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p. ..우리는 어지간해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되도록 상대에게 다정하려고 했고, 또 실제로 다정했다. 고집을 세우고 다정함을 희생해서까지 지켜야 할 무엇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았다.
24~25p. .."행복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사람은 그중에서 자기 몸에 맞는 행복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해. 잘못된 행복을 잡으면 그건 손바닥 안에서 금세 불행으로 바뀌어버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행이 몇 종류인가 있을 거야, 분명. 그리고 사람은 거기서 자기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는 거지. 정말로 몸에 맞는 불행을 선택하면, 그건 너무 잘 맞아서 쉬이 익숙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행복과 분간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45p. "...아니, 나는 성적 욕망에 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상대가 자신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플라토닉한 애정 자체에 이미 반질서적 경향, 자신이 속한 질서에서 탈출하여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반대일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자유가 뭡니까? 세상에 잠깐 스쳐가는 존재인 우리에게 자유가 뭘까요? 만약 학자이면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학문이나 연애, 적어도 둘 중 한쪽이 가짜일 겁니다. 오하시 군, 만약 우리가 연애를 한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학문이라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50p. ..소네는 냉정한 사내구나, 라고 나는 생각했다. 소네는 자기 삶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버린다. 인간에게는 속아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도 있을지 모르는데....
79p.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마음에 음화陰畵처럼 새겨진 부사장의 너무나 어두웠던 표정을 반추하노라면, 인간의 행복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점차 마음속으로 퍼져갔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그토록 어두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면 사람이 살아서 얻는 행복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다.
83p. ..이윽고 연휴도 끝나고 이전처럼 바쁜 일상으로 돌아왔지. 그러나 나는 이제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굳이 그것을 말로 표현해보자면, 결국 죽을 때가 돼서 생각나는 일이 과거에 저지른 배신이라면 지금 생활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지만, 실제로 내가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논리로도 따질 수 없는, 사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었다. 날마다 일하는 것도 귀찮고 아야코 씨를 음악회에 데려가는 것도 귀찮았다. 아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조차도 귀찮았다. 그것은 내가 또하나의 나와 소리가 통하지 않는 유리벽으로 차단되어, 저쪽에 있는 나는 종일 아무 의미도 없이 뭔가를 하고 있지만, 이쪽의 나는 그걸 그저 우울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매일 속에서 죽음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내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113p. ..그러나 격렬한 감정이 공허함을 지탱해주지는 않았다. 그 격렬함은 그런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바로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격렬한 감정 속에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을 전적으로 채우지 않는다는 것, 그 격렬함은 영원히 이어질 공허라는 유희 속에 잠깐의 휴식, 아이들이 말하는 ‘타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123p. ..그것은 기괴하긴 했지만 동시에 가장 풍성한 혼돈을 내재한 정경이었다고, 이제 와서야—이 수기를 쓰면서—생각한다. 그리고 나야말로 그 가능성으로서의 풍요로움을 현실의 풍요로움으로 바꾸기 위해 유코와 싸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물론, 유코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도, 그리고 유코와의 이야기를 약혼자 세쓰코에게 한 지금으로부터 반년 전 겨울밤의 나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갠가의 생의 풍경이 내 속에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야만 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이해가 이미 그의 생에 아무 의미가 없어졌을 때에야 가능한 걸까.
130p. ..우리는 푹푹 찌는 병원 뜰의 그늘에서 유코의 부모가 상경하기를 기다렸다. 다들 잘도 떠들었다. 쾌활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을 증오했다. ..나는 그들이 유코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 것을 증오한게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슬퍼했다. 어쩌면 친구인 유코의 죽음을 순수하게 슬퍼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지금 인생의 중대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무의식중에 쾌활해지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그런 쾌활함을 증오했다.
133p.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한여름 속으로 시간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유코의 죽음을 슬퍼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언제부턴가 내 속에 싹텄다. 그것은 희미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그 의혹을 깨달았을 때, 내 속에 갑자기 그 병원 뜰에서 다른 친구들의 천진난만한 쾌활함을 증오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은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하는 자신을 본능적으로 예지했던 내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믿고 있는 친구들의 천진함에 대한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내 어두운 표정은 유코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 사실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화려한 색의 수영복을 입은 도시 아가씨와 알게 되어, 파란 바다와 빛나는 태양 아래 함께 수영하고, 하얀 햇살이 비치는 거친 바위 뒤에서 그 아가씨를 안았다. 육지를 따라 모래사장으로 돌아왔을 때, 바다와 모래사장은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원래의 색을 잃고 끝없이 하얗게 펼쳐졌다. 나는 내 속에 결코 회한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내 속에서 자기혐오가, 죄의식이, 그리고 그것과의 싸움이, 충실한 생활이 물결치듯 되살아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것을, 나의 공허함은 일시적이거나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동의어라는 것을 알았다.
196~197p. ..짐을 부쳐 텅 빈 방안에 노을이 물들었다. 이 방에서 지내는 것도 앞으로 하루이틀이다. 그러나 그걸로 됐다. 우리는 날마다 모든 것과 이별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야는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232p. ...어쨌든 그 아름다운 록탈관이 내 손에 들어왔다. 물론 록탈관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언제나 동경하는 배선 저쪽 세계의 확고한 아름다움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으며, 말하자면 그 세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존재로서 록탈관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록탈관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록탈관 배후 세계의 아름다움으로, 결국 사용할 수 없게 된, 그 세계와 무관한 록탈관은 더할 수 없이 비참한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록탈관은 지금 확실히 내 주머니에 있고, 그것은 겉보기에는 완전한 록탈관이다. 겉보기에 이상이 없는 것은 그 아름다움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시각을 통하지 않고는 감정에 호소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내가 지금 아름다운 록탈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나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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