의 기억처럼 깊었다. 사라진 시대와 만나려면 저 구멍에 닿아야 했지만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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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p.
..우리는 어지간해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되도록 상대에게 다정하려고 했고, 또 실제로 다정했다. 고집을 세우고 다정함을 희생해서까지 지켜야 할 무엇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았다.

24~25p.
.."행복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사람은 그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행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잘못된 행복을 잡으면 그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불행으로 바뀌어버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45p.
"...아니, 나는 성적 욕망에 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플라토닉한 애정 자체에 이미 반질서적 경향, 자신이 속한 질서에서 탈출하여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반대일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자유가 뭡니까? 세상에 잠깐 스쳐가는 존재인 우리에게 자유가 뭘까요? 만약 학자이면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학문이나 연애, 적어도 둘 중 한쪽이 가짜일 겁니다. 오하시 군, 만약 우리가 연애를 한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학문이라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50p.
..소네는 냉정한 사내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네는 자기 삶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인간에게는 속아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도 있을지 모르는데....

79p.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마음에 음화陰畵처럼 새겨진 부사장의 너무나 어두웠던 표정을 반추하노라면, 인간의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점차 마음속으로 퍼져갔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그토록 어두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면 사람이 살아서 얻는 행복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83p.
..이윽고 연휴도 끝나고 이전처럼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 그러나 나는 이제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굳이 그것을 말로 표현해보자면, 결국 죽을 때가 돼서 생각나는 일이 과거에 저지른 배신이라면 지금 생활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지만, 실제로 내가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논리로도 따질 수 없는, 사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었다. 날마다 일하는 것도 귀찮고 아야코 씨를 음악회에 데려가는 것도 귀찮았다. 아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그것은 내가 또하나의 나와 소리가 통하지 않는 유리벽으로 차단되어, 저쪽에 있는 나는 종일 아무 의미도 없이 뭔가를 하고 있지만, 이쪽의 나는 그걸 그저 우울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매일 속에서 죽음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내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113p.
..그러나 격렬한 감정이 공허함을 지탱해주지는 않았다. 그 격렬함은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바로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격렬한 감정 속에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을 전적으로 채우지 않는다는 것, 그 격렬함은 영원히 이어질 공허라는 유희 속에 잠깐의 휴식, 아이들이 말하는 ‘타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123p.
..그것은 기괴하긴 했지만 동시에 가장 풍성한 혼돈을 내재한 정경이었다고, 이제 와서야—이 수기를 쓰면서—생각한다. 그리고 나야말로 그 가능성으로서의 풍요로움을 현실의 풍요로움으로 바꾸기 위해 유코와 싸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물론, 유코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도, 그리고 유코와의 이야기를 약혼자 세쓰코에게 한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겨울밤의 나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갠가의 생의 풍경이 내 속에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야만 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이해가 이미 그의 생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을 때에야 가능한 걸까.

130p.
..우리는 푹푹 찌는 병원 뜰의 그늘에서 유코의 부모가 상경하기를 기다렸다. 다들 잘도 떠들었다. 쾌활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나는 그들이 유코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 것을 증오한게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슬퍼했다. 어쩌면 친구인 유코의 죽음을 순수하게 슬퍼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 인생의 중대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무의식중에 쾌활해지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그런 쾌활함을 증오했다.

133p.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한여름 속으로 시간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유코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언제부턴가 내 속에 싹텄다. 그것은 희미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 의혹을 깨달았을 때, 내 속에 갑자기 그 병원 뜰에서 다른 친구들의 천진난만한 쾌활함을 증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은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하는 자신을 본능적으로 예지했던 내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믿고 있는 친구들의 천진함에 대한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내 어두운 표정은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화려한 색의 수영복을 입은 도시 아가씨와 알게 되어, 파란 바다와 빛나는 태양 아래 함께 수영하고, 하얀 햇살이 비치는 거친 바위 뒤에서 그 아가씨를 안았다. 육지를 따라 모래사장으로 돌아왔을 때, 바다와 모래사장은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원래의 색을 잃고 끝없이 하얗게 펼쳐졌다. 나는 내 속에 결코 회한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내 속에서 자기혐오가, 죄의식이, 그리고 그것과의 싸움이, 충실한 생활이 물결치듯 되살아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것을, 나의 공허함은 일시적이거나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았다.

196~197p.
..짐을 부쳐 텅 빈 방안에 노을이 물들었다. 이 방에서 지내는 것도 앞으로 하루이틀이다. 그러나 그걸로 됐다. 우리는 날마다 모든 것과 이별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야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232p.
...어쨌든 그 아름다운 록탈관이 내 손에 들어왔다. 물론 록탈관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언제나 동경하는 배선 저쪽 세계의 확고한 아름다움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며, 말하자면 그 세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로서 록탈관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록탈관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록탈관 배후 세계의 아름다움으로, 결국 사용할 수 없게 된, 그 세계와 무관한 록탈관은 더할 수 없이 비참한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록탈관은 지금 확실히 내 주머니에 있고, 그것은 겉보기에는 완전한 록탈관이다. 겉보기에 이상이 없는 것은 그 아름다움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하지 않고는 감정에 호소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내가 지금 아름다운 록탈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나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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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로 유명한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이 『미식 예찬(Physiologie du gout)』에서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먹는 법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을 뿐이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사람, 대량 수입한 음식을 먹고 남기는 사람. 음식의 신이 있다면 틀림없이 전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후자에게는 언젠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지 않을까? 모하메드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지만 혀가 마비되어 그럴 수 없었다.
..판자 곤돌라는 다카의 축축한 공기 속을 빙빙 돌았고, 칙칙하게 줄지어 있는 집들은 몇 번이고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아에타족에게는 술을 마시는 습관도, 만드는 전통도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로분가 재정착지의 장로 마가아브 카바리크도 지금은 네스카페 팬이지만, 술 이야기가 나오자 ‘취해서 생각하는 것과 깨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니 이상하다’며 연신 화를 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내게는 참 신선한 논리로 들렸다.

..앞서가는 노인의 억센 목둘레를 의심의 눈초리로 더듬었다. 그것을 먹은 사람의 목 뒤쪽에 나타난다는 ‘녹색 둥근 고리’가 정말로 있는지 찾아보았다.
..어떤 흔적도 없었다. 사람 고기를 먹지 않은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그 고리 모양 빛에 관한 이야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소설 『반짝이끼(ひかりごけ)』에서 읽었다.

..각 민족이 선조나 문화의 기억을 맛으로 표현하는 것이 음식이다. 그 때문에 ‘음식’과 관련된 차별은 마음에 상처를 준다는 게 내 생각이다. 냄새가 나서 야만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외국인 주택을 불태워 없애려는 네오나치는 아니다. 하지만 네오나치의 싹이 되기는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탄 채굴 현장에 다다르니 그곳은 아름다운 칠흑의 벽이었다. 좀 전의 공포는 잊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운모 같았다. 눈이 부실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검은색이 그렇게 밝은 색인 줄 미처 몰랐다. 이곳의 질 좋은 석탄이 ‘백합의 찬란함’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았다.

.."다들 와 있어요. 용기를 내야 해요."
..프레드가 머뭇거리는 나를 나무랐다. "위선을 괴로워할 여유 같은 건 없어요." 하고 말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전에 김 할머니와 먹었을 때도 똑같은 인사를 받았다. 일본인은 이미 잊고 있는 식사 후 인사를 할머니들은 언제 어디서 익혔을까?
..나는 깨달았다.
..김 할머니도, 이 할머니도 맛의 기억을 담은 개인사를 오랫동안 천천히 이야기하면 할수록 날카롭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고난이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참함과 같아 보여도, 하나하나 세세하게는 역시 자기 자신만의 것이다.
..아마도 대충 한데 묶여서 언급되는 것에 지극히 사적 기억이 반발하기 때문에, 이들이 때때로 우울해지는 게 아닐까? 나는 할머니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쓸데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에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여행을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기획했다. 사고의 화살 끝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 고백건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가벼운 대인 기피증에 빠져 있었다. 정감의 상실이다. 외부 세계의 굴곡, 출렁임, 생명의 약동, 죽음과 죽음의 냄새, 격분, 살의, 비탄, 큰 재해……. 이런 압도적인 질감과 양감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 마치 눈앞이 가로막혀 버리듯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내게 중요한 것은 단지 직업상 필요한 자료였고, 장악할 수 있는 수치였으며, 단조로운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세계에 소용돌이치는 모든 감정을 똑같이 일정하게 그리고 무기질적인 기호로 바꿔치기했다고 말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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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p.
..나는 사람들한테는 ‘가르쳐 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무지‘가 의외로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136p.
..밤의 호화로운 세계에 빠져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K사장과의 달콤한 애프터도, L회장이나 다른 손님들과의 특별한 ‘상류사회 체험‘도 모두 샛길일 뿐이다. 여기에 머무는 순간 라스베이거스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릴 것이다.
..길 위에 올라선 자는 계속 걸어야 할 것이다. 안주하는 순간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146~147p.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빠짐없이 들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미나코는 방향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눈앞의 목표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삶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바다는 목적이나 목표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범선은 타륜으로써 방향을 잡지만, 돛과 노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미나코와 나는 각각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난 미나코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몇 번이고 전율을 느꼈다. 나는 ‘죽음의 의식儀式‘으로서 라스베이거스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삶의 출발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의 목표와 계획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부러워하기조차 했다. 물론 그녀는 나의 라스베이거스 행에 대해 정반대의 해석을 하고 있지만, 왠지 전혀 의미가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내가 생각해 왔던 나‘를 훨씬 더 괜찮은 존재로 격상시켜 주었다.

156p.
.."너희들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아홉? 서른? 요즘 여자애들은 서른만 넘으면 나이 들었다고 한숨을 푹푹 쉰다며? 웃기기 말라고 해. 인생은 더럽게 길어. 꽤 살았구나, 해도 아직 한참 남은게 인생이야. 이 일 저 일 다 해보고 남편 자식 다 떠나보낸 뒤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만큼 길지. 100미터 경주인 줄 알고 전력질주하다 보면 큰코다쳐. 아직 달려야 할 거리가 무지무지하게 많이 남았는데, 시작부터 힘 다 쏟으면 어쩔 거야? 내가 너희들한테 딱 한마디만 해줄게. 60 넘어서도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게 뭔지 잘 찾아봐. 그걸 지금부터 슬슬 준비하란 말이야. 내가 왜 이 나이 먹고서도 매일 술을 마시는지 알아? 빈 잔이 너무 허전해서 그래. 빈 잔에 술 말고 다른 재미를 담을 수 있다면 왜 구태여 이 쓴 걸 마시겠어?"

168p.
.."사실 처음엔 그런 꿈으로 일본에 왔어.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인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보수를 많이 받거든. 그러다 보니 자꾸 나 스스로 계획을 미루게 되더란 말이지. 미나코, 아마리 너희들을 만나고 나서야 아차 싶었어, 고향에 있을때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적의 행군을 막으려면 술과 고기를 베풀어라.‘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평생의 꿈을 가로막는 건 시련이 아니라 안정인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 그래서 오늘 이 만찬을 계기로 다시 나의 오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어."

169p.
..그래도 난 그 목표에 모든 것을 걸었다. 비록 평생의 꿈은 찾지 못했지만, 이 정도 목표만을 위해서라도 전력을 쏟아붓고 싶었다. 나 자신을 한계선까지 밀어붙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있다는 느낌을, 살고 싶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171p.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뒤집어진 한 장의 카드를 놓고 거액의 베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해야 하는 그 초긴장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카지노에서의 매순간을 진지한 승부와 도전으로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 분명 후회가 남거나, 아니면 죽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더 철저히 카지노를 파고들었다.

193p.
. 어쨌거나 상관없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내가 진짜 얻고자 하는 것은 일확천금이 아니라 ‘느낌‘이니까.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곳, 인간의 욕망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는 그 현장에서 나는 그 모든 느낌들을 흡수할 것이다. 그리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각오까지 다 준비됐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의 베팅액은 ‘나‘라는 존재 자체인 셈이다.

197p.
..산책할 때 입을 옷을 비롯해서 런치, 디너, 호텔 바, 카지노 등상황과 장소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었다. 옷만 제대로 입어 줘도 마음의 자세가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그 분명한 진실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234p.
..나는 단 6일을 위해 1년을 살았고, 삶을 끝내기 위해 6일을 불태웠다. 그 끄트머리에서 ‘20대의 나‘는 죽고 30대의 내가 다시 살아났다. 이제부터 맞이하게 될 수많은 ‘오늘들‘은 나에게 늘 선물과도 같을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내일‘이란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의 인생은 천금 같은 오늘의 연속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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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병이란 게 그런 식으로 오는 게 아녜요. 쌩쌩하게 활동하다가 한 번에 죽을병이 오는 게 아니라구요."
.."네?"
.."여기저기, 조금씩 조금씩 아파요. 만성적인 병이 늘어요. 병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이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당장 죽을병에 걸린 건 아니었다. 이 병과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나는 ‘마지막 여행’ 대신, 살기로 했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는 초탈의식과 ‘하지만 심미안은 있다구’ 하는 우월의식이 머릿속에서 맞부딪쳐 요란스럽게 깨진다.

..PT를 시작하기 전까지 내가 운동하는 시간은 45분이었다. 여기에 체육관 오가는 시간, 씻는 시간을 다 더해 하루 한 시간 남짓 내는 것도 솔직히 아까웠다. 그렇다고 24시간을 뭐 그리 알차게 채우는 것도 아니지만, 운동 ‘따위’에 한 시간을 선뜻 내기가 아까웠다. 머리 쓰는 시간은 귀하게 여기고 몸 쓰는 시간은 하찮게 여기는 건 내가 받아온 교육과 사회체계가 가르친 고약한 습성이란 것을, 역시 머리로만 인정하면서 현실에서 여간해선 고치고 싶지 않았다.

..건강하지 못한 노동 환경, 불안한 노동 환경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어린 왕자와 여우 사이의 ‘길들여짐’을 경험할 기회가 줄어든다....

..나이스와 여러 트레이너들을 보면서 계몽주의 시대에 『백과전서』를 편찬한 이들의 관점이 떠올랐다. 백과전서파는 암묵적인 지식과 생동감 넘치는 활력을 예찬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도 무슨 일을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 암묵적 지식이다. 보고 들은 것과 실제로 해본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 몸소 경험하여 알아내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배움이었다.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뿐 아니라 사람의 변화를 같이 하는 것,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기도 존중하는 의식을 키워가는 것, 그것이 배움이었다.

...아무튼 깍두기인 내가 플레이를 잘 못한 탓에 점수를 잃어도 나를 타박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양쪽 편에서 골고루 못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실점하는 건 그냥 규칙의 일부로, 게임의 일부로 알았다. 깍두기는 시합과 경쟁을 즐기면서 동시에 나 같은 아이를 배려할 줄 아는 멋진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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