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아타고야마愛宕山’라는 만담이 떠올랐다. 소식이 끊긴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은 깜깜한 밤중에 벼랑에서 술잔을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술잔들이 어디서 산산이 깨어져 흩어지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던질 수 없을진대.
..곤부도 그렇고 가네가사키도 그렇고 나라는 인간을 증명하는 과거가 소리도 없이 잇달아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우울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 선 채 오도 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그래, 절벽에서 어둠을 향해 던져지는 질그릇이 곧 나 자신인 것이다. 뒤쫓을 수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땅바닥 어딘가에 부딪혀 산산이 깨질 운명. 그렇다면 던지는 자는 누구인가.

.."하지만 음식을 두고 불평하는 것처럼 천한 짓도 없지. 안 그래? 배를 곪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나는 동의를 표하려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토를 달 수 없는 정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의의 정론이 전 세계에 만연해 있어서 참으로 숨이 막혔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었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내가 이 수용소에 있듯이 작가들도 궁지에 몰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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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코도 그랬지만, 유사쿠도 그리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평범한 고등학생이 흔히 하는 옷이나 연예인 같은 현재 이야기보다 미래에 시선을 보내는 대화가 많았다.

..새삼 어제 본 그림자를 생각했다. 얼핏 보았을 뿐이어서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순간, 왜 그가 지금 여기에, 라고 생각한 것은 분명하다. 순간적인 인식은 의외로 틀리지 않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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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p.
..주변이 어둑해지며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서도 석양의 빛을 받아 황제의 색을 띤 쯔진산은, 이때의 나에게는 거의 종교에 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저 자금색의 산은, 인간의 역사가 다 끝난 뒤에도, 이 지상의 생명체가 모조리 모습을 감춘 뒤에도, 완만한 능선 어딘가에 때로는 험준한 저 모습 그대로 계속 존재해나갈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자연은 쉬안우호玄武湖나 시호西湖처럼 사람 손이 닿은 것이든, 또 저 산처럼 자연 그대로의 것이든 모두 어딘가에 인간을 소외시킨 것 같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인간의 역사 이전부터 그리고 역사 이후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비정함을 품고 있다. 역사 이후의 자연(그런 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그 풍경을 보고 싶다면, 제군들, 늦가을 저녁 무렵 난징으로 오시게나. 그리고 쉬안우호를 앞에 둔 성벽 위, 쉬안우문玄武門 누각에 올라 쯔진산을 바라보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43p.
..남자가 자기는 영웅도 그 무엇도 아니고 그저 시시한 보통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려면 여자와 아이가 필요하다. 여자와 아이는 광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110p.
...자기 일과 임무에 만족해서 언젠가 그 포화점에 이르러 강한 자극을 쫓는 쪽으로 정신이 흘러가면 큰일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외부 힘에 의해 좌우되고 만다. 재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앞서 말했던 영원한 것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유동체나 기계가 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방치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123p.
..이 세상의 자연과 인간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하는 사람의 최후의 순간 눈에 비치는 경치는, 투명한 막을 통해 보듯이 모든 것이 여과되어 아름답다고 한다.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다.
..주관의 극한. 인식의 고정화와 그 극복.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남자건 여자건, 요컨대 그 고독은 애정과 우정에 의해, 이 세상 모든 것에 의해 떠받쳐진 고독이다. 사람은 오히려 둔화되어 이데아와도 비슷한 애정과 우정을 보고 있을 뿐 풍경 그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떤 죽음이건 죽음은 똑같다. 하지만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에게, 물고기의 눈이 되어 본 풍경은 황량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의미하다. 풀이 있건 나무가 있건, 눈이 오건 오지 않건, 그것은 바위와 금속으로 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의 아름다움은, 진리는, 아름답거나 진짜 같거나 한 게 아닌모양이다.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134p.
...전쟁에는 아무래도 연극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 같다. 연기를 하는 것은, 사물이나 시간의 질과 방향을 바꾸거나 하지 않는다....

137p.
..잃어버려야 비로소 참으로 그것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여러 서정시인의 발상의 밑바탕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러한 발상에 포함되어 있는 어느 정도의 나약한 근성을 적출하고, 부정하고, 거부하려 한다. 그런 발상에는 필연적으로, 내가 획득한 존재는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 혹은 사물이 내게 얻게 해준 것이라고 하는 피조물적인 의식이 따르기 때문이다.

141p.
..환기도 잘 안 되는 지하실에서 하는 사색, 극도로 주관적인 독백, 성실한 바보천치,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 애매한 재료들을 풀로 붙이면서 공상을 마치 충족된 내면의 한 세상인 것처럼 가장하여 내적 존재를 겉으로만 뽐내는 어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처우는 결코 내면에 존재하거나 하지 않는다. 지금 그녀는 어디까지나 외적인 관념인 것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냄새도 형체도 촉감도 없는, 매우 딱딱하게 굳은 관념의 단어로 말해야 한다.

159p.
.."누구라도 평화롭게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잖아."
..평화주의자가 적국의 군사력에 의지한다. 사실을 인정하라고 한다. 나도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다. 하지만 내게 있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기정사실을 한층 더 견고히 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다. 그 사실을 바꾸려고 하는 의지인 것이다. 바꾸려고 할 권리가 나에게 있을 터이다. 권리는 이것저것 특수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바꿔치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사실을 계산에 넣지 않는 특수사실주의자 혹은 현재사실주의자(표현이 이상하지만)는 자기에게 유리한 사실만 집어내고, 방해되는 것은 훌륭하게 피해버리는 특수한 재능을 갖고 있다.

161~162p
..여기서 나는 포기했다. 적어도 오늘은. 왜냐하면 지금 타격을 가하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내 사상으로는 백부라는 이 재료를 다시 조각할 힘과 기술, 제작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기술과 제작능력이 충분하지 않은데 악마의 힘이라도 빌려서, 다시 말해 기를 쓰고 덤비는 것은 사상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대리석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대리석 자체를 경멸하거나, 이걸 마구 때리거나 하는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지 조각가는 아니다. 사상은 의지와 기술, 제작능력이 사상 자체를 한참 뛰어넘지 않는 한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 호모 사피엔스-지식인보다 호모 파베르-제작인에 이르는 길이다.

227p.
.."살아간다는 것은 적신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마른다는 것. 믿으세요, 괜찮으니까."

242p.
.."지금, 이 창문으로 정원의 나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무는요, 아주 지혜롭구나. 그런 생각을요. 나무는 어떤 상처를 받더라도 그 현장을 떠날 수가 없잖아요. 도망갈 수도 숨을 수도 없어요. 그 자리에 있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나무는요, 아무리 험악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열심히 기다리는 거예요. 열심히 뿌리를 움직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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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p.
..결국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끝장으로 치닫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그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제외될 수 있었다. 이곳에 막 도착해 출발점에 선 사람부터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까지 온갖 부류를 알고 있었는데, 다들 얼마 후에는 하나같이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인생은 그저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초봄 어느 비 오는 날처럼 돈도 없는데 불운까지 겹친 현실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날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그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27p.
...그리고 이 모든 이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해 봤다. 늘 그렇듯 우리는 만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떠나온 사람들을 위한 존재다....

70p.
...하루라는 개념이 침대에서 일어날 때부터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를 구분하는 시간이라면, 이 시간을 끝내기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사실 그날은 내게 아주 고된 하루였기 때문이다.

92p.
...리비오는 왜 진작 에바를 떠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란 서로를 떠나려고 노력하지만 정말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법이다.

101p.
...계곡은 밝고 청명한 하늘의 무게에 눌려 조용했고, 공기는 무슨 징조를 기다리는 듯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더위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나는 갑자기 해야 할 무엇인가가 생각났다. 계절이 변해 원래 있던 곳을 떠나 다른 장소에 가고 싶어지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공기가 달라져 기후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22p.
...하지만 그는 내가 부축해 주기를 원하지 않았고, 상체에 힘을 바짝 주고 아주 똑바로 걸었다. 자살 시도 후에는 반드시 위풍당당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법이다.

127p.
...그 옛날 카바피스(Konstantinos Kavafis,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리스의 시인)의 말이 옳았던 걸까?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속한 도시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며, 당신을 위한 배도 도로도 없기에 다른 곳에서 희망을 품지 말라고, 이 세상 작은 구석에서 인생을 낭비한 것처럼 그 어느 곳이라고 해도 당신의 망가진 인생은 달라질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옛날 카바피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여행 가방을 떠올리며 담배 두 개비를 피웠다. 뭐, 나는 내가 와야 할 곳에 왔고, 이제 남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132p.
...투항하는 상황에서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패자가 승자보다 더 고상해 보이는데, 어쩌면 더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도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잘 가꾸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인 듯하다....

192p.
...석양 무렵 내가 바람을 쐬러 발코니로 나가면 하늘은 텅 비고 고요했다. 신문에서는 도시를 짓누르고 있는 유독성 대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유치한 합리화였다. 진실은 높은 곳에서 봐야 잘 보이는 법이다.

213p.
...렌조 부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했다. 경박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인데도 끔찍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망가뜨리고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의자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는 더 이상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

218p.
...이상하게 슬프지도 않았다. 적어도 너무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조금 지친 것은 맞다. 확실히 그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운이 좀 좋으면 역 가판대에서 좋은 책을 발견하고 기차도 너무 붐비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 책은 재미있었고 기차는 거의 비어 있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슬픔이 밀려왔다. 기차가 다른 방향, 그 어떤 방향으로 향해도 내게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239~240p.
.."우린 그런 거 감당 못해." 내가 말했다. 그녀가 내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된 지금, 바로 지금처럼 그녀가 정말 내 여자인 것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참 운도 없다. 나의 불운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여자일 때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남은 음식처럼 누군가의 잔재일 때만 내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246p.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도시이자 우리의 도시이다. 그리고 강변의 나무들과 하늘로 뻗은 교회 첨탑들을 생각한다. 그라지아노의 영화와 아리아나가 규칙적인 생활을 해 보려고 문 옆에 붙여 놓은 메모들도 생각하고, 이미 끝난 내 젊음과 경험해 보지 못할 노년을 생각한다.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과 죽은 채 태어난 아이들, 천사들, 상상 속의 사랑, 애초에 무너진 꿈들, 영원히 죽어버린 것들과 대량 학살, 잘린 나무들, 멸종된 고래를 비롯해 멸종된 모든 종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물을 버리고 나와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를 낳고 살아남은 최초의 물고기를 생각하자, 모든 것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지도 못한 모든 것과 영원히 죽은 것들까지, 그 모든 것을 받아 주는 바다를. 언젠가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이 처음으로, 혹은 다시 한번 정당성을 되찾을 날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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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p.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됐다고 마사코는 생각한다. 양달의 데워진 돌멩이를 뒤집으면 습하고 차가운 흙이 나온다. 지금 자신은 차분히 그 어두움을 맛보고 있다. 흙에 온기는 없더라도 그립고 편안하다. 마치 둥글게 몸을 만 벌레 같다. 그렇다. 자신은 벌레가 된 것이다. 마사코는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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