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p. ...게다가 소설이라는 것은 단어의 옷을 입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소설을 쓰기 위해 경험하고 고민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넓게 보면 취재의 순간 역시 집필의 순간이다. 말하자면 몸속에 소설의 공간과 공기를 새겨 넣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몸으로 쓰는 소설 역시 퇴고의 기간이 있어서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것은 몸과 정신이 자연스레 잊게 된다. 나는 이것을 몸의 퇴고라 한다....
87p. ..그 후 대학에 입학했고, 기쁜 마음에 ‘자아, 이제 본격적으로 가볼까?‘라고 결심하니,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은 사라져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가사를 옮겨 적고, 많은 음표들이 떠다니던 갈색 테이블과 자줏빛 소파는 길가에 내버려져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목이나 사연만 읽어줄 뿐, 별다른 말없이음악과 음악 사이의 이음새만 손질하던 과묵한 DJ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소중한 또 하나의 것이 거리에서 가슴으로 이주해왔다.
138~139p. ...그것은 분명히 하나의 클럽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말하자면, 경기가 없어도 찾아와서 경기장에 감도는 전운과 백 년 이상 쌓아올린 승리와 실패를 맛보게 하는 것, 그리고 승리와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장이 살아온 것처럼 선수들도 살아갈 것이며, 관중들도 살아갈 것이라는 것. 어떤 이는 축구선수로, 어떤 이는 해설자로, 어떤 이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으로,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즐거워하는 것 사이를 오가며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것, 결국 시합도 훈련도, 여행도 일상도, 여유도 바쁨도, 칭찬도 비난도 언젠가는 승리와 패배처럼 그저 ‘삶이라는 명사 하나 이상(의 그 무엇)‘에 켜켜이 쌓여갈 뿐이라는 것.
143p. ...하지만, 어쩐지 추억의 앨범을 펼쳐야만 살아나는 예술가는 쓸쓸하다. 비단 예술가에게뿐 아니라, 그 쓸쓸함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느껴진다. 사람과 술은 오래될수록 좋지만, 오래돼서 좋은 이유는 만날 수 있고, 꺼내 마실 수 있기 때문 아닌가. 나는 그렇기에 굳이 ‘X-Japan 적인 삶‘과 ‘안전지대적인 삶‘을 택하라고 하면, 약간은 망설일지 모르겠으나 결국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박물관에 사진으로 걸린 채, 견학 온 초등학생들에게 ‘저런 사람이 있었어요. 굉장히 용감하게 싸웠고, 굉장히 장렬하게 전사했어요‘라고 소개받는 건 곤란하다. ‘일동 묵념‘ 같은 존경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144p. ...누구나 생의 길을 걷다 보면 진흙이 묻기 마련이고, 햇볕을 쬐다 보면 검게 그을리기 마련이고, 즐겁게 웃다 보면 주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 마련이기 마련인 것을 외면하려면 자신을 혹독하게 박제시킨 후, 박제된 자신, 즉 삶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만을 안주삼아 술잔을 들이켜며 생의 나날들을 고독하게 보내야 한다....
157p. ...역시 사람은 사회적 계급을 모두 떼버리고 무작위로 모여봐야, 인생에서 자신이 처한 위도와 경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어버렸다는 것을 훈련을 받으러 온 동년배들을 통해 뒤늦게 깨달았다.
198p. ..우리는 여행을 떠났을 때, 뭐든지 빌려 쓰는 걸 당연하게 느낀다. 그런데, 폭넓게 보자면 천상병 시인이 이 땅에서의 삶을 ‘한 번의 소풍‘으로 비유했듯, 인생 자체가 한바탕 여행 아닌가. 즉, 우리 인생을 긴 여행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빌려 쓰면서 그것을 내 것으로 긍정하며 지낼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명백한 착각이지만,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낙관적인 착각이라 할 수도 있다. 오늘은 ‘백세 시대‘라는 예기치 못한 생의 연장을 부여받은 우리에게, 과연 소유란 무엇이고 대여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200p. ..물론 집만 이런 건 아니다. 소모품, 가령 연필이나, 노트북이나, 전화기 따위는 나보다 일찍 죽어버린다. 온전히 내 것이라면 내가 웃고, 우는 평생 동안 함께할 수 있어야 하지만, 이것들은 그저 내게 잠시 머무를 뿐이다. 비록 내가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표면적으로는 내 소유로 인정을 받더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살아 있는 나를 떠나 어느 순간 죽어버린다. 그렇기에 나는 항상 떠나보내야 한다. 과연 나를 스쳐지나갈 뿐인 것을, 온전한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구매‘란 비용을 지불했더라도 결국 ‘화폐의 교환행위‘인 것이다. 화폐와 물품을 교환했지만, 그 물품이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없다면?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빌려 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은 ‘끊임없이 뭔가를 빌려 쓰는 날들의 연속‘이다.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 땅에서의 삶의 전제조건이다. 물론, 모든 이의 생이 이렇다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일단 내가 처한 생은 이렇다.
200~201p. ..이 생각이 햇살처럼 꾸준히 마음을 비추면 얼음처럼 견고했던 헛된 희망도, 쓸데없는 꿈도 스르륵 녹게 된다. 인생은 담백해지고, 바라는 건 소박해지고, 일상은 간결해진다. 소유에 대한 집착도 줄고,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준다. 원래 내 것은 없었기에, 당연히 모든 걸 빌려 쓴다고 여기게 된다. 이렇듯 하루씩 자신의 삶을 빌려 쓰게 된다. 결국, 삶 전체가 빌려 쓰는 것이 된다.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232p. ..약간 동떨어진 인용이긴 하지만, 언젠가 한 소설가의 산문집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차밭 주인은 남의 밭 차에 대해 품평하지 않는다."....
234p. ..굳이 이런 걸 바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이런 원칙이 삶이라는 바쁜 여정에 오른 행인에게 건네는 차 한잔 정도는 된다. 여하튼, 차밭 주인은 남의 차에 대해 품평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로, 작가 역시 다른 작가의 작품에 대해 품평하지 않는다. 인간 역시 다른 인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소설을 쓰건, 차 농사를 짓건, 그 밭 옆길을 지나가건, 삶은 누구에게나 정직하게 다가온다.
240p. ..간혹 밤에 스탠드를 켜놓고 <You Can‘t Go Home Again>을 즐겨 듣는데, 시원한 밤바람이 들어오는 5월, 창을 열고 들으면 정말 좋다. 특히 좋은 건 트럼펫을 연주하다 숨이 차서 쳇 베이커가 숨을 들이쉬는, 즉 들숨의 소리인데, 듣다 보면 ‘그래, 결국 사람이 하는 거였군‘ 하는 생각이 든다. 들숨과 날숨으로 양분해서 생각하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트럼펫 연주는 결국 전적으로 날숨에 의존해 있는데 어쩐지 들숨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아니,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는 거야‘라고 의문을 품게 된다....
285p. ..살다보니 점차 삶의 아픈 면이 보인다. 게다가 내게도 어느덧 흰머리가 하나씩 생길수록 ‘유머의 모발(이란 게 있다면, 이 소중한 것)‘이 하나씩 줄어가는 기분이다. 하여 요즘 바라는 것은 기왕 유머의 모발이 줄어간다면, 웃음의 대가로 상처를 치러야 했던 뾰족한 유머의 모발이 줄어가는 것이다. 대신 나와 당신이 함께 즐겁게 살 수 있는 유머의 모발은 천천히 줄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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