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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p.
..‘생각보다‘라는 첫마디 뒤에 붙이는 말에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나는 ‘생각보다‘ 뒤에 따라오는 말에는 대부분 발끈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23p.
..어엿한 어른이니 때에 따라서는 굳이 자기 생각을 전부 고백할 필요는 없겠죠?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생각보다‘는 중립적이고 담담한 의미로만 한정해서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뭐 이런 정도로만....

79p.
..흘려넘겨도 되는 것은 가볍게 훌훌 흘려넘긴다. 거기에 내 본질같은 건 없으니까.

99p.
..삼십대든 사십대든 모조리 뭉뚱그려서 ‘아줌마‘였던 젊은 날이 저 멀리 떠나버렸음을 절절히 실감했던 과일 디저트 전문점에서의 미팅. 찬찬히 살펴보니 바로 코앞에서 핫케이크에 포크를 찔러넣는 그녀들의 손끝은 무척이나 싱그럽고 윤기 넘쳤다! 버석버석 메마른 내 손을 바라보다 문득 나이는 끄트머리에서부터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20p.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를 ‘세련‘되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세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129p.
..딱 부러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미지의 세계. 어렴풋하게는 알지만 사람마다 미묘하게 다른 것. 그런 말은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사무라이가 들어간 말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방관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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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는 중식당 원탁에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건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내의 무거운 분위기가 양어깨를 짓눌러와 뭉치기 시작했다. 원탁에서는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잘 보인다....

..뒤죽박죽 불가사의하게 이어지는 이모들의 대화. 서로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어떤 기적처럼,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선문답처럼 느껴졌다. 이모들의 발상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듣다보면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진지하게 두 사람의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은 점점 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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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쇼우쩌手澤’라는 말이 있고, 일본에 ‘나레慣’라는 말이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에 사람이 손을 대어서, 한군데를 반들반들하게 만지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기름이 스며들게 되는 광택을 이르는 것으로, 바꿔 말하면 손때임에 틀림없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풍류는 추운 것’인 동시에 ‘때 묻은 것’이라는 경구도 성립한다. 어쨌든 우리들이 좋아하는 ‘아치雅致’라는 것 속에는 어느 정도 불결한 동시에 비위생적인 분자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서양인은 때를 송두리째 벗겨내 없애려고 하는 데 반해, 동양인은 그것을 소중히 보존하여 그대로 미화한다고, 억지스러운 말이 되겠지만, 숙명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때나 그을음이나 비바람의 더러움이 붙어 있는 것, 내지는 그것을 생각나게 하는 색조나 광택을 사랑하고, 그런 건물이나 가구 가운데 살자면 기묘하게 마음이 풀리고 신경이 편안해진다....

...사실 다다미방의 미는 전적으로 그늘의 농담에 따라 생겨난 것이고,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당시 중류계급 이상의 여자는 절대로 외출하는 경우도 없었고, 가령 가마에 깊숙이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면, 대개는 저 어두운 집과 대지의 한켠에 낮게 깔려서, 낮이건 밤이건 오직 어둠에 온몸을 묻고 그 얼굴만을 존재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의상 따위도 남자의 것은 현재보다 더 화려한 데 반해 여자의 것은 그 정도는 아니다. 옛날 바쿠후 시대, 시내에서 장사하는 집의 딸이나 부인들은 놀랄 만큼 수수한데, 그것은 요컨대 의상이라는 것이 어두움의 일부분, 어둠과 얼굴과의 관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검게 물들이는 화장법이 행해진 것도, 그 목적을 생각하면, 얼굴 이외의 빈틈을 모두 어둠으로 채워 버리려고 입 안까지 검게 한 것은 아닐까....

...마침 내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눈썹을 깎고 이를 검게 한 삼십 대의 하녀가, 큰 장지 앞에 촛대를 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다다미 두 장 정도로 밝기가 한정된 장지 뒤편에는 천장에서 막 떨어질 것 같은 높고 짙은 오직 한 가지 색의 어두움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미덥지 못한 촛불이 그 두께를 뚫을 수 없어 검은 벽에 맞닥뜨린 것처럼 반사되어 나오는 것이 었다. 여러분은 이런 ‘등불에 밝혀진 어둠’의 색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밤길의 어둠과는 어딘가 다른 것이어서, 가령 한 알 한 알이 무지개색의 반짝임을 지닌, 미세한 재 같은 미립자가 충만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것이 눈 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을까 하여 무의식중에 눈꺼풀을 깜박거렸다....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 채 정도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자,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잠만 자는 것은 독이다’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음식의 양을 줄이고 종류를 줄이면, 그것만으로 전염병 같은 위험에 걸리는 경우도 적다. 칼로리다 비타민이다 시끄럽게 떠드는 시간이나 신경을 쓰는 사이에, 아무것도 안하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쪽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쪽도 있다. 세상에는 ‘게으른 자의 철학’이 있듯이, ‘게으른 자의 건강법’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개 현대의 도시인은 진짜 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도시인이 아니라도, 요즈음은 꽤나 변방의 시골 거리라도 은방울 모양의 꽃등이 꾸며진 세상이므로, 차차 어둠의 영토는 내몰려서, 사람들은 모두 밤의 암흑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때 교토의 어둠을 걸으면서, 이것이 진짜 밤이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밤의 어둠을 잊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 기억나지 않는 행등의 밝음 아래서 자던 무렵의 밤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쓸쓸하고, 섬뜩하고, 따분한 것이었던가를 떠올리고, 이상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요즘 사람은 《겐지 모노가타리》 이하 옛 소설에 나타나는 부인의 성격이 여기든 저기든 하나같아서 개성을 나타내지 못하였다고 공격하겠지만, 옛날의 남자는 부인의 개성 때문에 사랑한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한 여자의 얼굴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에 홀렸던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달은 항상 같은 달인 것처럼, ‘여자’도 영원히 단 하나의 ‘여자’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를 듣고, 옷 냄새를 맡고, 머리카락에 대고, 요염한 촉감을 손으로 더듬어 느끼고, 그래도 밤이 밝으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바의 그런 것들을 여자라고 생각하였으리라.

...촌티 나는 것이 싫은 나는 자연 서생티 나는 것도 싫어서, 어느 정도 말하기에 족하다 생각하는 상대가 아닌 한에, 좀처럼 문학론이나 예술론 따위로 싸우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나에게는, 문학자는 붕당을 만들 필요가 없다, 될 수 있는 한 고립해 있는 쪽이 좋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인데, 이 신념은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나가이 가후 씨를 경모하는 것은, 가후 씨가 고립주의로 일관했던 실행자였고, 가후 씨만큼 철저히 이 주의를 밀고 나간 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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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vidual의 구성은 in+dividual이며, divide(나누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dividual에 부정접두사 in이 붙은 단어다. individual의 어원은 직역하면 ‘불가분不可分’,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이며, 이 말이 오늘날의 ‘개인’이라는 의미로 정착된 시기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에 접어든 후였다.
..일본인은 이 개념을 서양에서 유입한 셈인데, ‘개인’이라는 일본어에서는 ‘나눌 수 없다’는 본래의 뜻을 감지하기 어렵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 ‘개인’이 안고 사는 다양한 문제들은 이 보이지 않게 된 어원 속에 감춰져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타자와의 공동 작업이다. 대화 내용이나 말투, 기분 등등 모든 것이 상호작용 속에서 결정된다. 이유가 뭘까?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은 그것 자체로 기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들었던 예처럼, 우리는 그중 어떤 나를 자의적으로 ‘진정한 모습’이라고 결정해버리는 데에 저항감을 느낀다. 그렇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만 그것은 그 자리만의 표면적인 나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가면을 썼을 뿐이다. ‘진정한 나’는 좀 더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고, IT에 관해서도 좀 더 상세하게 안다고.
..우리는 타인이 내 본질을 규정하고, 나를 왜소화시키는 게 불안한 것이다.

..이 문제는 창작과도 관계가 있다. 소설에서 어떤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것은 그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일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절실한 의문을 소설 창작을 통해 깊이 음미해보기로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 일터에서의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보고, 다양한 주제를 순회하는 ‘자아 찾기 여행’에 나선 셈이다.

..자상행위는 자기 자체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자기 이미지’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 라고. 때문에 확실하게 죽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은가. 지금 이대로의 나로는 살기 괴로우니 그 이미지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기 이미지를 획득하려 한다. 요컨대 죽고 싶은 소망이 아니라 살고 싶은 소망의 발로가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존중받고 싶어 하는 만큼 타자의 개성도 존중해야 한다. 거듭하는 말이지만, 상대를 막론하고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 진정한 나야!’라고 억지를 부리려 하면, 상대가 넌더리를 낼 게 불을 보듯 훤하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상대와의 개성 사이에서 조화를 찾아내려 하고, 그때그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격을 만들어내며, 실제로 그 인격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저절로 기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여러 인격으로 본심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언동에 감동받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인생을 바꿀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요컨대 그 여러 개의 인격이 모두 ‘진정한 나’다.

..사회적인 분인의 커뮤니케이션이 깊이가 얕은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없으면 커뮤니케이션은 다음 단계로 깊어지기 힘들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다양한 조직 세포로 분화해가는 줄기세포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셈이다.
..타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할 때, 사회적인 분인으로 접하는 단계를 건너뛰고 느닷없이 자기를 모두 드러내며 얘기하기 시작하면, 상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분인화는 어디까지나 상호작용 속에서 일어나므로 상대가 일방적으로 개성을 밀어붙이면, 자기도 왠지 거기에 맞춰줘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나만을 위한 인격을 발견하면 매우 기쁘다.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대해주는 데 크게 감동하는 것이다.
..로봇과 인간의 최대 차이점은, 로봇은-현재까지는-분인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약 상대에 따라 성격까지 바뀌는 로봇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다 인간에 가깝다고 느낄 것이다.

..팔방미인이란 분인화에 능란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당히 맞춰주면 통한다고 얕보고, 상대에게 맞춘 분인화를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파티에서는 파티라는 자리에 맞춘 분인화는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나아간 개별적인 인간의 개성은 소홀히 여긴다. 따라서 한데 싸잡아서 똑같이 취급받는 우리는 ‘나한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저런 태도를 취하는군!’이라며 팔방미인을 신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혼자 있을 때는 늘 똑같은, 수미일관된 내가 생각에 잠긴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양한 분인이 번갈아 살아가며 생각에 잠길 게 틀림없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무색투명한 ‘진정한 나’라는 존재는 이런 상황에서도 날조하면 안 된다. 미디어 같은 데서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거나 뇌에서 회의가 열리는 장면이 자주 묘사되는데, 그런 식으로 우리는 여러 분인을 통해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도 상담 전문가도 아니지만, 이 이야기를 들으니 예전에는 개인 단위로 발병했던 우울증이 이제는 분인 단위로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한 분인을 갖고 있을 때는 일종의 리셋 소망이 싹튼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야말로 신중하게, 지워버리고 싶고 그만 살고 싶은 것은 여러 개의 분인 중에 불행한 분인 하나임을 의식해야 한다. 잘못해서 개인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다거나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페캉에서」라는 소설에서는 이것을 ‘자기’와 ‘자기상’의 차이라는 형태로 정리했다.
..나는 이 주제를 『공백을 채우세요』라는 장편소설에서 또다시 다뤘다. 일단 분인이 생겨난 이상, 그것을 쉽게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계를 끊으면, 그 분인은 갱신되지 않으며 하루 중에 그 분인으로 살아가는 시간도 줄어든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다른 분인보다 비중이 낮아질 게 틀림없다.

..은둔형 외톨이는 대인 관계를 차단함으로써 ‘지우고 싶은 분인’을 소멸시키는 일면이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실제로 불교의 출가는 사회적인 분인을 말소하고 종교적인 분인으로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절차다.
..그러나 일단 틀어박혀버리면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이 사라지고, 지금 갖고 있는 타자와의 분인도 갱신할 기회를 잃고 만다. 따라서 오로지 과거의 분인으로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변화’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람은 왜 어떤 사람과는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또 어떤 사람과는 별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상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기 때문일까? 그런 점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상대와 함께할 때의 나(분인)가 좋으냐 싫으냐 하는 면이 크게 작용한다.

..일하는 분인이 크고 비대해서 연인과의 분인이 상대적으로 작아진 사람은 평소에는 일에 몰두하므로 휴일만큼은 느긋하게 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딱히 일이 바쁘지 않고 연인과의 분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상대가 적어도 휴일만큼은 나와의 분인으로만 살아주길 바란다. 그에게는 나와의 분인이 전혀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면 번민하게 된다. 그것이 불화의 씨앗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파트너는 아주 비슷한 분인 균형을 가진 사람이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쪽 다 일의 분인에 지나치게 충실해서 상대에 대한 분인이 위축되어버리면, 연예인 이혼 같은 데서 자주 거론되는 ‘바빠서 소원해지는’ 상태가 된다.

..그 분인은 이제 추억 속에서만 살아간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뜻밖의 언동으로 갱신될 기회가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슬픔이다.
..심리학에서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애도 작업’이라 부른다. 그것은 그 고인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 분인의 활발한 기능을 서서히 멈춰가는 과정일 것이다.

..‘악인’이 죄를 범할 때까지 경험한 모든 분인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해가면, 저지른 죄는 ‘악’일지라도 그를 ‘악인’으로 간주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그런 분인화 과정을 어느 정도 선에서 생략하고 편집할 수밖에 없다. 모든 등장인물을 세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하면, 몇만 장을 써도 소설은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앞에 불쑥 나타난 등장인물은 본성상 ‘악인’으로 보이거나 ‘선인’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자를 만날 때도 경험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낯선 타인은 우리 앞에 늘 과거의 분인화 과정이 트리밍된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도 그 사람의 분인 구성의 유래를 알고 나면 이해되는 구석도 있을 것이다. 형사사건 재판에서 피고의 성장 내력이 밝혀져서 정상참작이 요청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트리밍의 외측을 주목하는 예다.
..중요한 것은 항상 그러한 상상력을 갖는 자세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개인’이라는 사고방식에는 커다란 폐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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